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를 시작으로 마고(麻姑) 신화를 종종 작품의 주제로 내세웠다. 마고는 율려(律呂)에서 시작된다. 율려는 파동이자 에너지, 음악의 질서, 모든 생명의 근원을 의미한다. 신라인 박제상이 저술한 1만여 년 전의 한민족 상고사를 다룬 『부도지』에도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와 생겨난 율과 려가 있고, 모계 사회의 마고 신화와 연결된다. 마고는 한반도 신화에서 전해져 온 창조의 여신으로 마고할미, 마고선녀 등으로 불린다.
작가는 지하수, 모터, 전기, 태양 같은 단어들과 함께 프로젝트 집을 하늘 아래 ‘에너지 흐르는 집’으로 표현했다. 작가는 자신을 에워싸는 사소한 물질·사물의 소리를 채집하였다.
실제 작가는 인터뷰가 끝난 후 필자를 양수역으로 데려다 주며, 오른편 얼어붙은 북한강 위로 쌓인 눈을 보고 “마치 거인이 걸어오듯 ‘쩡, 쩡’하면서 강이 어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며 즐거워했다.
자본주의 상징, 은행
작가는 미국 뉴욕을 부러워 하는 이유로 제한된 공간인 미술관, 갤러리에서만 실험적 미술이 펼쳐지는 게 아니고 도시의 허접한 곳에서도 미술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 한 해 서너 차례씩 뉴욕을 다니며 스케치한 인상 중 작가가 오랫동안 생각했던 ‘글과 그림’ 관계에 부합하는 작품이 은행을 주제로 한 것들이다.
은행은 유럽이 주도한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개척의 첨병 역할을 했다. 미국 최대의 은행 JP모간 체이스(JPMorgan Chase & Co.)의 역사는 미국 건국 초기인 1799년에 설립된 맨해튼회사(The Manhattan Company)로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맨해튼회사의 설립 목적은 황열병이 휩쓸고 갔던 뉴욕 맨해튼 남부에 수돗물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잉여재원으로는 은행업을 할 수 있었다. 수도회사의 흔적은 오늘날 체이스 은행, 구식 수도관을 본뜬 사각형 도안 로고에 남아있다.
현대 자본주의의 상징인 은행 로고는 웬지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되는 느낌이 오는 중요한 형상이 되었다. 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시민은 불편할 수 밖에 없다. 형상이 권력이 되었다.
맨해튼회사는 1955년에 체이스 내셔널(Chase National Bank)과 합병해서 체이스 맨해튼 은행(Chase Manhattan Bank)이 되었다.
체이스 맨해튼은 데이빗 록펠러(David Rockefeller, 1915~2017)가 은행장, 개인 최대주주였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체이스 내셔널은 1930년에 미국 최대 은행이 되었다.
체이스 맨해튼은 1996년에 케미컬(Chemical Bank)에 인수되었다. 2000년에 JP모간을 인수해서 JPMorgan Chase & Co.가 탄생했다. JP모간 체이스는 뱅크원(2004)등 세 회사를 인수해 오늘에 이른다.
체이스(Chase)가 체스(Chess)로도 읽힌다. 최근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미국·나토(NATO)와 러시아간 대결이 ‘월드 체스 매치’(World Chess March)로 보이는 기시감은 또한 무엇인가?
단종, 놓을 수가 없다
서용선은 ‘단종은 놓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단종에 대한 관심은 맴돌며 사춘기를 보낸 서울 정릉(貞陵)과도 깊은 관련 있다. 능지기의 모습을 지켜보았고, 노인정에서 사람들이 두런거리는 이야기들이 궁금했다.
정릉은 조선 태조(太祖, 재위 1392∼1398)의 현비로 방번·방석 두 왕자와 경순공주를 낳은 신덕왕후(神德王后 ?~1396) 강씨의 무덤이다. 이후 태종 이방원은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시켰고 능은 묘로 격하되었다. 원래 서울 중구 정동에 능역이 조성되었으나 태종 9년(1409)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200년 후 신덕왕후는 왕비로 복위되었고, 무덤도 왕후의 능으로 복원되었다. 인근의 신흥사(지금의 흥천사)는 신덕황후의 혼을 달래기 위한 사찰로 기억한다.
서용선은 조선의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시대 이전을 문자와 지식을 권력으로 독점했던 시대로 규정한다.
2016년, '서용선의 인왕산' 전시에서 '인왕산'은 지난 시대의 서사를 현대적 풍경으로 은유한 것이다. 단종과 함께 희생된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은 인왕산 수성동 계곡 위쪽에 비해당(匪懈堂)을 짓고 살았다.
안평대군은 1430년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쌓았다. 문종 때 조정의 배후에서 실력자로 역할을 하였으며, 1438년 함경도에서 문제를 일으키던 야인을 토벌하였으며 황보인, 김종서 등 문신들과 친밀하게 지냈다. 인사 행정기관인 황표정사(黃票政事)를 장악하여 둘째 형 수양대군의 세력과 정치적인 대립관계에 있었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김종서 등을 죽였고 안평대군도 반역을 도모했다는 죄목으로 강화도 귀양을 갔다. 그 뒤 유배된 교동도(喬桐島)에서 36세를 일기로 사사(賜死)되고 말았다.
안평은 시문(詩文)·그림·가야금 등에 능하고 당대의 최고의 명필로 꼽혔다. 조선 초에는 그의 서체가 큰 유행이 되었다. 문신 정인지(1396~1478년)가 글을 지은 세종대왕영릉신도비(世宗大王英陵神道碑)는 유필이 되었다.
한글 창제와 관련하여, 승려 신미는 중요한 인물이다. 신미는 세종 말년에 왕을 도와 불사를 중흥시켰다. 세종은 두 왕자와 왕후를 3년 사이에 잃고 불자가 되었다. 조선이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다는 것은 맥락을 모르는 평가이다. 한국 불교는 원효(617~686)이래 1천 3백년간 이 땅의 정신사(精神史)를 지배했다.
신미와 동생 김수온(金守溫)은 세종을 도와 창덕궁에 내원당(內願堂)을 짓고 법요(法要)를 주관하였고, 속리산 복천사(福泉寺)를 중수하는 등 불교 부흥에 노력하였다.
문종은 선왕의 뜻을 이어 그를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에 임명하였다. 세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그를 경애하였고, 왕위에 오르자 불교의 중흥을 주관하게 하였다.
1461년(세조 7)에 왕명으로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훈민정음을 널리 유통시키기 위해 불전(佛典) 번역과 간행을 주관하였다. 신미는 1464년 상원사(上院寺)로 옮겨 왕에게 상원사의 중창을 건의하였고, 왕은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五臺山上院寺重創勸善文)」을 지어 시행하도록 하였다. 세조는 혜각존자(慧覺尊者)라는 호를 내리고 존경하였다.
서용선이 30여년전 단종의 시신이 던져진 평창강 지류인 청령포 서강에 당도한 것은 우연이며 필연이었다. 너무도 생생히 온 몸으로 시공을 초월한 무언가가 전해져 왔다.
서용선은 단종과 안평의 죽음을 문화적 희생이 아닌가 계속 질문을 던졌다. 거대 세력과 거대 세력이 맞붙은 문화대충돌로 해석한다.
심정택은 쌍용자동차, 삼성자동차 등 자동차회사 기획 부서에서 근무했고 홍보 대행사를 경영했다. 이후 상업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50여회의 초대전, 국내외 30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한 14년차 미술 현장 전문가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칼럼을 써왔고, 최근에는 미술 및 건축 칼럼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저서로는 '삼성의몰락', '현대자동차를 말한다', '이건희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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