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럿>은 8월 16일 기준 350만명 이상이 관람했다. 올해 개봉한 한국 영화 흥행 순위 3위에 올라 있다. 그렇다면 여장 코미디로 분류될 수 있는 <파일럿>의 흥행요인은 무엇일까?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코미디 장르, 조정석 배우의 한정미로서 완벽한 역할 소화와 타고난 코미디 재능, 김한결 감독의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력과 연출 능력이 아닐까.

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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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오피스에는 조정석이 주인공인 <행복의 나라>도 3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참 변호사로 성장하는 역할로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파일럿>에서 조정석 배우가 날개를 달았다면, <행복의 나라>에선 작품의 무게에 짓눌린 듯한 느낌을 준다. 두 감독이 같은 배우를 활용한 다른 방식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조정석의 완벽한 변신으로 탄생한 코미디

지금까지 <파일럿>의 선전(善戰)에는 복합적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코미디라는 점이다. 최근까지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는 주로 애니메이션이었다(예를 들면 <인사이드 아웃 2>). 대체로 흥행 순위에 오른 한국 영화는 범죄/액션물로 폭력적이고 잔인하여 가족이 같이 보기엔 어려움이 있다. 이 점에서 <파일럿>은 큰 장점을 갖고 있다. 경제도 어렵고 정치도 혼란한 지금 복잡하고 머리 아픈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싶은 관객은 드물 것이다. 비록 젠더 갈등을 소재로 삼지만,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다(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여기에 조정석의 여장 한정미로서의 완벽한 역할 소화 또한 절대 공신이다. 약 2시간 동안 조정석의 한정미에 푹 빠져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웃고 또 웃는다. 조정석은 뮤지컬 <헤드윅> 경험을 100% 이상 활용해 한정우(조정석)의 동생 한정미로 변신한다. 조정석이 처음으로 여자 분장을 하고 외출한 날, 그녀는 예뻤다. 어쩜 그렇게 여자처럼 보이다니. 조정석 배우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출처: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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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조정석의 발랄한 끼는 영화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의 천연덕스런 움직임은 곳곳에서 웃음보를 터뜨린다. 지금도 생각나는 장면은, 여장을 하고 간 입사 면접장에서 그가 갑자기 일어나 알 수 없던 언어로 부르던 노래와 춤이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황당한 설정이지만, 그 상황에 절묘하게 아니 기막히게 어울린다. 영화 속 심사위원단도 아마 나처럼 느꼈을 것 같다. 그리고 남자이기에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행동조차 자연스럽다. 치마를 입은 채 다리를 벌린다든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본인의 목소리라든지.

하지만, 여기에는 주변 사람들이 한정미 분장을 한 한정우(조정석)가 여자임을 밝히기 전까지 그가 여자임을 모른다는 전제가 있다. 관객은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부분에 약간의 억지스러움이 있다는 사실도 알지만, 관객은 이 점을 포용한다. 일종의 관용이라고 할까. 코미디이기에 알고도 넘어가 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머니 칠순 잔치에서 한정우와 한정미로 잦은 교체는 기시감이 든다.

관찰 능력이 탁월한 김한결 감독

<파일럿>은 김한결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다. 영화를 초반부터 후반까지 톤과 매너를 유지하면서 리듬감 있게 끌어가는 힘이 있다. <가장 보편의 연애>(2019)를 다시 보니 이러한 힘의 근원이 느껴진다. 김한결 감독의 첫 장편 영화지만, 영화의 흐름에 무리가 없다. 그리고 그녀의 일상생활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력도 돋보인다. 즉 과하지 않게 현실의 미혼 남녀의 연애사를 담고 있다. 연애는 단지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도 무시할 수 없음도 제시하면서. 두 주인공 김래원과 공효진의 균형감도 좋다. 특히 후반부에서 회사 동료에 대한 공효진의 복수는 통쾌함 마저 선사한다.

김한결 감독은 단편영화(<구경>, <술술>, <화해>)부터 계속해서 현실적인 서사를 담고 있다. 이런 특성은 <파일럿>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파일럿>은 <콕비트>(2012)라는 영화를 원작으로 하지만, 한국의 현재를 풍부하게 묘사한다. 유키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한 한정우, SNS 서비스의 위력(무서움), 회사 일에만 몰두하면서 그것이 가족을 위하는 일이라고 굳게 믿는 남편, 어제까진 모두가 추앙했지만,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 현상, 블랙리스트 명단에 오른 후 어디에도 취업 안되는 상황, 거기에 이혼까지. 매우 가능성이 있는 시나리오다.

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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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럿>의 또 다른 특징은 주요 역할에 여성들이 포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혼을 원하는 한정우 아내(김지현), 무명의 ASMR 유튜버로 활동하는 동생 한정미(한선화), 이찬원 트롯 가수의 열렬한 팬으로 활동하는 한정우 어머니(오민애) 등. 변화된 시대상을 투영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각자의 역할에 충실할 뿐 페미니즘의 투사로 나서지 않는다. 한정우 고발자인 윤슬기(이주명)도 결국은 피해자가 되며, 여성이라는 이유로 후계 구도에서 밀린 한 에어 노문영 이사(서재희)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윤슬기를 해고한다. 사회의 부조리를 군데군데 반영하되 논의의 장으로 끌어오지는 않는다. 여장 경험을 통한 한정우의 성장 서사도 낯이 익다. 한편으로는 변화된 시대상을 보여주지만, 여기에 그치고 있다.

감독의 의도를 알기 어려운 <행복의 나라>

조정석 배우가 변호사로 분한 <행복의 나라>는 무겁다. 시기적으로는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10. 26)과 12·12 군부 쿠데타사태 사이에 발생한 일이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수행비서였던 박흥주 대령이 중심에 있다. 박흥주 대령을 살리고자 노력했던 변호사와 그의 법정 다툼이 중심 내용이다.

그러나 추창민 감독이 주요 캐릭터에 부여한 현실성은 부족해 보인다. 주요 인물은 3명으로 구성된다. 전두환을 연상시키는 전상두(유재명), 박흥주 대령을 모티브로 한 박태주(이선균) 그리고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전신에 몸담았던 변호사를 대변하는 정인후(조정석) 변호사가 있다.

그런데 정인후 변호사에도, 박태주 대령에도 감정이입이 쉽지 않다. 추장민 감독은 박흥주 대령을 영웅으로 만들기 싫었다고 했다. 그로 인해 그를 연기한 이선균 배우에선 역동적인 느낌이 없다. 박태주(이선균) 대령이 나오는 분량도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박태주의 과거와 사건 당일 행적은 직접으로 자세히 묘사되지 않는다. 대신 그의 행적은 조정석 배우가 그 당시 현장을 변호사의 자격으로 방문할 때에 그의 상상력 속에 묘사된다. 박태주 대령의 과거 경력도 법정에서 박대령(이선균)의 진술이나, 정인후(조정석) 변호사의 변론 속에 언급된다. 추창민 감독의 의도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박태주(이선균) 대령의 존재감은 약하다.

오히려 전상두(유재명)와 정인후(조정석)는 여러 번의 만남을 통해 그 둘만 부각 된다. 추창민 감독은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전상두를 통해 야만의 시대를 표현하고자 했다고 한다. 하지만 관객은 이미 전상두가 누구인지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다. 여기서 어떤 공감이 생길지는 의문이다. 골프장에서 정인후 변호사(조정석)가 전상두에게 외치는 ‘제발 사람만은 죽이지 말라’는 외침은 공허한 소리로 들린다. 아무리 판타지적인 요소라고 하지만, 감독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게 뭐지? 이미 그는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추창민 감독은 누군가는 전상두에게 외쳤을 거라는 상상에서 그렇게 했다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은 장면이다. 골프장에서의 만남 자체도 판타지인데 거기에 허망한 외침이라, 카타르시스를 주기보단 어리둥절함만 제공한다.

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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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창민 감독은 자신이 연출해 1,200만 이상의 관객을 모은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관객이 공감했던 포인트를 놓친 것 같다. 가짜 왕(이병헌)이 언급한 '진정으로 백성을 보살피고 사랑하는 왕'은 바로 관객이 원하던 현실의 지도자 모습이었다. 그랬기에 그 말을 듣는 순간 관객의 감정이입이 일어나면서 공감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추창민 감독은 그가 언급한 야만의 시대를 통해 무엇을 얘기하고 싶었을까. 자신의 의도에 매몰되어 다른 부분이 삭제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돈과 출세만을 추구하던 정인후(조정석) 변호사가 박태주 대령을 변호하면서 인권 변호사로 변모하는 부분도 익숙한 설정이다. 조정석은 훌륭한 연기를 펼치지만, 그에겐 밝은 에너지가 더 잘 맞는 것 같다.

<행복의 나라>에서 박태주(이선균) 대령이 죽기 전 정인후(조정석) 변호사에게 “잘 있게” 하는 장면에선 여러 감정이 복받친다. 이 자리를 빌어 이선균 배우의 명복을 빈다. [뉴스버스]

김주희는 뉴질랜드 와이카토(Waikato)대학에서 ‘영상과 미디어’를 전공한 예술학 박사이다. 뉴질랜드는 피터 잭슨 감독이 <반지의 제왕>(2000~2003) 시리즈와 <킹콩>(2005)을 만들어 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영화 제작 강국이다. 연세대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뒤 같은 대학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받았다. 여전히 소녀적 감수성을 간직한 채 유튜브 <영화와의 대화>를 운영하는 유튜버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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