프레너미 시리즈3 - '악성 베토벤 & 식성 로시니' (2)
로시니(1792~1868)는 베토벤보다 22살이나 어렸지만, 이른 바 성공을 거둔 시기는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다. 베토벤은 막 성공의 자리에 올라서려고 할 즈음에 음악가로서는 가장 치명적인 청각에 문제가 생겼다. 그 이후엔 일생을 장애와 싸우면서 음악가로서의 인생을 만들어나갔다. 베토벤은 그래서 '악성'이라고 불리며, 이전의 거인 바흐나 모차르트와도 다른 대접을 받는다.
반면 로시니는 20대 초반부터 별 어려움 없이 승승장구하는 인생을 살았다. 서로 다른 삶의 행보였지만, 그들은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걸작을 남겨 클래식 음악의 역사에 큰 족적을 새겼다.
승승장구 청년 부자 음악가, 로시니
로시니는 18세였던 1810년 첫 오페라 <결혼보증서(La cambiale di matrimonio)>를 베네치아에서 초연해 소년작곡가의 존재를 알렸다. 이듬해 소년 시절의 본거지 볼로냐에서 <터무니없는 오해(L'Equivoco stravagante)>를 공연한 데 이어 약관 20살인 1812년에는 베네치아, 밀라노, 로마, 페라라에서 무려 6개의 오페라를 공연하였다. 대체로 규모가 크지 않은 코믹 오페라나 멜로드라마이긴 했으나, 단순 성악 반주였던 당시 이탈리아식의 오케스트레이션에서 벗어나려는 개성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21살이 되면서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 돌아선 그는 심각하고 복잡한 스토리를 가진 대본들을 채택하기 시작한다. 1813년 베네치아에서 초연된 비극 <탄크레디(Tancredi)>를 비롯해 <드라마 지오코소(Drama giocoso)>, <알제리의 이탈리아인(L'italiana in Algeri)>은 본격적인 성공을 거둔다. 이로써 갓 사춘기를 벗어난 청년 작곡가는 자신의 이름을 전 유럽에 알리게 된다. 모차르트조차도 누려보지 못한 수준의 유명세를 얻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오페라계의 아이돌이었다.
그러나 재능으로 무장한 신인에게도 시련은 찾아왔다. 자신감이 하늘에 뻗친 로시니는 <팔미라의 아우렐리아노(Aureliano in Palmira)>, <이탈리아의 터키인(Il Tturco in Italia)>을 작곡했는데 기대했던 것 만큼의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절치부심하며 <시기스몬도(Sigismondo)>에 열정을 쏟아부었는데, 관객들의 반응은 예상과 완전히 달라서 참패의 쓴 맛을 봤다. 풀이 죽은 로시니는 4년 만에 사실상의 고향인 볼로냐로 돌아갔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말이 이때의 로시니에게 딱 맞는 말일지 모르겠다. 청년 로시니의 재능을 알아본 나폴리의 흥행주(impresario) 도메니코 바르바야(Domenico Barbaia)가 있었다. 야심가였던 그는 로시니에게 일찍이 다른 작곡가가 받아본 적이 없는 제안을 내민다. 월 200 두카트의 월급에 나폴리 2개 극장의 음악감독 자리를 맡으라 하면서 1년에 1개 이상의 오페라 작곡을 부가조건으로 걸었다. 게다가 추가 보너스도 있었다. VIP들이 대상인 극장의 별실 사교장(ridotto)에 마련된 도박장에서 나오는 수입의 일정 부분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요즘에 빗대면 졸지에 카지노 지분을 받게 된 로시니는 이후 '재벌급 음악가'가 될 수 있었다.
기회를 잡은 로시니는 바로 나폴리로 떠났다. 그 첫 작품은 1815년 10월 초연된 <영국 여왕 엘리사베타(Elisabetta, regina d'Inghilterra)>로 대반전의 성공을 거두었다. 나중에 이 작품의 주연을 맡았던 소프라노 가수 이사벨라 콜브란(Isabella Colbran)과 결혼했다. 야구로 치자면 역전 만루홈런이라고나 할까. 후속작인 <토르발도와 돌리스카(Torvaldo e Dorliska)는 나폴리 바로 위쪽 로마에서 그해 12월에 초연되어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그걸로는 로시니에게 충분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석달 후인 1816년 2월 로시니의 대표작 겸 인기작인 <세비야의 이발사(Il barbiere di Siviglia)>가 로마의 테아트로 아르젠티나(Teatro Argentina) 극장에서 초연된다. 로시니 본인은 10일 만에 썼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자료들은 작곡에 3주가 걸렸다고 한다. 이 작품은 문제작이자 슈퍼히트작이었다. 문제작인 이유는 로시니의 선배격인 조반니 파이지엘로(Giovanni Paisiello, 1740-1816)가 프랑스 극작가 보마르셰(Pierre Beaumarchais)의 대본에 작곡한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가 이탈리아를 넘어 유럽 전역에서 목하 인기를 끌고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 연극 자체의 인기가 상당해 몇몇 작곡가들이 같은 대본으로 오페라를 만들었지만, 파이지엘로만이 독야청청한 상태였다.
그런데, 파이지엘로보다 무려 52살이나 어린 풋내기가 도전장을 내민 셈이었다. 파이지엘로의 팬들이 조직적으로 악의적 선전을 일삼자 불안해진 바르바야는 로시니를 설득해 초연 당시 오페라의 제목을 <알마비바(Almaviva)>로 바꿨다. 이에 더 고무된 파이지엘로의 팬들은 초연때 단체로 티켓을 구매해 객석을 채운 뒤 아리아가 끝날 때마다 야유를 보내고 휘파람을 불어댔다. 가장 심각한 것은 여자 주역 로지나가 아리아를 부를 차례가 됐을 때 무대에 쥐를 풀어놓아 가수가 혼비백산하게 하는 등 각종 무대사고를 일으켰다. 이런 난장판이 벌어진 탓에 결국 초연은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배후의 조종자가 파이지엘로일 수 없었던 이유가 당시 그는 중병에 걸려 초연 후 몇 달만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다음 날 이 소문이 쫙 퍼지면서 오히려 호기심이 생긴 팬들이 오페라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방해소동이 되려 공전의 히트를 치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다. 소문에 발이 달렸는지, 유럽 전역으로 퍼진 소식 덕분에 초연 1개월만에 런던에서도 상연이 시작되고, 런던의 음악팬들에게도 모르면 유행에 뒤처진 자로 취급받을 정도로 대인기를 누렸다. 본격적으로 유럽 각지에서 공연되기 시작하면서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파이지엘로의 작품은 잊혀진 유행가로 전락했다.
겨우 24살의 나이에 유럽 최고 인기오페라의 작곡가로 떠오른 로시니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작품들을 마음껏 쓸 수 있었다. 같은 해 초연한 <오텔로(Otello)>의 경우 비극적이고 복잡한 스토리를 풀어가는 관현악과 진지한 성격묘사로 전작들과는 다른 반전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이후 벨리니 - 베르디 - 푸치니로 이어지는 이탈리아 비극 오페라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또다른 대표작 <신데렐라(La Cenerentola)>가 1817년 로마의 발레 극장에서 초연되는데, <세비야의 이발사>만큼이나 빠르게 유럽 전역에서 환영을 받는다. 연타석 만루홈런을 날린 로시니는 자기 오페라의 저작권 수입만으로도 거부의 반열에 올라섰다.
1822년 빈을 방문한 로시니는 나폴레옹 전쟁을 수습하며 유럽의 실세로 떠오른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상 메테르니히의 초대를 받고, 또 자신의 오페라 <신데렐라>와 <젤미라(Zelmira)가 상연되는 극장을 방문해 직접 지휘봉을 잡기도 한다. 이듬해인 1823년, 로시니는 영국 왕립극장(King's Theatre)의 초청으로 5개월의 런던 체류를 마치고 귀국길에 프랑스에 들른다. 거기에서 국왕 샤를 10세로부터 파리의 이탈리아 가극장(Comédie-Italienne) 예술감독직을 제안받아 이듬해 정식으로 부임하였다. 여기서 몇 곡의 프랑스어 오페라를 작곡한 그는 37살인 1829년 마지막 오페라 <기욤 텔>(Guillaume Tell)을 발표하였다.
장애와의 투쟁에서 나온 진주 같은 음악, 베토벤
22살 연하인 로시니가 태어나던 해인 1792년 빈에 온 22살의 베토벤은 하이든의 문하생이 되었다가 포기하고, 요한 솅크를 비롯해 요한 알브레히츠베르거와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배운다. 주사파 아버지에게 모차르트를 닮으라고 피아노 연습을 강요당했기에, 절대적 연습시간이 쌓인 그의 피아노 연주는 출중했다. 발트슈타인 백작으로부터 빈의 귀족 사교계에 소개된 그는 귀족이나 부유한 집안의 잔치나 모임에서 연주를 하면서 생계를 꾸려갔다. 그의 뛰어난 즉흥연주능력은 귀족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로프코비츠 공작, 리히노프스키 공작, 판 슈비텐 남작 등 빈의 여러 귀족들이 재정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
여기에는 이름에 얽힌 재미있는 설이 나타난다. 할아버지 루트비히(1712~1773)는 브라반트 공국(현재 벨기에 플랑드르 지역)의 메헬렌 마을 출신이었는데, 베토벤(Beethoven)이라는 성은 네덜란드어로 사탕무를 뜻하는 비트(beet)와 과거 영주들이 농부들에게 할당한 경작용 토지를 뜻하는 단어 hove의 변형 hoven이 결합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성 앞에 '판(van)'이 붙어있다. 독일의 귀족들은 대개 자신의 영지 앞에 'von'이 붙어있다.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에서는 di 또는 da를 쓰고, 프랑스에서는 de, 스페인에서는 del을 쓴다. 따라서 독일계의 귀족들이 베토벤(Beethoven) 앞에 붙은 판(van)을 보고 귀족 출신인데 몰락한 집안 정도로 받아들였고, 그래서 교류하고 지원하는데 이질감을 덜 느꼈을 가능성이 충분한다는 것. 그래서인지 빈 사람들은 종종 그를 루트비히 폰(von) 베토벤으로 불렀는데, 베토벤은 호칭에 대해 무관심했다. 그렇다고 베토벤이 귀족처럼 잘난 척했거나 스스로 귀족이라고 자부했다거나 하는 것은 기록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친구들 편지에서 농담조로 '귀족 나리'라고 하자 "그런 농담 재미없네"라면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1795년 베토벤은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들고 정식 공연에 데뷔한 후 본격적인 활동을 펼쳐간다. 리히노프스키 공작의 후원으로 프라하, 드레스덴, 베를린으로 연주여행을 하면서 유럽 각지에도 점차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1800년에는 1번 교향곡과 6곡의 현악 4중주곡을 발표해 작곡가의 입지를 다지는데, 초기 작품들은 아직 모차르트와 하이든이라는 선배 대작곡가들의 그림자가 남아있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이 즈음부터 베토벤은 귀에 병이 생긴다. 귀가 생명인 음악가에게 청각장애는 사형선고와 같은 것이어서, 당시 친구들 기록에는 베토벤의 표정은 늘 어두웠고, 사람 만나기를 꺼리며 엄청나게 괴로워했다고 적혀있다.
당시의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하일리겐슈타트 유서(Heiligenstädter Testament)인데, 1802년 10월 6일에 두 동생, 카를과 요한에게 쓴 편지이다. 물론 베토벤은 자살하지 않았고 25년후 베토벤이 사망한 1827년 3월에 비서 안톤 쉰들러(Anton Schindler)와 슈테판 폰 브로이닝에 의해 발견되어 10월에 공개되었다.
베토벤은 유서를 쓴 후 마음을 다잡고 신으로부터 주어진 음악적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고, 음악의 사명을 띠고 새롭게 태어나기로 결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가 이전과는 다른 자신만의 음악어법으로 작품을 쏟아내기 시작한 데서 엿볼 수 있다. 그해 2번 교향곡을 썼고, 이듬해에는 오라토리오 <감람산의 예수 그리스도>를 작곡했다. 이 작품에서 십자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고뇌하는 예수의 모습은 귀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고뇌하던 베토벤 자신의 모습을 반영한 건 아니었을까.
자존심이 강했던 베토벤은 돈에 대해 철저했지만, 그렇다고 수전노도 아니었다. 청각장애가 심해질 무렵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요양할 때 일이다. 동네 악단이 지역을 상징하는 음악을 하나 만들고 싶은데 마침 베토벤 선생이 오셨다고 해서 찾아왔다며 곡을 하나 부탁한 것. 시골에서 마을 사람들과 농부들의 여흥을 위해 연주하는 수준의 악단인지라 작곡료로 준비한 돈도 파리 눈꼽 만큼일 수밖에. 하지만 베토벤은 '이런 시골에 오케스트라가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면서 거부하지 않고 작곡을 해줬다고 한다. 그 악보와 관련 기록은 지금도 하일리겐슈타트에 있는 베토벤 관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1804년, 드디어 그는 작곡가로서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한다. 3번 교향곡 "영웅"과 피아노 소나타 21번 “발트슈타인”(Waldstein Sonata, op. 53)이 발표된 것이다. 장대한 전개부를 가진 1악장과 장송 행진곡을 도입한 2악장은 당대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실험이었으나, 음악사가들은 교향곡 스타일의 전기라고 평가한다. 원래 공화주의자였던 그가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고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을 달았다가 나폴레옹이 황제 대관식을 했다는 소식에 격분하여 표지를 갈갈이 찢고 "이름 없는 영웅에게"로 고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듬해인 1805년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오페라 <피델리오(Fidelio)>를 작곡했고, 괴테의 시에 기초한 시극 "에그몬트", 5번 교향곡 "운명", 6번 교향곡 "전원"과 피아노 협주곡 4번과 제5번 "황제", 바이올린 협주곡 등 다양한 걸작들을 쏟아낸다. 비교적 짧은 시간에 걸작들이 나타난 것에 대해 베토벤 연구자들은 이렇게 해석한다. 청각장애가 심해지면서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를 피하고 독서와 사색에 침잠하면서 오히려 음악적 깊이가 형성되는데 큰 기여를 했다는 것. 실제로 베토벤의 독서목록에 는, 셰익스피어 등 과거 대문호들은 물론 당대의 작가들인 괴테나 쉴러의 작품들이 들어있으며, 심지어는 칸트와 인도 철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고 전해진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이 패배를 거듭 하면서 루돌프 대공을 비롯한 베토벤의 후원자 귀족들은 차례로 몰락해갔지만, 오히려 전 유럽에 명성을 떨치던 베토벤은 각지의 악보출판사로부터 받는 인세가 증가하며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엘바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이 최후의 결전을 펼치던 1814-1815년 베토벤의 유명세는 오히려 절정을 맞이했다. 1813년에는 교향곡 “웰링턴의 승리”(일명 전쟁교향곡)를 작곡해 발표했고, 1814년 초 독일 해방전쟁에 즈음해서는 “게르마니아의 부활”을 작곡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대패하고 독일에서 물러나자 연달아 애국주의적인 작품들을 쏟아냈다. 1814년 나폴레옹이 퇴위당해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당하고 전 유럽 국가들이 전후처리 과정을 논하기 위해 제국의 수상 메테르니히가 빈 회의를 소집한다. 이때 개회 기념행사로 오페라 <피델리오>가 재상연되었고 각국 대표와 빈의 청중들이 모인 자리에서 교향곡 제7번과 제8번도 연주되었다.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유래한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4반세기에 걸친 혼란의 시대가 마무리되고 나니, 빈 청중의 음악 유행도 바뀌어서 오페레타를 비롯해 그 전보다 가볍고 경쾌한 음악이 애호되었다. 베토벤의 지나치게 진지한 스타일은 이런 유행과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청각장애의 정도도 갈수록 심해지고 있던 터라 그의 음악은 후기 피아노 소나타나 후기 현악 4중주곡들에서 보듯 더 원숙해지고 깊은 경지로 들어가게 된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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