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너미 시리즈2- '파파 하이든 & 신동 모차르트' (4)
하이든이 30년간 에스테르하지 후작 가에서 만든 작품들은 거의 보관이 완벽했다. 아주 가끔 노래도 하고 바이올린을 들기도 했지만, 그는 거의 작곡과 지휘만 하면서 838곡의 방대한 목록을 남겼다. 106개의 교향곡과 68개의 현악4중주(이전에는 83개로 여겨졌다), 43개의 피아노 3중주는 음악역사상 최다 작곡 기록으로 남았고, 55개의 피아노 소나타 역시 악보가 전해지는 한 최다 작곡이다. 그는 14개의 미사와 <천지창조>를 포함한 2개 오라토리오도 작곡했다.
모차르트는 35년간 활동한 작곡가 치고는 아주 많은 626곡을 남겼다. 아내인 콘스탄체가 돈이 궁할 때 발표도 되기 전의 악보를 몰래 팔아먹기도 했다지만, 그래도 가장 많이 보관해온 사람 역시 콘스탄체였다. 모차르트는 자신이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자 바이올리니스트여서 늘 자신의 협주곡들을 직접 연주했다. 교향곡 41개는 하이든에 이어 다작 랭킹 2위이지만 27개에 달하는 피아노협주곡은 다른 작곡가들이 감히 따라올 수 없는 단연 최다 작품이다. 바이올린 협주곡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비발디와, 오로지 한 길만 갔던 파가니니에 이어 랭킹 3위인 5개를 썼다. 24개의 오페라를 작곡해 헨델과 로시니, 베르디의 40개 그룹에는 뒤지지만, 베르디 이전의 오페라 작곡가중 오늘날까지도 가장 인기를 누리고 있다.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시절 19개 미사를 포함한 50여개의 교회음악작품도 만들었다.
그러나 이 거인들에게도 흑역사는 있었다. 14개나 쓴 하이든의 오페라는 ‘듣보잡’ 아닌가? 모차르트는 헨델의 <메시아> 전곡을 자신의 스타일로 편곡하기 전 오라토리오 1개를 썼으나, 이 역시 1785년 초연 말고는 연주되었다는 기록을 찾기 어렵다.
하이든 형제와 모차르트 부자의 생전 인연들
하이든이 에스테르하지 가에 안착한 1762년 이후 모차르트의 여정은 빈과 프라하보다 더 동쪽을 향하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아버지의 상사 미하엘 하이든의 형이었던 요제프 (파파) 하이든에 대해 높은 평가를 접했고,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둘의 만남은 한참 후 빈에서 이루어졌다. 1784년 말의 크리스마스 자선 연주회 때 두 사람의 음악이 모두 연주되었다. 이미 서로 상대방의 명성을 알고 있었던 그들은 '고수는 서로 알아본다'는 말처럼 금방 상대방의 음악을 이해했을 것이다.
하이든은 그 즈음 프리메이슨에 가입해 모차르트와 동지가 된다. 이듬해 1월 열린 프리메이슨 신입회원 입회식에 참석한 모차르트는 갑작스런 일로 출석하지 못한 하이든과 엇갈렸다. 다음 달 의식에 하이든이 나타났으나 이번엔 모차르트가 연주회로 인해 오지 못했다. 무척 아쉬웠던 모차르트는 바로 다음날 파티를 열어 하이든을 초대한다. 모차르트가 하이든에게 헌정한 현악4중주들이 연주됐는데, 하이든과 디터스도르프(Dietersdorf), 반 할(van Hall), 그리고 모차르트가 악기를 잡았다. 3곡의 연주를 마치자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이렇게 평가한다.
“신 앞에서 그리고 정직한 인간으로서 말하는데, 당신의 아들은 지금까지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감각이 뛰어나며 작곡에 대한 깊은 지식에 통달해 있습니다.”
그해 9월, 모차르트는 6개의 4중주곡을 ‘매우 뛰어난 인물의 보호와 지도를 받도록 떠나보내는 자식들’에 비유하며 하이든에게 헌정함으로써 감사를 표했다.
“이들을 친절히 받아주셔서 아버지, 안내자, 친구가 되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순간부터 이들에 대한 모든 권한을 양도하며, 이들이 가진 결함을 너그럽게 보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아버지의 편애 때문에 제 눈은 그런 결함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모차르트는 하이든의 러시아 4중주곡들에게 자극을 받아 현악 4중주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면, 하이든 역시 절정기의 모차르트 악보를 입수해서 연구한 흔적이 보인다.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즉시 알아보고 흔쾌히 인정할 정도로 인간적인 용기와 지혜, 솔직함을 가진 대인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24살 나이차를 뛰어넘는 소탈한 우정으로 발전했고, 모차르트는 그를 존경과 감사의 마음으로 대하며 ‘파파 하이든’이라고 친근하게 불렀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하이든을 부르는 별명이 되었다.
파파 하이든의 동생인 미하엘은 오늘날 별로 연주되지 않지만, 생전에는 형이나 모차르트에게도 결코 뒤지지 않는 음악가였다. 그는 26세에 잘츠부르크의 대주교 궁정악장에 오른 이후 죽을 때까지 약 40년간 연주와 작곡을 계속했다. 43곡의 교향곡, 39곡의 미사곡, 12곡의 현악 4중주곡 외에도 많은 실내악곡과 합창곡을 작곡해 잘츠부르크는 물론 빈과 외국에도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던 작곡가였다. 스페인 궁정에서 미사곡을 작고해 달라는 주문을 받기도 했고, 스웨덴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뽑히기도 했다. 오스트리아나 독일에서는 19세기 전반까지 그의 작품이 연주회에서 곧잘 연주되곤 했다.
잘츠부르크 궁정악단에서 미하엘과 모차르트 부자는 상당히 친숙한 사이였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미하엘보다 18세 연상이었고, 나중에는 아들 볼프강 모차르트 또한 이 악단의 일원이 되었으니 사실상 직장동료였던 셈이다. 더욱 흥미로운 일은 레오폴트가 미하엘의 재능을 매우 높이 평가해, 볼프강에게 그의 작품을 본보기로 제시했다는 것이다. 볼프강이 악보를 베끼며 공부하려면 미하엘에게서 악보를 빌려야 하는데, 가까운 관계가 아니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런 일화도 있다. 미하엘이 대주교로부터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2중주 6곡 짜리 모음곡을 작곡토록 하명 받았는데, 4곡을 만든 상태에서 병이 났다. 나머지 2곡을 약속한 기일까지 완성하지 못하면 면직당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2년 전에 볼프강이 대주교에게 대드는 바람에 궁정악단의 오르가니스트 자리에서 해고되고, 그 직분을 미하엘이 겸임한 적이 있었다. 이에 볼프강은 미하엘의 부탁을 받자 불과 이틀 만에 완성해 건네주었다. 또한 같은 무렵, 백작의 음악회를 위해 미하엘이 쓴 교향곡의 서주부를 볼프강이 작곡한 일도 있었다. 이 교향곡은 20세기 중엽까지 모차르트의 작품으로 통했으니, 두 사람이 같이 작곡한 예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미하엘과 볼프강 두 사람은 베토벤을 통해 다시 한번 인연이 이어진다. 1787년 17살의 베토벤은 모차르트를 겨우 짧게 만날 기회를 갖는다. 그러나 당시 건강이 좋지 않은데다 바쁘기까지 했던 모차르트는 짧은 시간 만남 후에 베토벤에게 그다지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오늘날 모차르트가 베토벤을 칭찬했다는 것은 전기작가 오토 얀(Otto Jan)의 주장일 뿐으로 나타나고 있다.
10년후 청년이 된 베토벤은 아버지를 여읜 후 뮌헨의 선제후 막시밀리안의 후원으로 빈에 온뒤 하이든의 문하에 들어가서 가르침을 받는다. 그런데 베토벤은 하이든의 지도방식이 불만스러웠고, 하이든은 하이든대로 베토벤이 이전 스승 네페(Neffe)에게 냈던 숙제를 그대로 제출한 것을 알아채는 등 베토벤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결국 1년만에 베토벤은 하이든을 떠나 솅크(Schenck)와 살리에리(Salieri)의 문하로 옮겨버리고 만다.
그러나 하이든이 2차 런던여행 중이던 1794년 베토벤은 자신의 첫 피아노 소나타 3곡을 작곡하여 하이든에게 헌정하였으며 이듬해 8월에 하이든이 돌아오자 리히노프스키 공작 저택의 연주회에 참석한 하이든에게 이 곡을 직접 연주해 들려주었다. 하이든은 대인배답게 이 소나타에서 드러난 베토벤의 재능과 열정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무덤에 두 개의 머리가 묻힌 하이든
하이든은 서거 후 기묘한 사건의 주인공이 된다. 1809년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빈을 침공하던 때에 하이든은 5월 26일 저녁 연주실에서 갑자기 쓰러졌고 5일후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유해는 집 근처 굼펜도르프(Gumpendorf)의 묘지에 매장되었는데, 1820년 에스테르하지 가문에서 영지인 아이젠슈타트(Eisenstadt)로 이장하기 위해 유해를 발굴해보니 머리가 사라지고 없었다.
사망 직후 처음 매장에 관여한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비서인 로젠바움(Rosenbaum)과 니더외스터라이히(Niederösterreich) 교도소장 페테르(Peter)가 공모하여 골상학(骨相學)으로 천재성을 밝혀낸다며 몰래 빼돌렸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당시의 해부학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열매 없는 연구가 끝난 후 그들은 증거인멸을 위해 모처에 감춰놓았다. 이 소식을 알게된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분노해 수사를 지시했고, 범인을 찾아내 마침내 머리를 돌려받긴 했지만 이 또한 다른 죽은이의 머리를 대신 건네준 사기였다. 하이든의 진짜 머리는 로젠바움이 죽자 페테르가 넘겨받았고, 페테르 사후에는 빈 음악가협회에 넘어갔다.
협회는 1세기가 더 지난 1954년에야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문제의 두개골을 넘겨주었다. 완전체가 된 하이든의 주검은 비로소 고향 로라우(Rohrau)로 돌아갈 수 있었다. 로라우 교구 주교가 오스트리아 대통령 및 추기경이 참여한 가운데 미사를 집전했고 이후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묘지가 있는 아이젠슈타트로 옮겨져 수만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시 매장되었다. 관 안에는 가짜 머리까지 증거물로 입관해 지금도 몸 하나에 머리 두 개가 들어있는 상태다.
이런 흑역사 때문인지, 로라우는 하이든의 고향임에도 불구하고, 하이든을 이용한 마케팅을 전혀 하지 못했다. 2차대전을 겪으며 나치와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국경이 엎치락뒤치락 하는 와중에 휩쓸리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하이든이 태어나기만 했지 그곳에서 음악적 족적을 전혀 남기지 않아서이다.
무덤도 찾을 수 없는 모차르트
모차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지나치게 힘든 장기여행을 여러 번 하면서 건강이 좋지 못했다. 어릴 때는 천연두를 앓았고, 이어 편도선염, 기관지염, 폐렴, 성홍열, 관절염, 안질까지 있었다. 30대 중반에 무리한 작곡과 연주, 그리고 도박과 파티로 이어지는 방탕한 생활은 그를 병마로 이끌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회한과 기묘한 레퀴엠의 작곡 의뢰는 그를 더욱 정신적 붕괴로 이끌었다. 1791년 8월 신작 오페라 <티토의 자비(La clemenza di Tito)>의 공연을 보러 프라하에 간 그는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간신히 돌아온 모차르트는 심각한 상태에서도 클라리넷 협주곡을 작곡했고, 오페라 <마술피리(die Zauberflöte)>를 작곡하고 초연을 지휘했지만 헛소리를 할 만큼 상태가 나빴다.
나중에 콘스탄체는 이렇게 회상했다. “기분전환으로 프라터(Prater)에 저와 함께 마차를 타고 갔어요. 마차를 타고 가면서 그이는 저에게 죽음에 대하여 얘기를 하더라구요. 그리고는 지금 작곡하고 있는 레퀴엠은 바로 자기를 위해 작곡하는 것이라고....그이는 ‘나는 얼마 살지 못할 것 같아’라고 말했어요. 그리고는 나지막한 소리로 ‘독이 몸에 퍼진 것 같아. 그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라고 숨을 몰아쉬었어요.”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완성된 곡은 모차르트가 속한 프리메이슨 지부의 집회장 오프닝을 축하하기 위한 곡인 <프리메이슨 칸타타(Freimauerkantate K.623)였다. 11월 18일 이 곡을 초연한 직후, 모차르트는 심각한 상태가 되었다. 신열이 나고 몸이 부었으며, 통증이 심하여 구토를 하다보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모차르트의 시신은 끔찍해 보여 의사들도 감히 접근하기를 피했다고 한다. 모차르트가 숨을 거둘 때에 옆에는 장모 세실리아와 처제 조피 뿐이었고, 소식을 들은 친구 쉬카네더 등 한두 명의 가까운 친구들이 더 왔을 뿐이었다. 아내 콘스탄체는 다른 곳에 있다가 숨이 넘어간 후에야 도착했는데, 영화 <아마데우스>는 온천여행에 갔던 것으로 묘사한다.
모차르트가 사망할 당시에는 돈이 없어 주로 빈민들이 묻히는 빈 시립 성 마르크스 묘지에 매장된다. 매장지까지만 동행하는 당시 빈 중산층의 관례에 따라 묘지 문 앞까지는 가족과 친구들이 왔으나, 그날 따라 을씨년스럽게 몰아친 눈보라 속에 다들 돌아가자 일꾼들도 대충 묻고 내려와버린다. 게다가 모차르트는 전염병인 티푸스 의심환자였고, 과거 요제프 2세가 내렸던 칙령에 따라 환자 사체는 반드시 12구 짜리 한 무덤에 매장하는 관행이 내려오고 있었다. 빈 외곽의 성 마르크스 공동묘지(St. Marx Friedhof)가 세상에 잘 알려진 것은 순전히 모차르트 덕분이다. 매장된 장소를 모르기 때문에 나중에 가묘(假墓)를 만들고 묘비를 세워놓았지만 당연히 유해는 없다. 모차르트의 가묘는 1888년 중앙공동묘지로 옮겨졌다. 성 마르크스 공동묘지는 모차르트의 묘지가 있었다는 것을 기념하고 싶어서 기념비를 새로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현재 적갈색 머리카락 일부분만 남아 전해진다.
1791년 12월, 어린 두 아들과 빚만 잔뜩 남은 상황에서 남편이 급사하자 철없는 안방마님 콘스탄체는 억척 엄마로 변신한다. 유작 <레퀴엠>을 완성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여 여러 작곡가들을 찾아다녔고, 남편의 미출판 작품을 차례로 출판하였다. 후원자였던 반 슈비텐 남작의 도움을 얻어 남편의 작품들로 공연을 기획하여 돈도 벌고, 황실에 연금을 요청해 받아냈다.
1797년 덴마크의 귀족이자 빈 주재 외교관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Georg Nikolaus von Nissen)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음악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그는 모차르트에게도 큰 관심이 있었는데, 35살 젊은 미망인이 남편의 유고들을 출판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 일을 도와주겠다며 접근한 니센은 콘스탄체가 열었던 하숙집에 세들어 머무른다. 니센은 전 남편과 달리 점잖은 신사에 남을 배려하는 심성이 있어 모차르트의 두 아들도 잘 보살펴주었고, 콘스탄체의 경제적 위기 탈출에도 공헌했다. 둘은 1798년부터 동거하며 사실혼 관계로 지냈지만 콘스탄체는 결혼만은 미루었다. 공식적인 재혼은 모차르트의 두 아들이 모두 장성해서 독립한 후, 콘스탄체의 나이가 47세가 되던 1809년에야 했다.
1810년 니센은 오랜 빈 주재 외교관 생활을 마치고 본국인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돌아갔다가 이후 10년간 유럽 각지,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에 파견되어 생활했다. 콘스탄체 역시 남편을 따라갔다. 두 사람은 같이 하는 기간 내내 모차르트의 악보와 편지 및 각종 유품을 수집하는 등, 모차르트 보존사업에 힘썼다. 1820년 정년퇴직 후 아예 잘츠부르크에 정착한 니센은 모차르트의 전기를 쓰는데 착수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1826년 사망했다. 콘스탄체는 다시 미망인이 된 후에도 모차르트 전기를 완성하는 등 선양사업에 힘썼다. 그녀는 나중에 남편의 고향 잘츠부르크로 알로이지아와 조피를 불러 함께 살다가1842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시신은 시아버지 레오폴트와 올케인 난네를 옆에 묻혔는데, 묘비명에 콘스탄체 모차르트라고 적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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