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You & Me & You' 서울 인사동 갤러리토포하우스에서 1월 4~15일

대학 시절부터 수묵(水墨)의 고유 장르를 고집한 스승들은 먹의 정신성을 강조하였지만 허준은, 먹은 검게 보이는 안료일 뿐이다고 생각했다.

수묵과 동양 미학의 정신세계에서 배우고 사유했으나 자신만의 틀 안에서 인식한 작품들은 극사실을 넘어 초극사실의 또 다른 미학의 세계를 펼친다.

전통을 잇는 산수화

허준 작가는 전통적인 수묵 담채로 작업한 2006년 첫 개인전 이후 산수화 시리즈 작업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설국1. 144×202cm 2014년
설국1. 144×202cm 2014년

크게 보면 단순한 구도와 형태를 지향하고 있으나, 작가 특유의 디테일이 스며있다. 기법뿐 아니라 화면 구성(composition)과 화폭이 담고 있는 콘텐츠 디테일이 돋보인다.

허준은 완벽하게 단순한 대상(모델)과 이미지를 찾지 못했다. 부분 이미지를 레고 조립하듯 그려나가 보자는 게 작업 방향이 되었다. 자신의 성향이 한국화의 전형화된 피마준(披麻皴) 등 ‘준법’(皴法)과는 맞지 않았다.

한 작품에 쏟는 정성과 테크닉은 집요할 정도이다. 꼼꼼한 자신의 성격과도 맞는다고 말한다.

모든 작품에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10여년전 작업의 모티프를 얻기 위해 자주 설악산을 오르던 1년 후배이자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과 그로 인한 충격이 컸다. 친구는 에베레스트 등정도 다녀올 정도의 진정한 ‘산 꾼’이었다. 그를 기억하기 위해 그림 <집으로 가는 길> 속 그의 무덤을 그려 넣었다.

집으로 가는 길 76×196cm 2014년
집으로 가는 길 76×196cm 2014년

산을 그릴 때 설악에 들었을 때의 공기와 한 눈에 들어오는 펼쳐진 산세 등을 기억하며 작업한다.

배경 및 여백은 모노톤의 아크릴을 사용하며, 형상은 먹, 마카 등 각종 필기구를 활용한다. 스스로 손이 느리다면서도 작업 밀도를 포기할 수 없다. 본격적인 시장 작가로서의 정착을 위한 고민이 있다.

부분적으로 작업한 에스키스는 작가의 역량이 집약되어 있으며 그 자체로 완성도가 높아 작품군에 포함시킬 것을 권했다. 

산수화에서 벗어나고자 작업한 게 ‘날개’와 나무 시리즈이다. 디테일은 더 정교해졌으며 치밀하다. 

날개, 자신을 지키다

2020년 전시, ’이것 저것 This And That'은 10여 년간의 산행 경험을 바탕으로 의식 속에 존재하는 기억의 풍경을 재조합해 만들어낸 산수 풍경 작품을 선보였다.   ‘사의적(寫意的) 직관력’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으로는 집안 형들에게서 느끼는 콤플렉스,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은 인간적 욕망, 무게를 누르는 가장의 책임감 속에서도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복잡한 내면의 생각들을 화폭에 담는 작업을 해왔다. (새의) 날개, 새장 이미지는 아주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운 설정일 수 있다.

The wing 110×110cm 2018년
The wing 110×110cm 2018년

자유, 희망, 비상, 탈피 등이 떠오르는 단어인 ‘날개’를 실체적인 새에 대입하였으나 정작 그려진 한쪽 날개는 꺾어져 있기도 하다.

<날개> 작품을 처음 접하고서는 작가의 광기를 보았다. 그 광기는 꿈과 탐미가 바탕이다. 붓으로 빛도 빛깔도 없는 음영(陰影)인 먹을 찍어 그리는 그의 행위는, 미친 외과의가 메스로 (하늘로 올라가야 할) 천사를 붙들어 날개를 드러내게 하는 거와 같다. <날개>를 그릴수록 천사의 숫자는 줄어든다.

날개마다 외눈박이 눈동자와 밀도가 높아 금속으로 보이는 해골이 어른거린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이문열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영화에서 살인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어떤 구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른바 추락하는 것에 날개가 있어 다시 비상할 수 있게 한다면 그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메시지다. 

1983년 크게 히트를 쳤던 조운파 작사 작곡, 허영란이 부른 <날개>는 희망과 좌절을 동시에 노래했다. 

일어나라 아이야 다시 한 번 걸어라 뛰어라 젊음이여 꿈을 안고 뛰어라
날아라 날아라 고뇌에 찬 인생이여 일어나 뛰어라 눕지 말고 날아라
어느 누가 청춘을 흘러가는 물이라 했나 어느 누가 인생을 떠도는 구름이라 했나

구사마 야요이(Kusama Yayoi, 1929~ )는 독특한 물방울 모양이나 반복적인 얼룩이 아로새겨진 늙은 호박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구사마의 예술은 덮쳐오는 정신병적인 불안한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는 행위로 알려진다. 

작가는 불안한 이미지에 엄습 당한 채로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자신을 지킨다.

허준은 불안정한 감정, 무기력증, 현실 탈출 욕구를 가장 자유로운 이미지인 날개에 대입하였다. 이미지의 재구축은 날개를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몰입의 단계를 건너뛰어 한때 매몰되었던 듯 하다.

2022년 3월 서울에서의 전시는 많은 번민의 시간들을 보내면서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 건지 원점에서 시작하는 의미가 있었다.

나무는 작가의 존재를 증언한다

나무 시리즈는 경기도 양평군 옥천에서 작업실까지 출퇴근하면서 특정 장소의 나무 등을 자주 관찰하고 참고하나 자신만의 해석으로 풀어낸 상상화이다.

작품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 살펴보면, 완전 상상도 아니고 구상도 아닌 게 된다.

45×45cm 종이에 혼합재료 2022년
45×45cm 종이에 혼합재료 2022년

모델이 된 나무를 상상으로 부분적으로 스케치한 형상을 어느 날 직접 마주하며 살펴보는데 맞아 떨어진 경우도 있다. 상상으로 그렸지만 ‘진짜 이런 나무가 존재하는구나’라며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숲에는 개성을 지닌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모여 하나의 조화를 이룬다. 

숲이나 군락에서 떨어져 나온 나무 하나하나는 좌우, 앞 뒤 균형을 이루어야 비바람에 쓰러지지 않고 잘 자란다. 이는 새의 양 날개와 같은 의미의 도상이기도 하다.

헐벗은 산하에 외떨어진 나무는 주변의 환경으로 인해 더 헐벗어 보인다. 악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한 생명력을 필요로 한다. 허준의 나무는 주변이 생략되어 있다. 장식화된 모습이다.

91×116cm 종이에 혼합재료 2022년
91×116cm 종이에 혼합재료 2022년

하나 하나의 나무에 또 다른 생명(인격)을 부여하고 마치 현재의 모습과 가장 빛나던 시절을 기억해 내어 초상화를 그리듯, 이 시대를 살았다는 증명사진으로 기록하듯 이미지를 연출했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 1992)을 비평한 <감각의 논리. 1984>(1990년대 번역)를 펴냈다.

들뢰즈는 베이컨의 그림들에서 리듬을 발견해, 리듬과 감각의 관계를 통해 보이지 않는 힘, 긴장감이 눈으로 만지는 공간을 만들어 냈다고 본다. 관객은 그러한 감각을 눈으로 호흡한다.

허준은 관객이 느껴야 할 작품과의 사이 공간의 리듬을 없애 버렸다. 나무는 볼륨감 없이 평면에 떠 있다. 마치 크리스마스 시즌에나 볼 수 있는 화려한 나무들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이다.

91×58cm 종이에 혼합재료 2022년
91×58cm 종이에 혼합재료 2022년

허준의 나무 그림은 최광호의 연속 사진처럼 생명의 끈을 놓은 듯 하지만 역순으로 보면 죽음에서 삶으로 귀환도 가능하다는걸 보여준다. 소멸과 시작은 동일선상에 있다.

나무는 양평을 매일 지나다니는 허준 작가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CCTV와 같은 증거로서, 또는 오래 전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검문소의 헌병처럼 등장한다.

일상적인 존재나 사물들로부터 얻는 동질감이 작업의 모티프가 되었다. 작가 자신을 서 있는 나무인 대상들과 혼합해 넣은 듯 하다.

허준 작가는 남농 허건(南農 許楗, 1908 ~1987) 의 손자이며 장손 허진 작가와는 사촌간이다. 허진이 회화과를 선택한 반면 허준은 집안의 맥을 이어 동양화과를 선택했다. 

허준은 서울 인사동 미술축제인 '2023 인사아트위크'에 참여하는 갤러리 토포하우스에 <You & Me & You>를 타이틀로 한 전시에 20여점을 출품한다. 기간은 1월 4~15일이다.

심정택은 쌍용자동차, 삼성자동차 등 자동차회사 기획 부서에서 근무했고 홍보 대행사를 경영했다. 이후 상업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50여회의 초대전, 국내외 30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한 14년차 미술 현장 전문가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칼럼을 써왔고, 최근에는 미술 및 건축 칼럼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저서로는 '삼성의몰락', '현대자동차를 말한다', '이건희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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