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 교민 강은자씨 “침착하게 총 겨누는 모습 섬뜩”
“수면제 없으면 아직도 밤잠 못 이뤄”
"가족처럼 지내던 동료가 눈앞에서 총에 맞아 쓰러진다면...그 총구가 나를 향해서도 불을 뿜는다면..."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거주하는 강은자씨(48. 여)는 상상만 해도 두려운 이같은 일을 3개월 전 실제로 겪었다. 강씨는 지난 3월 16일 아시안 스파 2곳을 겨냥해 총기를 난사한 백인 용의자 로버트 애런 롱(21)의 범행을 목격한 증인인 동시에 그의 총격을 받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피해자이기도 하다.
강씨는 롱의 총격에 3명의 한인 여성이 숨진 애틀랜타 골드스파에서 휴식을 취하다 롱의 범행을 생생히 목격했다. 롱은 달아나던 강씨를 따라와 총격을 가했지만 총알은 다행히 모두 빗나갔고, 시간에 쫓기던 롱은 강씨가 비명을 지르자 총에 맞은 줄 알았는지 그대로 가게를 빠져나갔다.
강씨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너무나 침착하게,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총을 겨누는 모습이 너무나 섬뜩했다"면서 "아직도 그의 눈빛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사건 발생 3개월이 지났지만 강씨는 아직도 당시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강씨는 "수면제가 없으면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고 토로했다.
사건 직후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아온 강씨는 의사가 처방한 치료제와 가족, 주변 지인들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아직 정상적인 생활로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사건이 발생한 애틀랜타에 머무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던 강씨는 2주 전인 6월 초 시카고의 친구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강씨의 남편인 한모씨는 "끔찍한 기억이 남아 있는 곳에서 계속 생활하다 보니 아내가 너무 힘들어 했다"면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내며 (상태가) 좋아지기를 기대할 뿐"이라고 말했다. 강씨는 여전히 정신과 의사가 처방한 약을 복용하고 있다 .
사건 직후 미주 한인 및 아시아계 차세대들과 총격 피해자 가족 및 생존자 지원활동에 나섰던 한미연합회(KAC) 애틀랜타지회 박사라 회장도 이들의 영혼 속에 남은 트라우마가 쉽게 씻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미국 내에서 아시아계를 겨냥한 증오범죄가 눈에 띄게 확산돼 왔으며 팬데믹 1년만에 애틀랜타에서 대규모 살상사건이 발생하게 됐다"면서 "무엇보다 피해자 가족과 생존자들에 대한 물질적 지원과 함께 심리상담과 정신과 치료 등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지역 아시안 단체들과 공조해 활동을 펼쳤다"고 소개했다.
박 회장은 "이렇게 큰 충격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라면서 "일시적인 관심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범죄 피해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서명한 아시아계 대상 인종 증오범죄 방지법안은 이러한 시스템의 '첫 단추'여서 한인을 비롯한 아시아계의 환영을 받고 있다.
아시아계 8명 목숨 잃었지만 살인혐의로만 기소
증오범죄로 처벌 어려워... 인종차별 잔재 남아
하지만 연방 차원의 법안이 아시아계에 대한 잘못된 시선과 편견, 그리고 실생활에서의 차별까지 사라지게 하지는 못한다. 무방비 상태의 아시아계 여성의 머리를 겨냥해 조준사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무려 8명의 목숨을 앗아간 백인청년 롱의 행위 조차 증오범죄로 처벌하기 힘든 것이 미국의 현실이다.
현재 롱은 살인 혐의로만 기소돼 있을 뿐 증오범죄 혐의는 소장에 기록돼 있지 않다. 증오범죄를 입증하기가 그만큼 어렵고, 아직도 인종차별의 잔재가 남아 있는 미국 남부에 위치한 조지아주의 사법 시스템도 아시아계를 비롯한 소수인종에게는 높은 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오히려 롱의 범죄를 백인 청년이 '일진이 좋지 않았던 날' 벌였던 분노의 표현 정도로 생각하는 분위기 마저 있을 정도다.
이에 애틀랜타 한인들이 모여 발족한 아시아계 증오범죄 방지 범한인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김백규)는 주정부 및 지역 사법당국에 용의자 롱에 대한 증오범죄 처벌을 강력히 촉구했고, 이에 담당 검찰인 풀턴카운티 지방검찰청의 패니 윌리스 청장은 "일단 살인 및 가중 폭행 혐의로 기소하지만 추후 보강 수사를 통해 증오범죄 혐의도 추가할 계획"이라고 화답한 상태다. 그러나 실제 증오범죄 혐의 추가가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한인들도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다.
아시아계 겨냥 증오범죄 확산…16개 메트로 작년 대비 2.5배 증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아시아계에 대한 인종 혐오범죄는 그 불길이 쉽게 잡히지 않을 만큼 계속 확산되고 있다. 캘리포니아주립대의 조사에 따르면 올해 미국 16개 메트로 지역에서 1분기에 발생한 아시아계 겨냥 증오범죄는 무려 95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36건에 비해 2.5배 이상 증가했다. 도시별로는 중국계가 많이 거주하는 뉴욕과 샌프란시스코가 각각 32건과 12건으로 가장 많았고, 중국계로 오인된 한국계 미국인들에 대한 공격도 심심찮게 발생했다.
이러한 추세는 4월과 5월에도 이어졌으며 특히 아시아계 노인이나 여성 등 자신을 보호하기 힘든 약자들에게 이유없는 폭행을 가하는 이른바 '묻지마' 범행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더욱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 16일에는 샌프란시스코 도로에서 산책을 하던 94세 아시안 할머니가 대낮에 칼에 수차례 찔리는 사건까지 발생해 충격을 줬다.
한인 비대위의 김백규 위원장은 "미국에 사는 한인 등 아시아계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생활해 왔기 때문에 자신들을 '조용히 맡은 일을 잘 하는 모범 시민'이라고 생각해 왔다"면서 "하지만 애틀랜타 총격사건 등 인종 범죄를 당하면서 이러한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다"고 해석했다. 그는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서 우리 다음 세대들이 차별을 당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앞으로 더욱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인종범죄 예방 운동 및 차별 방지 캠페인을 벌여나갈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이상연은 1994년 서울 한국일보에 입사해 특별취재부 사회부 경제부 등에서 기자 생활을 했으며 2005년 미국 조지아대학교(UGA)에서 저널리즘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애틀랜타와 미주 한인 사회를 커버하는 애틀랜타 K 미디어 그룹을 설립해 현재 대표 기자로 재직 중이다.
이 기사와 뉴스버스 취재를 자발적 구독료로 후원합니다.
후원금 직접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신한은행 140-013-476780 [예금주: ㈜위더미디어 뉴스버스]
뉴스버스 기사 쉽게 보시려면 회원가입과 즐겨찾기를 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