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법시스템 이대로 좋은가? ②]
선진국은 배심제, 참심제 등 판사 독단 위험성 막는 다양한 장치
미국식 배심제 도입하면 형사소송의 90% 1심에서 종결…전관예우 사라져
독일 헌재 재판소원 기능, 판사의 잘못된 판결 엄격히 평가해 처벌
2007년 개정된 우리 형사소송법 제307조(증거재판주의)는 “사실의 인정은 증거에 의하여야 한다. 범죄사실의 인정은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에 이르러야 한다”고 돼 있다. 또한 제308조(자유심증주의)는 “증거의 증명력은 법관의 자유 판단에 의한다”라고 규정했다. 우리나라 사법제도는 헌법과 법률에 의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판사의 양심에 따라 판단하도록 했다. 판사의 재판 재량권이 매우 크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는 그동안 수많은 사법 피해자들의 사례가 보여주고 있다.
형식적으론 3심제를 표방하지만 사실상 1심, 2심을 거치면서 법관의 재량권에 의존하기 때문에 재판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이 크고 이 때문에 사법 거래가 음성적으로 비대해질 수밖에 없다. 전관예우를 부추기는 제도적 뿌리이기도 하다.
통계적으로 우리 형사사건의 95%는 확실한 증거가 있거나 자백이 이루어진다. 약 5%는 증거도 없고 의심이 없는 증명도 없는데, 이 경우 법관의 자유 판단으로 유무죄를 결정한다. 결국 법관의 자의적 판단, 즉 양심에 의해 유무죄를 가를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사법 선진국에서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 경우 판사의 자의적 판단이 아니라 시민들이 참여하는 배심제로 유무죄를 가린다. 배심제는 미국에서 제일 정착이 잘되었고 현재 영미권 나라와 스페인 러시아 등에서 실시하고 있다. 당초 12명의 배심원 전원일치 판결로 이뤄지다가 현재는 다양한 버전이 시행되고 있다. 배심제는 여러 실험에서 재판관과 일반인의 유무죄 판별력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오히려 법률가들이 선입견이나 편견이 더 많았고, 사회 각계각층에서 선별된 12명의 배심원들이 법관들의 몇 번에 걸친 판단(3심제)보다 적어도 사실 판단에서 더 현명한 것으로 드러났다.
배심제의 토대 ‘플리바게닝 제도’
미국의 배심제를 정확히 알려면 먼저 플리바게닝(Plea Bargaining)을 이해해야 한다. 영국에서는 1970년 첫 판례가 등장한 이후 50년 넘게 플리바게닝이 이뤄지고 있다. 미국은 1971년 연방대법원이 플리바게닝을 형사 절차의 일부로 인정한 후 거의 모든 형사사건에서 플리바게닝 제도를 활용하고 있다.
미국 형사소송의 95%는 증거와 자백이 있는 사건이다. 이 중 90%가 플리바게닝을 통해 1심에서 합리적으로 해결된다. 플리바게닝은 자기 죄를 인정하거나 타인의 죄를 증언하는 자에게 형량을 감면해주는 제도다. 재판의 신속한 진행을 위해선 확실한 증거나 진술을 효율적으로 확보해야 하는데, 플리바게닝이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대륙법 국가인 프랑스도 2004년부터 경범죄에 한해 플리바게닝을 인정했다. 법정형 5년 이하의 구금형 또는 벌금형 사건에 대해 죄를 감면할 수 있도록 ‘유죄를 인정할 경우에 대한 특례 절차’를 뒀다. 일본 역시 2018년 6월부터 사법 협조자에 대한 ‘협의·합의제도’ 시행에 들어갔다. 타인 범죄에 대해 협조적인 증언이나 진술을 한 ‘사법 협조자’의 경우 본인 사건에서 유리한 처분을 받을 수 있는, 사실상 플리바게닝을 도입한 것이다.
한국과 비슷한 법체계를 가진 일본에서 플리바게닝을 시행하면서 국내 도입 논의에도 불이 붙었다. 우리 검찰도 2011년 ‘내부증언자 불기소 처분제 및 형벌 감면제’라는 명칭으로 ‘사법 협조자’ 형벌 감면제 신설을 추진했지만, 결국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배심제는 시민주권의 상징
미국에서 플리바게닝 등으로 마무리되지 않은 나머지 5% 다툼의 경우(형량 6개월 이상 사건) 2%는 법관에 의한 재판, 3%는 배심제로 진행된다. 배심제 재판은 12명 배심원이 전원일치 합의로 유무죄 평결을 한다. 배심원들이 유죄로 판단해도 법관의 확신이 있으면 무죄 평결이 가능하며, 검찰은 법관의 무죄 판결에 한해 항소할 수 있다.
반면 배심원 만장일치의 무죄 평결은 법률적용 거부권(Jury Nullification)이 있어 검찰의 항소가 금지되며 1심에서 종결 처리된다. 국민의 대표인 배심원에게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는 주권재민의 상징적인 단면으로 볼 수 있다.
미국 역사에서 배심원의 ‘실정법 적용 거부권’은 식민지 시절 영국의 압제에 대한 보호막 역할을 했다. 연방대법원은 1895년 배심원의 실정법 적용 거부권을 합헌으로 판결했고, 남북전쟁 이전 가혹한 도주노예법 적용을 거부하는 데도 적용됐다. 배심원들은 금주법 시기 소규모 밀주 제조업자들을 무죄 방면했고, 불법 낙태 시술 의사에게 무죄를 평결했다. 베트남 전쟁 때에는 징집 기피자들에게 당시 법령 적용을 거부하고 무죄 평결을 했다. 이렇게 법의 한계를 뛰어넘는 배심원들의 중요한 평결로 미국 시민의 주권은 더욱 강화되었고 시민민주주의는 더욱 발전했다.
각국의 배심제(참심제) 운영 실태
미국은 12명 배심원 전원 합의로 평결한다. 평결 실패율은 약 6%이다. 이 경우 다시 배심원 재판을 하거나 법관에 의한 재판으로 전환한다. 주마다 배심원 숫자가 다양하며 최소 인원은 6명이다. 배심원 만장일치 평결로 무죄가 나면 검찰은 항고를 할 수 없다.
영국은 12명 배심원 중 10명이 동의하는 절대 다수결로 유무죄를 평결한다. 평결 실패율(10명 동의 실패율)은 약 4%이다. 프랑스는 재판관 3명, 배심원 9명 등 혼합형 재판을 하는데, 유죄는 8표 이상으로 확정된다. 스페인은 유죄의 경우 절대다수(3분의 2 동의) 평결이 원칙이고, 무죄는 과반 다수결 원칙이다.
독일과 일본은 배심제와 약간 다르게 시민이 재판심의권을 갖는 참심제를 시행 중이다. 1920년대 참심제를 도입한 독일은 징역 2~4년형 범죄는 재판관 1명에 참심원 2명을 배치해 3분의 2 평결로 유무죄를 가른다. 징역 4년 이상 범죄는 재판관 3명에 참심원 2명을 배치해 5분의 4 동의로 평결한다. 독일 전체적으로 1만7,000명의 재판관과 7만명의 참심원이 있으며, 대법원은 5개 분야로 나뉘어 약 150명의 대법관이 있다. 일본은 징역 10년 이상 사건의 경우 3명의 재판관과 6명의 재판원(참심원)이 다수결로 평결에 참여한다. 일반 재판원보다 법관의 결정권을 우위에 둔 구조라는 특징이 있다.
한국은 1심은 단독부(법관 1명)와 합의부(법관 3명)에서 진행하며, 2심은 보통 법관 3명이 재판에 참여하나 실제적으로는 1인 평결로 운영된다. 대법원에서 이루어지는 3심은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된 3개의 소부(주심만 재판 분석, 사실상 1인 재판)와 13명 대법관으로 구성된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다수결 평결을 한다. 2심 항소∙항고 및 3심 상소의 벽이 높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배심제 도입이 필요한 이유
우리나라도 1962~1964년 배심제를 시행하다 법관에 의한 3심제로 다시 돌아갔다. 당시 여건이 되면 다시 추진한다고 했는데 어언 70년이 흘렀다. 법률가들의 이권 확보와 직무 유기의 결과다.
법관의 양심과 자율성에 맡기기보다는 이미 대다수 선진국에서 유용성을 인정받고 있는 배심제 도입이 시급하다. 미국의 배심제에서 보듯 우리나라가 배심제를 도입한다면 형사소송의 거대한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현재 우리 형사소송의 약 30%는 간이재판(단심)으로, 나머지 70%는 3심제로 처리한다. 문제는 3심제가 본래 취지(오심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한)를 넘어 과다한 재판 비용이 수반되는 불필요한 과정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미국은 형사사건의 90% 이상이 1심에서 플리바게닝 같은 합의 제도를 통해 종결된다. 반면 우리나라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대부분 1심 결과를 보고 2심에서 화해를 시도한다. 결국 1심 재판에 과도한 부하가 걸리고 2심 재판이 우위에 서기 때문에 2심 재판부 출신이 전관예우를 톡톡히 누리게 된다. 2심 역시 화해 합의가 없는 경우 검사의 무제한 항소제도로 대부분의 사건이 3심까지 올라간다. 사법부의 시간과 인력 낭비 속에 대법관 출신 전관예우가 판을 치게 되고, 개인의 소송 남발로 사회적∙국가적 손실이 막대해진다.
미국식 배심제가 도입되면 검찰의 항고권이 배제돼 2심 재판이 파격적으로 줄어든다. 배심원 재판 이외의 판사재판 역시 피의자가 항소하더라도 2심은 법률심으로 진행돼 증거 등 사실관계에 대한 재량권이 없기 때문에 전관예우가 설 자리가 없다. 3심 또한 판례심 위주여서 대법관 출신 전관예우가 사라지게 된다. 미국의 경우 대법원에 올라온 약 1만5,000여건 중 판례심에 해당하는 사건 80여건만 추려서 재판을 진행한다.
우리 형사재판도 배심제 도입이 바람직하지만 이와 무관하게 ‘1심 사실심, 2심 법률심, 3심 판례심’ 원칙만 철저히 지켜도 전관예우가 사라지고 신속한 재판이 가능해진다. 1심 재판에서 피해자 회복이 빠르게 진행되고, 가해자도 보상과 화해에 적극 나서게 돼 사법이 회복적 치유제도로 자리잡을 수 있다.
조만간 윤석열의 내란이 완전히 진압되면 제7공화국 헌법 개정이 예상된다. 개헌안에 권력구조 변화, 지방분권 및 개인 인권 강화 등과 함께 사법개혁의 핵심인 배심제가 도입돼 사법의 민주화가 실현되길 기대한다. 형량 6개월 이하 및 소액재판의 경우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는 치안판사제가 도입되고, 헌법재판소의 재판소원 기능이 부활돼 독일처럼 잘못된 판결을 한 판사를 처벌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희망한다.
박인호는 경희대 치과대학을 나와 서울 우신치과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노사모 활동을 계기로 시민의 정치 참여에 관심을 갖게 됐다. 한명숙 모해위증 사건을 보고 대한민국 사법제도를 독학했다. 2023년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의 제안으로 사단법인 희망래일이 운영하는 대륙학교에서 사법개혁을 강의하기도 했다. 사법개혁을 가로막는 법조 카르텔을 고발하고, 시민 참여 사법개혁의 방향을 알리는 활동으로 ‘시민 사법개혁 전사’라는 평가를 얻었다. 사법 질서가 바로 잡혀 진정한 민주주의가 살아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게 그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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