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찬성’ 한미FTA vs. ‘진보 이탈’ 의대 증원

尹, 화물연대 진압에 도취…'몰시스템적 사고'

의대 증원, ‘MB 지소미아’처럼?…근로기준법 확대는?

윤석열 대통령이 13일 서울 중랑구 서울의료원 권역응급의료센터를 찾아 박현경 서울의료원 권역응급의료센터장(오른쪽)으로부터 센터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13일 서울 중랑구 서울의료원 권역응급의료센터를 찾아 박현경 서울의료원 권역응급의료센터장(오른쪽)으로부터 센터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가 모셨던 노무현 대통령도 재임 중 한미 FTA를 타결하고 제주해군기지를 건설하면서 굉장히 지지율이 떨어졌다.”

9월 9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의료대란, 경제폭망, 민생파탄은 누구 탓인가”를 묻는 이건태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한덕수 국무총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윤석열 정부의 의대 증원을 ‘윤석열판 한미FTA’라고 웅변한 셈이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 국무총리였던 한 총리는 일단 기억에서부터 틀렸다. 한미FTA는 노 정부 지지율 저하에서 중요한 요인이 아니었다(이 정책들의 옳고 그름은 이 글에서 논외로 한다). 한미FTA는 2006년부터 추진되어 2007년 4월에 협상이 타결되었다. 노 대통령 지지율은 탄핵안 기각 후 얼마 지나지 않은 2004년 3분기에 이미 23%(한국갤럽)였다. 

한미FTA 반대층의 주축은 이라크 파병, 대연정 논란, 비정규직법 등을 겪으며 진작에 이탈한 층이었다. 오히려 한미FTA가 타결된 2007년 4월, 20%대였던 노 대통령 지지율은 급상승해서 30%선을 돌파했다. 그가 굳건하게 협상을 추진한 탓에 수도권과 3040세대의 한미FTA 찬성율이 제법 올라가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후보이던 2022년 2월, 재경 전북도민회 신년 인사회에서 한 총리와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이때 한 총리는 한미FTA를 예로 들며 “굉장히 힘든 일은 대통령의 어젠다로 해야 가능하다”고 말했고, 윤 대통령은 “제주해군기지는 노 전 대통령의 대단한 결단이었다”고 화답했다 한다. 

그런데 한미FTA 추진과 제주해군기지 결정은 민주당 계열 대통령이 민주당 지지층보다 국민의힘 지지층이 더 선호하는 일을 한 것이다. 윤 대통령이 이에 비견되려면 국민의힘 지지층보다 민주당 지지층이 더 선호하는 일을 몇 가지 해야 한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거의 모든 것을 국민의힘 강성 지지층의 입맛에 맞췄다.  

그러다 겨우 나온 것이 의대 증원이다. 처음에는 여론이 좋았다. 원래 찬성했던 민주당 지지자들은 계속 찬성했고,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국민의힘 지지자들도 찬성에 가세했다. 윤 대통령은 이런 그림을 원했을 것이다. ‘이런 일은 보수 정부가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대통령의 밀어붙이기 성향은 국민에게 긍정 평가받는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지지율도, 정책 추진 동력도, 모두 떨어졌다. 노무현의 한미FTA는 보수층이 한미FTA를 반대하는 사태를 낳지 않았던 반면, 윤석열의 의대 증원은 진보층이 찬성 입장에서 벗어나도록 만들었다. 특히 증원 규모 ‘1,500여명’이 띤 과격함은 찬성론도 이탈하는 요인이 됐다. 

노무현 정부는 한미FTA 국회 비준을 임기내에 받으려 서두르지는 않았다. 의대 증원의 정공법도 뻔히 보이는 것이다. 한 해쯤 논의해서 될 일이 아니다. 증원 시점은 일러봐야 2026년인 것이 정상이고, 증원이 이를수록 속도는 점진적이어야 한다. 세싱살이 겪어본 만인이 다 알고 내다보는 이치다.  

의대 증원 추진은 윤 대통령의 고질적 문제만 더 부각시켰다. 2022년 말 화물연대 파업 당시 정부는 업무복귀명령 발동에 그치지 않고 안전운임제를 없애버렸다. 파업을 우려한 시민들 상당수도 정부 대처에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윤 정부는 지지율 회복에 도취되었고, 이는 전공의 사직 사태 대응에도 영향을 끼쳤다. 예컨대 의료계 의견이 다양할 수밖에 없는데도 대통령이 연신 “통일된 안을 갖고 오라”고 요구하는 것은 ‘정부한테 까불었으니 안전운임제 없애줄게’ 하던 치기가 다시 도진 것이다. 

윤 대통령이 시스템적 사고를 하지 않는다는 것도 재확인됐다. 의대 정원은 건강보험 재정과 필수/비필수 의료의 재조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린 것이다. 큰 그림이 불명확한 윤 정부는 ‘의료계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안을 내면 검토하겠다’고 으스댈 자격이 없다. 윤 정부 출범 이후 국책연구기관은 단 한 번도 의대 증원 문제를 다룬 적이 없다. 윤 정부가 증원 근거로 든 보고서의 필자들마저 정부에 이견을 표한 바 있다. 

이렇게 가다가는 의대 증원은 오랜 기간 이뤄지지 않거나 일회성으로 그칠 수 있다. 최종적으로는 ‘이명박의 한일 지소미아’처럼 될지 모른다. 윤 대통령의 목표가 일을 망치기로 한 것이었다면 그는 합목적적으로 움직여온 것이다. 

이제 궁금해지는 것은 정부가 근래 거론해 온 ‘근로기준법, 5인 미만 사업장으로 확대적용’의 운명이다. 실현된다면 정말 ‘윤석열판 한미FTA'가 될 수 있겠지만, 윤 정권은 이건 또 어떻게 물거품으로 만들까.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를 활용하는 전략이 등장할 것도 같다. '재계 만난 한, 철회 입장 피력', '윤, 고심 끝에 건의 수용', 이런 식으로 말이다.

김수민은 풀뿌리운동과 정당활동을 하다 현재는 지상파와 종편, 언론사 유튜브 방송 등에서 정치평론가로 활약 중이다. 팟캐스트 <김수민의 뉴스밑장> 진행도 맡고 있다. 2010년부터 2014년까지 경북 구미시의회 시의원을 지냈다. 시의원 시절엔 친박 세력과 싸웠고, 조국 사태 국면에서는 문재인 정권 핵심 지지층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저서로는 <다당제와 선거제도>(eBook) >가 있다.  

※ 뉴스버스 외부 필자와 <오피니언> 기고글은 뉴스버스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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