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너미 시리즈3- '악성 베토벤 & 식성 로시니' (1)
성악의 시대였던 음악사상의 르네상스 시대가 저물고, 기악 독립의 거센 물결이 넘치면서 어떤 이들은 성악의 종말을 예견하기도 했을 것이다.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바로크는 자고 나면 새로운 악기들이 개량되어 나타났고, 눈만 뜨면 새로운 음악형식이 만들어지던 시기 아닌가? 물론 그 악기와 형식들은 찌그러진 진주(baroque)처럼 볼품 없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성의 계몽과 더불어 새로운 음악에 대한 시대적 열망도 한껏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크 시대에 탄생한 상당수의 악기와 음악형식들은 다양한 실험과 대중의 환영이라는 이중의 필터를 거쳐 살아남은 것들이 오늘날까지 표준으로 내려오고 있다.
그들중 가장 보편적으로 자리잡은 형식을 꼽으라면 단연 성악부문의 오페라와 기악부문의 소나타를 꼽지 않을 수 없다. 바로크 시대에 이미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오페라는 단숨에 종합예술의 왕좌를 차지하며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이탈리아의 오페라 가수들은 요즘의 브라질 축구선수들이 각국 프로리그로 진출하듯이 전유럽에 수출되었다.
소나타는 원래 16세기 초 프랑스의 성악곡인 샹송(chanson)이 이탈리아에 전해져 노래 없이 악기로 연주된 데서 비롯되었다. 17세기 중엽부터 샹송 형식의 기악곡이 늘어나면서 ‘칸초네(canzone)’ 또는 '칸초니 다 소나레'(canzone di sonare 악기로 연주되는 노래의 뜻)로 불렸는데, 몇 개의 짧은 부분으로 된 단악장이었다. 이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성악을 위한 칸타타와 구분하는 용어로 쓰이면서 17세기 후반 베네치아 악파의 비탈리(Vitali) 부자와 아르칸젤로 코렐리(Arcangelo Corelli) 등에 의하여 교회 소나타가, 그리고 프랑스나 독일을 중심으로 실내 소나타가 생겼다. 교회소나타는 대개 모음곡 풍이었고, 실내 소나타는 대위법 스타일로 발전하다가 어느 시점에 서로 만나 통일된다.
바로크 시대 소나타의 대부분은 트리오 소나타(trio sonata)로서, 고음의 멜로디를 연주하는 독주악기에 바이올린이 받치고, 첼로와 하프시코드(또는 오르간)가 통주저음을 담당했다. 영국의 퍼셀(Purcell), 프랑스의 쿠프랭(Couperin), 이탈리아의 비발디(Vivaldi)와 스카를라티(Scerlatti), 독일의 쿠나우(Kuhnau), 텔레만(telemann), 헨델, 바흐 등을 거치며 협주곡(concerto) 양식과 신포니아(sinfonia) 양식으로 발전하는데, 이 신포니아가 독립되고 규모가 커지면서 관현악 소나타인 교향곡으로 발전한다. 18세기 말~19세기 초의 고전파 시대에 이르러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 빈 고전파 작곡가들은 4악장 구성의 관현악 소나타의 형식미를 완성한다.
모차르트를 꿈꾸며 억지 신동으로 키워진 베토벤
루트비히 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 1770.12.17 유아세례~1827. 3. 26) 독일의 쾰른 선제후국 수도 본(Bonn, 서독 시절의 수도이기도 했다)에서 태어나 할아버지의 이름을 이어받았다. 할아버지 루트비히(1712~1773)는 21세의 나이에 브라반트 공국(현재 벨기에 플랑드르 지역)의 메헬렌 마을 출신의 음악가로 독일로 이주해 쾰른 선제후의 궁정가수를 지내다 1761년 궁정악장이 된 본의 대표적 음악가였다. 그의 아들 요한((Johann van Beethoven, 1740~1792)도 아버지를 따라 궁정 가수가 되기는 했지만 불행히도 심한 알코올중독자였고 주사까지 심했다. 트리어 대주교 궁정의 수석 요리사였던 하인리히 케베리히(Johann Heinrich Keverich)의 딸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 1746~1787)와 결혼해 이듬해인 1770년 둘째 루트비히를 낳았다. 건전했던 할아버지는 자기 이름을 딴 어린 손자를 귀여워해줬지만 어린 루트비히가 4살 때인 1774년 61세로 세상을 떠났고, 루트비히는 주정뱅이 폭군 아버지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성대를 상해 더 이상 노래를 할 수 없게 된 요한은 어린 루트비히가 모차르트처럼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다고 판단하고, 자신도 레오폴트처럼 되기를 원했다. 아들을 이용해 돈과 명성을 얻을 속셈으로 어린 아들에게 하루 10시간 이상 매를 들어가며 피아노를 연습시켰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달랐다. 후에 궁정 오르간 연주자가 된 길레스 반 덴 에덴(Gilles van den Eeden, 1708~1782), 가족의 후원자이자 건반악기를 가르친 토비아스 파이퍼(Tobias Friedrich Pfeiffer, 1751~1805),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가르친 친척 프란츠 로반티니(Franz Rovantini), 그리고 바이올린을 지도한 궁정악장인 프란츠 리스(Franz Anton Ries) 등 본과 인근 지역의 교사들을 구해주었다.
베토벤은 5살 때부터 아버지가 아닌 다른 교사들에게 음악을 배웠다. 우리가 익히 아는 일화는 아버지가 아니라 파이퍼가 범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면증 환자였던 파이퍼가 꼭두새벽에 침대에서 자고 있던 베토벤을 건반 앞으로 끌고가기도 했기 때문이다.
1778년 3월 베토벤은 처음 대중 앞에서의 공연에 나선다. 요한은 아들이 6살이라고 주장했는데 실제 나이는 7살 3개월이었다. 그러나 강압적인 아버지에게 겁먹고, 처음 보는 다수의 관객에 당황한 꼬마 베토벤은 원래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모차르트를 기대했던 청중은 실망했으며, 요한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악평에 그를 가르치던 교사들도 손을 떼었다.
그러다 그의 재능을 제대로 이해하는 선생이 나타났다. 본 궁정에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부임한 크리스티안 네페(Christian Gottlob Neefe, 1748~1798)는 11살 소년 베토벤을 레슨비 없이 가르치기로 결정한다. 네페 선생은 그에게 본격적으로 음악의 기초를 가르쳤고 무급이었지만 오르간 보조주자로 일하게 했다. 베토벤 최초의 악보출판작인 13살 경 작품 ‘드레슬러 행진곡에 의한 9개의 변주곡’(WoO 63)에는 네페의 스타일이 거의 그대로 드러난다. 착실히 작곡을 배워나간 베토벤은 네페를 만난지 3년만인 1784년에 궁정교회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어 드디어 봉급이란 것을 받게 되지만, 그의 봉급은 거의 아버지의 술값으로 족족 나가버렸다.
1787년 쾰른 선제후인 막시밀리안 프란츠(Maximilian Franz Xaver Joseph Johann Anton de Paula Wenzel 1756~1801)의 후원을 받아 베토벤은 당시 유럽 음악의 중심지인 빈으로 여행을 갈 수 있었다. 그동안 모차르트 전기에 따라 이때 평소 존경하던 모차르트도 만났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최근 연구자들 사이에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만난 적이 없다는 견해가 우세해지고 있다. 이 해, 베토벤 가족의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가 4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 사이인 1786년 루트비히는 친구이자 의대생이었던 프란츠 베겔러(Franz Gerhard Wegeler)에게 약혼녀의 가문인 브로이닝 집안(von Breuning)을 소개받는다. 미망인이 된 폰 브로이닝 부인은 아이들의 피아노 교사로 채용한 베토벤을 아들처럼 대해줬다. 그는 나름 품위있는 귀족이었던 브로이닝 가문을 통해 고전문학을 접하고 또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데, 나중에 베토벤은 이들의 도움으로 빈에 진출하게 된다. 그중 가장 중요한 사람은 평생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페르디난트 폰 발트슈타인(Ferdinand von Waldstein) 백작이다. 발트슈타인은 본에서부터 그를 후원하며, 1791년에 베토벤에게 무대를 위한 첫 번째 작품이 된 발레 음악 <기사 발레를 위한 음악 WoO 1>을 작곡비를 주고 의뢰했다. 베토벤은 그의 우정을 고마워하여 1804년에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21번을 그에게 헌정하였다.
19살인 1789년 그는 궁정 교향악단에서 비올라 주자 겸 부지휘자가 되었다. 이해 부친 요한은 알코올 중독으로 연주를 못하게 되어 강제 퇴직을 당한다. 주군인 선제후는 가장 역할을 떠맡은 젊은 루트비히에게 아버지가 받을 연금의 절반을 대신 받도록 조치했다. 그는 1792년까지 이 궁정악단에서 모차르트 작품들은 물론 당시 궁정에서 연주하던 다양한 오페라를 접하며 음악의 폭을 넓혀가고 다른 음악가들과 교유도 한다.
베토벤 연구자들은 1790년 말 요제프 하이든이 런던에서 활동하던 시절 크리스마스 무렵에 잠깐 본에 들렀을 때 베토벤이 처음 하이든에게 소개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1년 반이 지난 1792년 7월 하이든이 런던에서 빈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본에 들르자 베토벤은 자신이 작곡한 두 개의 ‘황제 칸타타’(황제 요제프 2세의 죽음에 대한 칸타타, WoO 87,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즉위에 대한 칸타타, WoO 88)의 악보를 보여주었다. 하이든은 이 악보를 보고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한다. 음악의 본고장 빈에서 음악가로서 성공하고 싶다는 꿈을 포기하지 못했던 베토벤은 기뻤고 친구들도 그의 앞날을 기대했다.
베토벤은 1792년 11월 선제후의 장학금을 약속받고 본을 떠나 빈으로 갔다. 그는 빈에 도착 직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장례식을 마치고 빈으로 돌아왔다. 계획한 대로 하이든의 문하에 들어갔지만, 기대는 점차 실망으로 바뀌었다. 하이든이 먼저 손보고 돌려준 악보를 요한 솅크(Johann Baptist Schenk, 1753~1836)가 보니 하이든이 지나쳐버린 오류와 잘못들이 여럿 나왔다고 한다. 하이든이라고 학생이 마음에 들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전 스승 밑에서 했던 숙제를 그대로 다시 제출했다가 들킨 베토벤이 마뜩찮았다. 이 외에도 하이든은 베토벤이 작곡한 몇 곡에 대해 악평을 하거나 출판을 반대하여 베토벤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베토벤 자신이 매우 마음에 들어했던 c단조의 피아노 3중주를 하이든은 신예 작곡가의 작품 치고는 너무 길고 복잡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결국 베토벤은 1년여 만에 스승을 떠났다. 후일 "하이든에게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베토벤이 피아노 3중주 3곡(op.1-1,2,3)을 빈에서 처음 출판할 때 하이든은 표지에 '하이든의 제자 베토벤'이라는 내용을 삽입하라고 했는데, 베토벤은 이 제안을 바로 거절했다. 사실 하이든이 베토벤을 낮게 평가해서가 아니라 후광을 더해주고자 인심을 쓴 것이었다. 하지만 자존심 센 베토벤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또 하이든은 자신의 2차 런던 여행 때 베토벤에게 제자이자 비서로 동행하자는 제안도 했으나, 영국으로 떠나기 전 베토벤이 먼저 하이든을 떠나버렸다. 이후 베토벤은 요한 솅크를 비롯해 요한 알브레히츠베르거(Johann Georg Albrechtsberger, 1736~1809)에게 이론과 작곡법을 배우고 빈의 궁정악장으로 장기집권 중이었던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에게 이탈리아 음악양식과 오페라 및 성악곡 작법을 배웠다.
1794년 하이든이 영국으로 다시 떠나자 선제후가 본으로 불러들일 것 같았지만, 베토벤은 빈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한편, 1794년에 본은 프랑스 공화국군에게 넘어가버려서 사실상 귀향의 의미도 없었다. 선제후의 장학금은 끝났으나 요제프 프란츠 폰 로프코비츠(Joseph Franz von Lobkowitz, 1772~1816) 공작, 카를 리히노브스키(Karl Lichnowsky, 1761~1814) 공작, 모차르트의 후원자이기도 했던 고트프리트 판 슈비텐(Gottfried Freiherr van Swieten, 1733~1803) 남작 등 빈의 여러 귀족들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재정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 그 사이 모차르트 스타일을 벗어나 자신의 음악어법을 확립한 베토벤의 작품과 피아노 연주실력은 점점 빈 음악계에 알려지고 있었다.
젊은 천재로 일찍 성공한 로시니
로시니(Gioacchino Antonio Rossini 1792.2.29.~1868.11.13.)는 베토벤보다 22년 후에 당시 교황령이던 이탈리아 페사로(Pesaro)에서 태어난다. 아버지 쥬세페(Giuseppe)는 금관악기 연주자이자 도축업 감시원이었고 어머니 안나(Anna)는 소프라노 가수였다. 쥬세페가 나폴레옹의 프랑스 혁명군에 동조했다는 혐의를 쓰고 1799년 오스트리아 제국에 의해 투옥되자 죠아키노는 어머니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있는 도시 볼로냐(Bologna)로 이사한 후 어머니의 가수활동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듬해 풀려난 아버지가 볼로냐로 합류해 함께 음악활동을 하게 되면서 8살부터 죠아키노의 음악교육이 시작되었다. 어머니에게 음악유전자를 물려받았는지 변성기가 오기 전에는 교회와 오페라 무대에서 아역가수로 출연 했고, 호른 연주도 제법 뛰어났다고 한다. 작곡도 잘 배워 12세에는 무려 6곡의 현을 위한 소나타를 작곡하기도 했다.
로시니는 14살에 첫 오페라 <디메트리오와 폴리비오(Demetrio e Polibio)>를 작곡하는데, 이에 비견되는 것은 모차르트가 12살에 작곡한 <바스티앙과 바스티엔느(Bastien e Bastienne)> 정도뿐이다. 그리고는 바로 볼로냐 음악원(Conservatorio di Bologna)에 입학해 첼로와 작곡을 배운다. 하지만 로시니는 스승인 프란체스코파 성직자이자 교육자였던 스타니슬라오 마테이(Stanislao Mattei 1750~1825) 신부의 엄격하고 보수적인 대위법적 성향이 답답하기만 했다. 수업시간만 빼면 로시니는 모차르트나 하이든 등 독일계 고전파 거장들의 관현악곡을 독학해 자신의 작품에 적극 반영하였다. 화려한 화성과 귀에 쏙 들어오는 선율 등 이런 성향은 나중에 그가 작곡한 오페라 반주의 관현악법에서 실체를 드러낸다.
16살의 로시니는 칸타타로 볼로냐 음악원의 대상을 수상해 재능을 증명하고 2년만에 당당하게 졸업장을 손에 넣었다. 야심만만하고 도전적인 젊은 재능이 인정받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볼로냐의 귀족 카발리(Cavalli) 후작의 후원을 받아 18세였던 1810년에 로시니는 오페라 <결혼보증서(La Cambiale di Matrimonio)>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본거지인 볼로냐가 아니라 베네치아에서 초연해 나름 성공을 거두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다. 20살 때 이미 베네치아, 밀라노, 로마, 페라라에서 무려 6개의 오페라를 공연하고, 이듬해인 1813년 <탄크레디(Tancredi)>와 <알제리의 이탈리아인(L'italiana in Algeri)>이 '대박'급 성공을 거두는데, 이는 모차르트조차도 누려보지 못한 수준이었다. 초년고생을 감수해야 했던 다른 작곡가들과는 달리 일찍부터 성공해 재능과 명성을 겸비한 청년 갑부로 떠올랐다. 베토벤은 이런 로시니를 부러워했다고 한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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