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학의 경제이슈 분석]
부장은 고려아연, 과장은 영풍 출신…사원들 한때 형제처럼 지내기도
최씨 가문 2세들의 투자 실패로 영풍 지배권 장씨 가문에 넘어가
국내 비철금속 업계의 강자인 고려아연과 영풍그룹의 경영권 갈등이 확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75년 동업자’로 고려아연과 영풍의 경영을 각기 맡아온 두 집안이 원수처럼 격돌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 ‘친한 사이 동업하지 마라’…張-崔 창업동지에겐 안 통했다
영풍그룹 본사는 서울 강남구 논현동 영풍빌딩에 있다. 이 건물 1층 로비에는 1949년 영풍을 공동 창업한 고 장병희 창업주와 고 최기호 창업주의 동상이 있다. 영풍의 석포제련소와 고려아연의 온산제련소에서 만든 비철을 섞어 만든 75년 동업의 상징이다.
두 사람은 5 대 5 지분으로 영풍을 공동 창업했고, 현 3세 경영인까지 75년간 공동 경영의 전통을 이어왔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절반씩이던 지분 구조의 균형이 깨지면서 장씨 가문이 최대 주주가 됐다. 그럼에도 (주)영풍과 전자계열사 경영은 장씨 가문이, 영풍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고려아연 경영은 최씨 가문이 맡는 식으로 운영해왔다.
두 집안의 갈등은 최기호 창업주의 손자인 최윤범씨가 2022년 고려아연 회장에 오르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최 회장은 고려아연을 비철금속 회사를 뛰어넘는 혁신기업으로 만들겠다는 명분 아래 독립 경영을 시도했다. 하지만 최대 주주인 장씨 가문은 영풍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고려아연의 홀로서기를 좌시하지 않았다. 사모펀드 운용사 MBK파트너스와 손잡고 최 회장의 고려아연 경영권을 빼앗으려는 강수를 둔 것이다.
이제 두 가문 사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게 재계의 일반적인 해석이다. 창업 이래 75년 동안 한 몸처럼 움직였던 영풍과 고려아연이 두 개로 쪼개지는 건 시간문제인 셈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박정희 정부 권고로 1974년 국내 최대 아연제련소 ‘고려아연’ 설립
영풍그룹(재계 28위)의 시작은 1949년 11월 ‘영풍기업사’다. 장병희 창업주(1913년생)와 최기호 창업주(1909년생)는 같은 황해도 사리원 태생이다. 해방 이후 월남해 서울 남대문에서 장 창업주는 전기기구와 농기계, 최 창업주는 발동기(발전기)를 팔았다고 한다. 같은 고향, 비슷한 나이에 사업을 한다는 공통점도 있어 금세 친구가 됐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관포지교(管鮑之交)처럼 서로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공동 창업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전쟁이 발발해 부산으로 피신했던 두 사람은 1952년 각각 절반의 지분으로 광업을 주로 하는 ‘영풍해운’이라는 회사를 세웠다.
영풍은 1970년 경북 봉화군 석포면에 연 1만톤의 아연을 생산할 수 있는 제련소를 건설했다. 당시 국내 최초의 아연 생산시설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경상남도 온산에 비철금속 단지를 조성하면서 석포제련소를 온산으로 옮기자고 영풍 측에 제안했다. 하지만 거대한 생산 설비를 해체해 옮기는 게 쉽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영풍은 1974년 총 1억원을 출자해 연산 5만톤 규모의 고려아연을 설립했다.
박정희 정부가 “한국을 대표할만한 이름의 아연회사를 별도로 만들어 육성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해 ‘고려아연(KOREA ZINC)’이라는 회사명이 나왔다. 당시 석포제련소는 낙동강 상류에 위치해 환경 문제가 잇따랐고, 주변이 산악지대라 공장 확장에도 제약이 컸다. 반면, 고려아연의 온산제련소는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에 힘입어 본격적인 성장 가도를 달리면서 영풍그룹의 핵심 계열사로 자리잡았다.
◇ 고려아연은 崔씨 가문, 영풍은 張씨 가문이 맡아온 전통
1990년대 들어 오너 2세대 경영이 시작됐지만 양측의 공동경영 체제에는 문제가 없었다. 영풍 경영은 장형진 회장이, 고려아연은 최창걸 회장이 전담하는 구조였다. 두 가문은 영풍의 지분을 20%대 중반으로 비슷하게 유지했고, 영풍이 고려아연을 자회사로 지배하는 식이어서 지배구조는 안정적으로 유지됐다. 두 창업주가 긴밀히 협력하며 사업을 이끌었던 것을 봐왔던 만큼 2세대인 두 회장의 관계 역시 1세대 오너들만큼 각별했다고 한다.
다른 기업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공동영업, 인적 및 정보 교류가 그 상징이었다. 영풍과 고려아연은 아연, 황산 등의 원료를 공동 구입해 제련하고 다시 공동 판매했다. 양사 직원들은 영풍빌딩에서 함께 일하며 서로의 사무실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직원 파견도 많아 한 부서 부장은 고려아연 출신이, 과장은 영풍 출신이 맡는 일도 흔했다.
◇ 2000년대 5대 5 지분 구조 깨지며 장씨 가문이 최대 주주로 지배
2000년대 들어 갈등의 씨앗이 뿌려지기 시작했다. 최창걸 명예회장 등 최씨 일가가 신사업 및 재무적 투자 실패 탓에 영풍 지분을 장씨 오너가와 영풍에 매각한 것이다. 최 명예회장은 2006년 영풍 지분 약 6%를 매각하기도 했다. 최씨 가문은 영풍 지분 매각 자금을 투자 실패에 따른 손실을 충당하는데 썼다고 한다.
5대 5 지분 구조가 무너지면서 결과적으로 영풍은 장씨 일가가 지배하는 회사가 됐다. 당시 영풍이 갖고 있던 27%대 고려아연 주식도 자연스레 장씨 가문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창업 이래 동업자 정신에 따라 고려아연 경영은 최씨 일가, 영풍 경영은 장씨 일가가 맡는 동거 체제가 지금까지 이어져온 것이다.
고재학은 한국일보에서 33년간 기자로 일하며 경제부장, 논설위원, 편집국장 등을 지냈다. 올해 6월 뉴스버스 공동대표로 합류해 경제 부문을 맡고 있다. 뉴스버스TV에서 주요 경제 이슈를 정리해주는 ‘고재학의 경제버스’를 진행한다. 스테디셀러 <부모라면 유대인처럼>을 비롯해 <절벽사회> <휴대폰에 빠진 내 아이 구하기> 등의 책을 썼다. 우직하게 객관주의 저널리즘의 힘을 믿는 언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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