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익숙함' - 수애뇨339 갤러리 7월3일까지
작가는 서울에 살면서 대학 강의와 경기도 남양주의 레지던시 작업실을 운전으로 오가며 정치 사회 이슈를 다루는 라디오 시사프로를 자주 듣는다. 출연자들은 종종 숨이 넘어갈 정도로 급박하다. 대화는 가십을 드라마화하면서도 웬지 불안정하다.
언론이라는 채널로 듣는 소식과 뉴스는 드라마틱하다. 드라마는 기승전결 형식 수준의 명확성을 필요로 한다. 소시민의 일상은 드라마틱하지 않다. 직업에 따른 일과 생활이 명확하게 구분되지도 않는 이가 대다수다. 언론이 쏟아낸 강요하는듯한 드라마는 개인의 현실과 거대한 괴리를 이룬다.
소시민에게 불안정과 평온의 관계는 상반된 게 아니라 뒤섞여서 살아온 과정이었으며 현상이고 목도하고 있는 현재이다.
심승욱은 지난 9일부터 서울 평창동 수애뇨339 갤러리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익숙함>을 주제로 전시를 갖고 있다. 작품은 뒤틀리고, 녹아내린 구조와 검은색의 형상은 작가의 내러티브(서사적 구조)가 훨씬 더 강렬하게 드러낸다.
작품 <안정화된 불안 3개의 머리 두리번두리번>은 인간의 본성, 또는 사회 심리 현상으로서 ‘두리번거리다’를 표현하였다. 불안정한 자세로, 목적하지 않고 ‘두리번 두리번’이라는 의태(擬態)에 걸맞는 모습을 구현했다.
작가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시각적 결과물은 저렇구나’라고 느낄 것이다고 말한다.
그의 생각은 <작가노트>를 통해 일단을 알 수 있다. <작가노트>는 작가의 시각적 종합물인 작품과 동일하지 않다. 작가가 살면서 관심갖는 것에 대한 표현의 한 단편일 뿐이다.
작가 스스로 작업이 무엇인지 인지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인식의 틀 안에서 어떻게 작업이 나열 가능하는지를 되묻고 있다.
작가와의 인터뷰 내용 조차, 날아가는 언어를 채집해 문어체로 구겨넣기에 시각예술가의 작품 세계를 온전히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날것 그대로 보고 느낀 게 그의 작품 세계이다. ‘형체가 불분명한 볼륨을 가진 덩어리 그 무엇’은 무엇인가로 귀결된다.
조각가는 작업실내 이동이 용이하며 작업실에서 전시장까지 반출이 용이한 중력에서 자유로운 재료를 필요로 한다. 심승욱은 그러면서도 무게의 가벼움을 드러내지 않는 시각적으로 무거워 보이는 검은 색이 가장 걸맞다 판단하였다.
검은 색은 근원적으로는 1970년대 후반 ~ 1980년대 초반의, 국영기업인 광업소 경영자인 부친을 따라 강원도 정선 및 고한에서 살던 어린 시절 감성의 파편이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여하튼 작가는 색을 선택한 후 재료를 선택하였다.
심승욱은 지난 정부를 특징짓는 정치적 캐치프레이즈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에서 새로움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읽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7년 5월 10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제 가슴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뜨겁습니다”라고 했다.
그 욕망은 이 세계의 모든 변화와 발전을 추동하는 출발점이었으나 일상은 '새로움' 속에 자리한 좌절이 뒤섞인 '익숙함' 이 병치되어 있음을 보았다.
새로움은 물리적으로는 현재의 시간 너머에 자리한 미래에 대한 환영을 표상하고(表象, represent) 구체화 한다고 보았다. 현존하지 않는 그것은 (전형화된 설계도로 재구성된) 새롭게 보이는 청사진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가졌다.
정치가가 내뱉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는 일상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퇴행의 전주로 나타나고 말았다. 미술은 우리가 살면서 만났으나 인식 못하고 지나친 것을 다시 체험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작가는 역병, 전쟁, 경제적 양극화와 같은 ‘익숙함’은 그렇게 ‘새로움’ 속에 축적되어 간다고 본다.
심승욱은 1997년 대학 은사를 따라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에 갔다. 자르디니에 한 달을 머물며 예술이 지닌 힘과 웅장함, 화려함을 보고 느꼈다. 예술가로 살겠다고 결정했다.
대학을 마치고 2005년 미국 시카고로 유학을 떠났다. 동부의 뉴욕은 학교가 어떻게 미술계에 남을 것이냐에 중점을 두는 듯 했다. 커리큘럼이나 학교 분위기가 작업하고는 별 관련 없어 보였다. 대학(The School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옆 호숫가가 평온해보였다. 오로지 작업에 집중할 수 있을 듯 했다.
2007년~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까지 미국의 미술 시장이 좋았다. 시카고의 상업 갤러리가 아티스트 비자를 보증섰다. ‘아트시카고’와 ‘펄스 뉴욕’ 등에 참가하며 뉴욕으로 활동무대를 넓혔다.
2008년 시카고 칼 해머 갤러리 ‘검은 중력’(black gravity) 전시, 2009년 독일 쾰른 티팟 갤러리 전시, 2011년 뉴욕 ‘사유의 경계를 허물다’(crumbling thoughts) 전시를 이어갔다. 조각을 기반으로 한 사진과 설치 작업이었다.
심승욱 작가는 2014년 '사치&푸르덴셜 아이 어워즈' 조각부문 상을 수상하였다. 수상작 <구축 혹은 해체>는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이 낳은 구축과 해체라는 이분법적 개념, 이 둘의 모호한 상관관계를 표현했다.
‘검은 중력’ 과 ‘구축과 해체’ 연작은 열을 주면 액체 상태가 되는 초산비닐 수지를 재료로 사용하였다. 작가는 시카고에서 공부할 때, 동료 스튜디오에서 보고 이걸 한번 해볼까 해서 쓰기 시작했다.
일반 합성수지인 액체 플라스틱을 부어 만들면 계획된 방식으로 똑 떨어지는 결과물이 나오지만 깨지고 허물어진 듯한 구조를 갖춘 즉흥적인 형태는 나오지 않는다.
끈적끈적하기 조차 한 글루형질의 물감을 붓에 찍어 그려 조각을 만든다. 작업하면서 의도하지 않는 게 만들어지기도 한다.
<검은 중력> 연작중 한 작품은 브론즈로 제작하였다. 초산 비닐 수지 원본을 3D 프로그램으로 그렸고, 정밀 주조 방식으로 만들었다. 서울 마포구 홍익대 인근 AK몰에 설치되었다. 이번 수애뇨339 갤러리 전시 작품중 하나는 기업 협찬을 받아 동으로 제작되어질 예정이다.
2014년 세월호는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엄청난 슬픔과 충격을 안겼다. 많은 작가들이 세월호 참사를 작품으로 표현했다. 2015년 서울 통의동 아트사이드, 전시 타이틀은 <부재와 임재>였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 잔잔해져 오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건너서...."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느린 속도의 노래 '연가'는 작가의 설치 작품과 어우러져 죽음과 슬픔의 감정을 증폭시켰다.
목재로 비스듬히 세워진 전망대 위 사면에 설치된 낡은 확성기. 반짝거리는 성탄절 전구, 천정 높은 곳엔 구명동의와 구명환이 걸려있다.
벽에 걸린 네온은 링컨대통령의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이라는 영어 문구가 "자본의, 자본을 위한, 자본에 의한"으로 바뀌었다.
작가의 분노는 다음해까지 이어졌다. ‘안정적 불안정성-고립주의의 환상 속에서’는 4개의 확성기에서 역사 속 유명 정치인들이 각자의 주장을 담은 연설이 흘러나오는 작품이다. 그는 도래하는 파시즘을 경고한 듯 하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년)의 문제작인 <그라마톨로지>(De la grammatologie·문자학으로부터)는 데리다 사상의 핵심 ‘문자언어’ ‘차연(差延)’ ‘대리보충’ ‘탈구축’ 등이 제시된다.
데리다는 서구형이상학이 갖는 문자언어를 이차적 외연으로 보는 로고스 중심주의에 내재된 질서를 간파했다. 진리와 허위, 정신과 육체, 남성과 여성, 서양과 비서양, <현전(現前)과 부재(不在)>, 문명과 야만 등의 이항대립은, 전자는 지배적이고 후자를 종속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위계를 이뤄왔다. 이러한 이분법의 위계질서는 억압들을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는 논리로 작동해왔다는 게 그의 통찰이다.
탈구축은 이러한 폭력적 위계를 해체하는 것을 말한다. 탈구축은 외부로부터의 파괴가 아닌 내부에서 그 위계질서를 전도시키고 열등한 것들을 옹호하는 것을 함의한다.
데리다는 <현전과 부재>를 흔적(trace)으로 설명한다. 동물이 지나가면 발자국을, 수레가 지나가면 바퀴자국을 남긴다. 그것이 흔적이다. 흔적은 동물이 또는 수레가 지나간 표시이지만 지금 동물이나 수레는 없다. 이미 지나가고 지금 없으므로 흔적을, 동물이나 수레의 현전(現前·현재 있음, presence)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과거에 지나간 것은 사실이므로 그것들이 전혀 없다(부재, absence)고 말할 수도 없다.<김호기>
현전도 아니고 부재도 아닌 것이 흔적이다. 흔적은 ‘있다’, ‘없다’고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비확정성’(undecidable)이다. 또는 있음과 없음 사이에 애매하게 걸쳐 있는 경계선이다. ‘비확정성’, ‘경계의 사유’ 등 데리다의 핵심적인 개념은 흔적에서 출발한다.
심승욱의 <구축과 해체> 연작은 데리다의 ‘흔적’으로 설명되어진다. 당연히 예술이 철학 이론 안에 자유를 가두어서는 안된다.
심승욱 작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의 참상을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식사를 하는 (이기적인) 일상이 무감각과 바꿔야하는 빈 밥그릇을 채우기 위한 거룩한 투쟁인지를 자문했다고 한다. 영상에는 진흙 땅을 통과한 러시아군 전차 궤도 자국이 선명해 보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불과 수개월만에 우리에게 패권의 한 축인 미국에 줄서기를 강요했다.
그는 표현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회화, 조각, 설치, 사진 등 장르의 전통적 구분은 이미지 언어의 선택 가능한 표현 수단일 뿐이다.
그의 사진은 일상의 값싼 오브제를 쌓아 올려져 트로피나 성배(聖杯)처럼 보이도록 찍은 그 너머를 보도록 유도한다. 그의 회화와 사진은 평면 너머를 겨냥하고 있다.
심승욱은 장르를 불문하고 하나의 스타일에 고정되는 방식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신의 작품들에서 스타일이 나타나는걸 보며 아이러니하다고 느낀다.
사회 현상과 흐름도 놓치지 않는다. NFT(대체불가토큰·non-fungible token) 시장이 대표로 떠올랐던 BAYC(Bored Ape Yacht Club·지루한 원숭이들의 요트클럽)에 대해, 30여년전 필름 카메라에서 디지털 카메라로 넘어오던 시기처럼 새로운 기술 자체가 예술 표현 혁명의 핵심은 아니라고 본다.
빌게이츠도 BAYC에 대해 "분명히 값비싼 디지털 원숭이 이미지가 세상을 엄청나게 개선할 것"이라고 비꼬았다.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감성의 축을 흔드는 힘을 지녔던 예술이 새로운 기술 속에 자유를 가두려 하는가?’고 질문을 던진다. 세상을 담아내지 않는 예술은 현대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심승욱은 한국은 도시고 전원이고 조각을 놓을 데가 없다고 말한다. 조각은 공간과의 관계가 절대적이다. 아파트 단지와 같은 공동주택의 건축물미술작품은 단지에 걸맞는, 건축주와 대형 건축 설계회사의 컨셉에 맞출 것을 강요받는다.
그는 뉴욕시 북쪽 ‘스톰킹 아트 센터’(Storm King Art Center)를 말한다. 센터는 500에이커(약 60만 평)에 달하는 초원을 눈 앞에 펼쳐두고 있다.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1898~1976)의 빨간 조각품 ‘Five Swords’와 헨리 무어(Henry Moore)의 ‘Reclining Connected Forms’, 마야 린(Maya Lin)의 ‘Storm King Wavefield’ 등 300여점의 조각 작품이 평화를 누린다.
그는 이번 달로 10여년간 떠맡았던 교육자의 임무를 마친다. 학생들과 교감의 폭과 깊이가 점점 엷어진다는걸 느낀다. 강의와 이를 위한 준비, 작업실과 학교간의 긴 시간 이동으로 작업의 맥과 흐름을 놓치기도 한다.
< 데리다는 시종일관 경계의 문제를 자기 사유의 주제로 삼았다. 경계란(...) 이편과 저편, 내부와 외부를 나누고, 거기에 권리나 자격을 할당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다.(...)
해체란(...) 문턱들을 허물어뜨리고, 절대성을 내세우는 모든 경계의 안팎이 기실 임의적인 재단의 결과에 불과함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그의 논변이 ‘장난이 아닌’ 까닭은, 해체가 우리 앞에 엄존하는 경계의 담론들을 읽는 데 동원되는 코드들을 오작동하게 만들고 망가뜨림으로써 당연하게만 받아들이던 그 경계선들을 의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해체의 운동은 단단히 굳은 모든 것, 결코 무너질 것같이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것들을 상대화시킨다. 이런 상대화의 운동이야말로 해체가 갖는 정치적 힘이다.(...) >(자크 데리다 : 불/가능의 윤리와 정치 – 최진석)
국제적 이슈, 사회 문제에 관심갖는 심승욱은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국내에서 미술 대학을 다니며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입을 열지 말라는 암묵적 교육을 받아왔다. 그는 자신이 먼저 머물렀던 창작 스튜디오 입주 작가 면접에서 피면접자들의 태도가 절제되어 있음을 발견하며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한국의 예술가들은 대체로 자기검열이 생활화되어 있다. SNS조차 하지 말라는 권유를 받는 작가들도 있다. ‘작가 신비주의’라는 상업적 논리도 슬쩍 끼어든다.
심승욱은 데리다가 말한 비확정적 흔적을 남김으로써 자신의 내면 깊숙한 예술 혼을 지키면서도 정치적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사회문제에 참여한다. <구축과 해체>같은 명확한 이분법적 주제는 정치적이다. 그는 데리다를 극복하면서 진화할 것이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익숙함> 전시는 7월 3일까지이다.
심정택은 쌍용자동차, 삼성자동차 등 자동차회사 기획 부서에서 근무했고 홍보 대행사를 경영했다. 이후 상업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50여회의 초대전, 국내외 30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한 14년차 미술 현장 전문가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칼럼을 써왔고, 최근에는 미술 및 건축 칼럼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저서로는 '삼성의몰락', '현대자동차를 말한다', '이건희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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