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블럭(WHITE BLOCK)’ 이수문(76) 관장은 경기도 파주 헤이리에 ‘아트센터 화이트블럭’과 소규모 창작 스튜디오(레지던시),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에 대형 레지던시와 복합문화공간을 경영한다.
문화예술경영인 이수문에 대한 제대로 된 조명은 그가 ‘부업이었다’는 뮤지컬 <명성황후>를 기획하고 제작한 이력에서 출발한다.
이수문은 서울의 중학교 연극반에서 악기를 다루는 배역을 맡았다. 밴드부에 가서 클라리넷을 배웠다. 고교에서도 연극과 악기 연주는 이어졌다.
1960년대 소위 ‘조국 근대화’ 시절, 머리 좋은 이가 의과대학에 진학하면 이공계 기피라며 비난받는 분위기였다. 공과대학에서 한가할 듯 싶은 곳을 찾은 게 건축학과이다. 이념적 좌표와 상관없이 순전히 ‘전쟁터가 궁금해’ 입대 후 1969년 월남(베트남)전에 자원, 군악대원으로 색소폰을 불며 전쟁터를 가까이에서 경험했다.
복학하고 대학을 마친 후 15년여의 직장 생활을 거쳐 1988년 창업한 자신의 회사를 2003년 코스닥에 상장하였다. 세계 레인지 후드 업체 톱 5를 목표로 경영에 매진하며 인생의 화양연화를 맞는듯 했으나 2006년 신장암 초기 진단을 받고 멈추어야만 했다. 2008년 자신의 사업체를 대기업에 매각, 경영에서는 완전히 손을 떼는듯 보였다.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 산파역
청소년 시기에 시작된 연극 활동은 대학, 직장 생활, 사업을 하면서도 이어지고 있었다.이수문이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 산파역을 맡게 되는 것은 자신이 10년간 직장 생활을 했던 ㈜한샘 조창걸(1939~ ) 회장과의 인연이 결정적이다. 독립해 사업체를 꾸려가면서도 조창걸과는 공적, 사적 이유로 자주 만났다. 급기야 두 사람은 1990년대초 경제를 비롯한 한반도 정세가 100여년전 무력을 앞세운 주변 제국주의 열강의 확장 정책으로 조선이 위기에 처한 상황과 유사하다는데 공통 인식을 하게 된다. 사회적으로 환기시켜야 한다는 데도 공감하였다. 이수문의 활동 영역인 연극을 확장하여 풀기로 했다.
이수문의 인맥 및 친화력은 조창걸과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을 연결하기에 이르렀고, 2015년 조창걸 출자로 홍석현의 대선 출마 싱크탱크로 알려졌던 여시재(현, 태재미래전략연구원) 설립으로 귀결됐다.
1991년 뮤지컬 주제 선정은 조창걸과 이수문이 결정하였다. 조창걸은 초기부터 프로젝트가 완결되는 전 과정의 비용을 책임졌다.
이수문은 이미 몇 편의 연극 각색 경험이 있는 소설가 이문열, 연출가 윤호진과 함께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와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를 한달여 훑었다. 뮤지컬의 제왕 캐머런 매킨토시(Cameron Mackintosh·1946~ ), 일본 연극계 대부 아사리 게이타(1933~2018)를 만났다. 캐머런 매킨토시는 캣츠, 레 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 등 세계 4대 뮤지컬을 만든 거장이다. 고교 선배인 이홍구(1934~ ) 영국주재 대사의 주선이 있어 가능했다. 캐머런은 뮤지컬 사업의 성공 요소로 시장, 인재, 자금을 꼽았다. 아사리 게이타는 “문화 상품도 일반 상품을 파는거와 다를 바 없다”고 조언하였다.
공연 명칭은 처음부터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었기에, 1895년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주도한 민비(1851~1895) 시해 암호명인 ‘여우사냥’으로 정했으나 국내 관객층의 정서를 고려, 최종적으로 <명성황후>로 확정했다.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등극한 후 민비를 명성황후로 추존(追尊)하였다.
해외 공연 명칭은 영화 ‘마지막 황제 부의’의 영어 제목(Last Emperor)을 따서 ‘Last Empress’(마지막 황후)로 작명하였다.
이문열, 윤호진이 작품을 완성하는 동안 이수문은 제작비 조달 및 후원 유치 등 궃은 일을 도맡았다.
<명성황후>는 명성황후 시해 100주년인 1995년 말에 무대에 올랐다. 총 제작비 12억원으로 연간 관객 4만여명이 찾는 성황을 이루었고, 흑자를 기록해 한국 창작 뮤지컬의 시금석으로 일컬어진다. <명성황후>는 1997년과 1998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도 진출했다.
이수문은 <명성황후>의 성공 요인으로 ‘흥행성 위주 작품 선정, 프리미엄급 대형 공연장 확보, 용이했던 자금 조달’을 꼽았다. 이수문은 2012년 자신의 기여도(기업체 협찬, 유관기관 접촉, 작품 선정)가 한계에 달했다고 판단해 스스로 극단 경영에서 물러났다.
갤러리스트의 문고리를 잡아당기다
이수문은 2009년 경기 파주시 헤이리에 아내 차명희 작가를 위한 작업실용 건물을 지으며 헤이리 예술 마을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헤이리 중앙로의 연못(습지)이 내다보이는 위치의 땅 1,600㎡(480평) 규모를 사게 됐다. 곧이어 미술관을 짓기로 하고 국내 3곳, 해외 3곳 설계사무소를 참여시킨 국제지명 현상 공모로 박진희 건축가 설계안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이수문은 건축가에게 미술계 인사들에게 자문 받지 말라고 주문하였다. 고루한 경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헤이리 마을 조성 초기 기획자들은 상업 공간 보다는 예술 빌리지 조성에 치중하였기에 후발인 이수문은 많은 제한을 느꼈다. 미술 공간이 헤이리 마을 생태계를 존중하면서도 상징이 되기를 바랬다.
2011년 개관한 '아트센터 화이트블럭'은 지하1층∼지상3층에 건물면적 1,500㎡ 규모로 헤이리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다. 3개의 갤러리 볼륨(volume)의 매트릭스 구성으로 6개의 전시 공간을 만들었다. 눈에 띄는 연못 부지와의 통합된 풍경이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건물은 전면 커튼월 유리와 백색 알루미늄 하니컴 판넬로 구성돼 심플하고 투명한 외관이 눈길을 끈다.
외부로 형한 내부의 '스트램프'(계단과 경사로 혼합)는 연극, 실내악 연주, 퍼포먼스 등 복합예술 공연장의 관람석 용도로 설계하였다. 2012년 김구림 전시 ‘판타스마고리아’ 오프닝의 축하 퍼포먼스, 홍신자와 베르너 삿세의 ‘Call for Avantgarde’ 공연, 2014년 전시 ‘서용선의 단종실록’ 관련 단막 창작극 <세조애걸> 공연, 기타 실내악 공연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화이트블럭’은 설계도면상 건물 외관이 하얀색 박스 형태였기에 프로젝트명으로 부르다, 준공 단계에서 최종 이름으로 계속 사용키로 하였다. 건설사업관리(PM, Program Management) 회사가 건축 전 과정을 관리하고 시공하는 책임형 CM(Construction Management) 방식으로 건축했다.
입주 경쟁률이 수십대 1에 달하는 화이트블럭 부설 소규모 레지던시(4명) 심사 위원이 ‘이왕 할 거면 좀 더 크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게 화이트블럭이 중부권으로 진출한 계기가 되었다. 이수문은 작가에게 전시 공간만큼이나 작업 공간이 중요하다는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천안과 공주 중간인 천안시 광덕면에 9만여㎡의 임야와 대지를 마련했다.
국내 대부분 공공 또는 민간 레지던시가 공장이나 창고를 리모델링하는 수준인 반면 화이트블럭 천안 예술촌 레지던시는 목적에 맞게 설계하고 시공됐다. 천장고가 높고 작가들의 생활 편의성도 높였다. 2018년, 4개동에 개인 작업실 16개실, 커뮤니티 라운지를 갖추었다.
2023년 12월에 예술촌에 오픈한 ‘뮤지엄 호두(Museum Hodu)’는 9,487㎡의 대지 면적에 4개의 전시실, 교육실 2개실, 소극장, 카페, 게스트룸, 하늘정원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이다.
이수문은 화이트블럭 천안 예술촌을 “연간 10만 명이 방문하는 핫플레이스로 만들겠다”고 한다. 이를 위해 예술가들이 작품 활동만으로도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고, AI시대에 부응하는 융복합 예술의 실험장을 만들며, 100년이상 지속가능한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하는데도 의미를 둔다.
경기 파주시 헤이리, 충남 천안시 광덕면 화이트블럭의 하드웨어는 완성되었다. 전방위 문화예술 경영인 이수문이 새롭게 펼쳐갈 소프트웨어가 궁금하다.
심정택은 2009년 상업 갤러리(화랑) 경영을 시작한 뒤 지금까지 국내외 40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했다. 그 이전 13년여간 삼성자동차 등에 근무하였고 9년여간 홍보대행사를 경영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기사 60여편, 2019년 4월부터 작가 및 작품론 중심의 미술 칼럼 200여편, 2019년 10~2023년 4월 매일경제신문에 건축 칼럼(필명: 효효) 160여편을 기고했다. 뉴스버스에는 2021년 창간부터 주1회 미술작가 평론을 게재해왔다. <이건희전, 2016년> 등 3권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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