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전경. (사진=덕수궁 홈페이지)
덕수궁 전경. (사진=덕수궁 홈페이지)

2017년 막혀있던 덕수궁 돌담길이 열린 뒤 다녀보지 않아 돌아볼 겸 덕수궁을 들렀다. 마침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이 집무하였던 ‘즉조당’(卽阼堂)의 집기를 재현․전시하고 있었다. 집무실에 관람객의 입장

도 허용하여 내부도 둘러보았다. 특별 한시공개여서 안내원이 배치되어 전시품과 궁궐에 얽힌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이 집무를 봤던 즉조당에 집기들이 재현, 전시돼 있다. (사진=황현탁)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이 집무를 봤던 즉조당에 집기들이 재현, 전시돼 있다. (사진=황현탁)

코로나19 때문에 1회 5명으로 입장을 제한하고 자수 슬리퍼도 다섯 켤레만 준비해두었는데, 인원제한을 알지 못한 나는 남은 슬리퍼를 신고 대청마루에 올랐다. 외국인 여성이 관람하고 있어 영어로 설명을 하고 있는데, 귀동냥해가면서 건물과 집기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이어서 회랑을 둘러보는데, 옆 건물인 ‘준명당’(浚明堂)과 이어져 있다. 이를 ‘월랑’(月廊)이라고 한단다. 달빛아래 난간(을 거닐다)! 멋진 이름이다. 한자가 있는 것을 보니 오래 전부터 조상들은 그런 분위기를 즐겼던 모양이다. 야심한 달밤 남녀가 담벼락을 걷는 월하정인(月下情人)이란 그림도 있는데, 집안 난간을 거니는 것은 숨을 필요 없는 자연을 즐기는 도락의 한 방책이었으리라.

덕수궁의 월랑. (사진=황현탁)
덕수궁의 월랑. (사진=황현탁)

원래 덕수궁 지역은 조선시대 월산대군(제9대 성종의 형)을 비롯한 왕족들과 고관들의 저택이 있던 곳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으로 정궁인 경복궁을 비롯하여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선조는 이곳을 임시 행궁(行宮)으로 사용하였다. 창덕궁이 재건되어 광해군이 그곳으로 옮겨가면서 별궁인 경운궁(慶運宮)이 된다. 즉조당 옆 건물인 석어당(昔御堂)은 단청이 되어 있지 않은데, 그 건물은 단청을 하지 않고 사용하다가 그대로 돌려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덕수궁 금천교와 하마비. (사진=황현탁)
덕수궁 금천교와 하마비. (사진=황현탁)

제25대 철종이 후사가 없이 승하하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의 둘째아들이 제26대 왕이 된다. 고종의 당시 나이가 12세(1863)로 증조할머니격인 제24대 헌종의 어머니 조대비(趙大妃)에 의한 수렴청정, 아버지 흥선대원군에 의한 대리청정 도합 10년을 거치면서 온갖 세파를 경험한다. ‘조선을 침범하는 서양세력과는 화친할 수 없다’는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서양세력들을 배척하였던 대원군의 쇄국정책 시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고종은 1873년 왕비인 민비(閔妃)와 합심하여 대리청정을 끝내며 친정(親政)을 편다. 그는 쇄국 대신 열강들과 수교를 맺기 시작한다. 일본은 1875년 운양호(雲揚號)를 보내 수교교섭대표인 조선관리를 탑승시키고 포사격 시범을 보이는 등 무력시위를 벌이는 외교를 펼친다. 그리하여 일본은 1876년 한일수호조규를 체결한다. 이어서 조선은 미국(1882), 영국과 독일(1883), 러시아(1884), 프랑스(1886)와 각각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다. 

일본과 서양세력의 조선 진출, 대원군과의 갈등,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 등 국내정정의 불안 와중에 민비는 일본자객에 의해 피살되고(1895), 고종 자신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播遷)하여 국사를 보게 된다.(1896.2) 고종은 1년여를 그곳에서 머문 후 덕수궁으로 돌아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임금의 격을 황제로 높이는 개혁을 단행한다.(1897.10) 요즈음 말로 치면 ‘셀프개혁’인데, 국력의 뒷받침이 없는 일종의 ‘몸부림’이었다. 그는 경운궁을 으뜸 궁궐로 사용하면서 궁궐 안팎에 전각이나 서양식 석조 건물을 신축하여 궁궐로서의 격식을 갖추게 된다. 고종 퇴위 후에 선대황제의 거처가 되자 덕수궁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른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1895)에 이어 대한제국의 중립선언(1904.1)에도 불구하고, 러일전쟁을 개시하면서(1904.2) 조선반도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으려는 계획을 착착 진행한다. 영토사용을 가능토록 하는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1904.2), 군용 철도인 경의선 부설을 시작하며, 연이어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한다.(1905.11) 1907년 일본은 마침내 고종을 폐위하고 순종을 즉위시키며, 1910년에는 대한제국을 일본에 합방시키는 병탄조약을 강제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덕수궁 즉조당(왼쪽)과 준명당. (사진=덕수궁 홈페이지 캡처)
덕수궁 즉조당(왼쪽)과 준명당. (사진=덕수궁 홈페이지)

황위를 아들 순종에게 물려준 고종은 무엇을 하였을까? 그는 1904년 경운궁에 불이 나자 중명전으로 옮겨 거처하였는데, 퇴위 후 덕수궁으로 돌아와 1912년 늦둥이 딸 ‘덕혜옹주’를 보게 된다. 젖을 먹이던 유모가 예를 표하러 일어서려는 것을 만류할 정도로 옹주에 대한 정이 각별하였다 한다. 옹주가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자 옆 건물 준명당에 유치원을 만들어 그곳에서 지내도록 하였는데, 바로 ‘월랑’을 통해 건너 다녔다. 준명당과 즉조당 앞 낭하가 제법 높아 떨어질 수 있다는 걱정 때문에 축대 돌에 철제난간을 세워놓았는데,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1919년 승하하기 전까지 고종은 짧은 거리도 가마를 태우거나 궁녀를 동행시키는 등 늦둥이 옹주에 대한 보살핌이 지극했다고 한다. 

덕수궁 근처 성공회의 사제관. (사진=황현탁)
덕수궁 근처 성공회의 사제관. (사진=황현탁)

덕수궁 일대 정동에는 고종이 덕수궁에서 집무하기 전 외국 종교시설과 선교사 숙소, 외국공사관이 들어서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정동제일교회(1885)와 성공회이며(1891),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의 공사관이 있었다. 현재에는 미국의 대사관저와 영국, 캐나다(벨기에영사관부지) 및 러시아 대사관이 덕수궁에 인접해 있다. 

덕수궁 옆 주한영국대사관. (사진=황현탁)
덕수궁 옆 주한영국대사관. (사진=황현탁)

대한제국 황실은 궁궐 부지를 더 확보하고자 일부는 매입하였으나, 종교외교시설이 있어 그런 시설을 피해 선원전(북쪽, 경기여고 터), 중명전(서쪽, 1899, 황실도서관, 을사늑약체결), 하늘신 위패를 모신 황궁우(皇穹宇)와 제사를 지내는 환구단(圜丘壇, 이상 동쪽)은 궁궐에서 떨어진 곳에 세웠다. 구세군중앙회관 맞은편 선원전은 팔았던 부지를 사들여 복원 중에 있고, 중명전과 조선호텔 경내의 황궁우는 그대로 있으나, 환구단은 조선호텔건물 때문에 복원이 불가능하다. 

조선호텔 옆에 위치한 황궁우. (사진=황현탁)
조선호텔 옆에 위치한 황궁우. (사진=황현탁)

이밖에도 정동에는 배재학당(1885, 선교사 아펜젤러), 이화학당(1886, 선교사 스크랜턴), 육영공원(1886, 뒤이어 독일영사관, 그 후엔 경성재판소, 대법원, 현재는 서울시립미술관), 여성전용병원인 보구여관(普救女館, 1887, 이화학당 인근), 손탁호텔(1902, 이화학당내) 등의 근대적 교육, 의료, 문화시설이 있었는데, 덕수궁 주변은 외교, 선교, 문화의 거리였으며, 지금도 변함이 없다. 

덕수궁 즉조당과 준명당에서 내가 접했던 것은 황제가 쓰던 물품들과 늦둥이 옹주얘기였던데 반해, 궁궐 주변에서는 고종에게 닥친 풍파와 격랑이 어떠했을까를 짐작할 수 있는 수많은 역사의 현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많은 한국인들처럼 나 역시 대학교육을 받았지만, 우리 역사의 면면이나 이면(裏面)에 대한 관심이나 지식이 깊지 않음을 절감했다. 

지금은 ‘제국의 시대’가 아닌 민주주의시대다. 나라에 닥친 풍랑을 해쳐나가고 미래를 대비해야 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과거에는 선출되지 않은 임금(황제)과 임명된 신하들이 나랏일을 결정, 수행했다면, 오늘날은 시민들이 국정수행자를 선출한다. 투표를 통한 우리의 선택이 중요하게 된 것이다. 투표결과에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는 만큼 신중하고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 

황현탁은 미국, 일본, 영국, 파키스탄에서 문화홍보담당 외교관으로 15년간 근무했다. 각지에서 체험을 밑천 삼아 이곳 저곳을 누비며 여행작가로 인생2막을 펼쳐가고 있다. 『세상을 걷고 추억을 쓰다』, 『어디로든 가고 싶다』 등 여행 관련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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