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적 인물 등용·일본 책임엔 침묵…광복절 쪼개놔

국민 설명 없이 통일방안 바꾸고 비현실적 대북 제안

제79주년 광복절인 15일 항일독립선열 선양단체 연합(항단연) 회원들이 15일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서 개최한 광복절 기념식을 마친 뒤 독립기념관장 임명 철회 등을 요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79주년 광복절인 15일 항일독립선열 선양단체 연합(항단연) 회원들이 15일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서 개최한 광복절 기념식을 마친 뒤 독립기념관장 임명 철회 등을 요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2024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일제 식민지 36년간의 긴 어둠의 터널에서 벗어나 ‘빛을 회복한’ 79주년 광복절에 시민들은 기뻐하지 못했다. 오히려 허탈과 분노의 감정에 휩싸여 가슴 답답한 하루를 보내야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한 정부 주관 광복절 기념식은 겉만 화려할뿐, 만세 삼창 소리에도 힘이 빠져 있었다. 반면 광복회 등 37개 독립운동단체가 서울 용산 효창공원 내 백범기념관에서 연 또다른 기념식장은 광복회원과 독립운동가 유족, 관련 기념사업회 및 단체 회원들의 만세 함성은 분노로 뒤덮였다. 1948년 이후 광복절 행사가 두 개로 쪼개져 개최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윤석열 정부의 비상식적인 인사와 대일본 정책이 빚어낸 분열상이다. 

국민의힘 호준석 대변인은 16일 한 방송에 출연해 “윤석열 대통령의 이번 8·15 경축사가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칭송했다. ‘역사에 기록된다’는 표현에는 동의하지만 그 이유는 정반대가 될 것이라고 필자는 단언한다. 광복절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날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이번 임기 3번째 경축사에서도 일제의 만행이나 역사를 퇴행시키는 일본 정부에 대한 비판이 없었다. 일본에 대한 언급은 단 두마디였다. “지난해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처음 일본을 넘어섰다”고 한 뒤 “일본과의 무역 격차도 역대 최저인 35억달러로 줄었다”고 했을 뿐이다. 자신감을 표현한 것은 좋지만, 최소한 선열에 대한 감사의 표시와 일본을 향한 책임 촉구는 있어야 했다. 오죽하면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이 “대통령의 경축사에는 일본이 없다. 참으로 이상하고 기괴한 일”이라고 했을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윤 대통령의 한반도 상황 인식과 통일관이다. 윤 대통령은 “광복은 자유를 향한 투쟁의 결실”이라면서 “한반도 전체에 자유 민주 통일 국가가 만들어지는 그날 비로소 완전한 광복이 실현된다”고 말했다. 자유를 북한으로 확장해 통일을 이루겠다며, 구체적인 방안으로 국내에서 자유에 대한 가치관 강화와 북한 주민의 자유 통일 열망을 촉진하기 위한 정보접근권 확대, 국제적 지지 확보를 위한 국제한반도포럼 설립을 제시했다. 

남한 정부의 공식 통일 방안은 1994년 8월 15일 김영삼 정부가 발표한 '민족공동체 통일 방안'이다. 남북 간 화해협력을 통해 상호 신뢰를 쌓고 평화를 정착시킨 후 통일을 추구하는 점진적·단계적 통일방안이다.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엄연히 흡수통일을 반대하고 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북한 체제 붕괴를 전제하면서 흡수 통일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래놓고 남북간 대화협의체를 제안하면서 어떤 논의든 하자고 했다. 북한 주민의 정보접근권 확대를 명분으로 대북전단 살포를 허용하고 대북확성기를 계속 틀겠다는 뜻도 분명히 했다. 이런 제안에 북한이 응할 리 없다. 대통령실은 이 방안이 그동안 변화한 남북관계를 반영해 보완한 것이라고 했지만, 윤 정부가 내세우는 자유주의 색채를 강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국민들에게 어떤 설명도 하지 않은 채 과거 정부의 통일 방안을 핵심부터 바꾼 것이다. 이건 국민 기만이다. 더구나 윤 대통령은 이날 자신을 비판하는 쪽을 향해 “가짜 뉴스에 기반한 허위 선동과 사이비 논리”라면서 “검은 선동세력”이라고 지칭했다. 자신과 다른 견해를 밝히면 “반자유·반통일 세력”이라고 몰면서 편가르기를 한 것이다. 아무리 다급해도 광복절에 할 말이 아니다. 윤 대통령은 과거부터 “보여주기식 남북 대화는 하지 않겠다”거나 “국내 정치에 대일 관계를 이용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자신이 이를 대놓고 어겼다. 

정부는 최근 일본의 사도광산 세계문화유산 등재 과정에서 일본측이 전시물에 조선인‘강제노역’을 명시하지 않았음에도 등재에 동의해줬다. 그래놓고 일본이 약속했다고 거짓말까지 했다. 독립운동가들보다 친일 세력을 더 높이 평가하는 몰역사적 인식을 가진 사람들을 잇따라 기용하고 있다. 고 백선엽 전 대장이 자서전에서 자신의 과거 친일 행각을 한 것을 사죄한다고 했는데, 그가 친일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독립기념관장으로 임명했다. 

박진 전 외교부장관은 “우리가 물잔을 먼저 채우면, 일본이 나머지 반 잔은 채울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거꾸로 가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같은 날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서 과거 한국을 포함해 아시아인에 가해를 가한 사실이나 그에 대한 반성의 뜻을 언급하지 않았다. 현직 방위상은 3년 만에 다시 신사를 참배해놓고 “한국과 협력을 강화하겠다”는 말까지 했다. 한국민으로서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다. 그런데 한국 외교부·국방부는 그저 해오던 대로 “시대착오적인 행위에 대해 개탄을 금할 수 없다”며 주한 일본대사관 총괄공사와 방위주재관을 불러 항의했다. 윤석열 정부의 정체성을 묻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하나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윤 정부는 이미 상식의 궤도를 벗어났다. 

일본과 우호 협력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 옳지만, 이는 엄연히 과거사에 대한 반성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한·미·일 연대를 강화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대일 정책을 이렇게까지 바꾸려면 시민들에게 설명하는 게 먼저다. 그게 정부가 취해야 할 기본적 태도이다. 시민의 뜻을 이렇게 무시한 정권은 없었다. 만약 윤 대통령의 대일 인식이 이런 정도일 줄 대선 때 알았다면 그를 찍지 않았을 시민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가 참여하는, 평소 정치적 발언을 허용하지 않던 단톡방마저 이번에는 난리가 났다. 나라의 근본이 흔들린다는 위기감이 시민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건 위험하다. 

이중근은 경향신문에서 34년 동안 기자로 일하고, 2024년 퇴직했다. 편집국에서 정치(정당·외교안보·총리실·중앙선관위·청와대), 사회(경찰·검찰), 국제부를 거친 뒤 논설실장·논설주간으로 경향신문의 논평을 책임졌다. 국가의 정책이 어떤 과정을 거쳐 수립되고 집행되는지를 관찰한 것을 소중한 경험으로 여긴다. 글의 무거움을 절감하며 정파적 보도를 지양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평범한 것을 비범하게 하자’는 게 '신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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