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년이 되기 전 가족 내 어른들 다음으로 가장 많이 보며 자란 어른은 학교의 선생님일 것입니다. 초등학교부터, 또는 더 일찍인 유치원 때부터 우린 우리를 가르치는 사람을 선생님이라 부르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1년에 하루 선생님을 위한 날인 5월 15일은 선생의 날이라 안 부르고 지금까지도 스승의 날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왠지 고어 같은 스승이라는 말은 선생보다 의미도 크고 높아 보여 선생보다 더 위에 계신 분처럼 들립니다. 사전적 의미도 선생은 가르치는 것에 국한하나 스승은 좋은 길로 인도까지 하는 사람으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학과만을 가르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역사적으로 특정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다다른 분을 가리켜서는 스승보다는 주로 선생으로 부르곤 합니다. 율곡 선생, 퇴계 선생, 안창호 선생, 김구 선생 등처럼 말입니다. 스승 위에 또 선생인가요? 그리고 왠지 문어체로 더 품격 있어 보이는 스승은 순수 우리말이고, 구어체로 더 편해 보이는 선생(先生)은 한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알쏭달쏭하고 복잡한 선생이고 스승입니다. 하지만 선생이든 스승이든 그들은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우린 그들로부터 배움을 받아 때론 존경심까지 표한다는 측면에선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지난 12월 중순 저는 제주도를 다녀왔습니다. 남자들 사이에서도 친정이라 부르는 첫 직장 동료들과 겨울 댓바람이 불어 순식간에 감행한 여행이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란 공감대가 형성이 되었나 봅니다. 사실 첫 입사한 광고대행사 오리콤에 끝까지 붙어있지 못해 중도에 다른 회사들로 이직하고, 또 시간이 흘러 이순을 코앞에 둔 지금, 이렇게 뒤늦은 여행을 감행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일 것입니다. 흔히 사회친구는 사회라는 말에서 연상되듯이 동네친구나 학교친구와는 다른 친구로 자리 잡고 있는데 우린 그렇지 않았나 봅니다. 학교의 사회 과목 시험에서 사회친구를 공동사회(Gemeinshaft)에 속하는지, 이익사회(Gesellshaft)에 속하는지를 묻는 문제가 나온다면 이 답은 매우 혼돈스러울 것입니다. 아무튼 아름다운 제주에서 우린 진짜 학교의 수학여행 같은 일정을 소화했습니다. 네 명이 모였음에도 그 많은 제주의 골프장을 모두 패스하면서 말입니다.

미술관으로는 본태 미술관과 김창열 미술관을 갔습니다. 두 곳 다 무료 아니고 유료인데 그곳을 남자 넷이 일부러 찾아갈 정도로 우린 제주에서 호모아티쿠스(?)로 변신해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 먼저 등정한 군산오름의 신령한 기운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나 봅니다. 그리고 그 두 곳 중 한 곳인 저지리 예술인 마을에 위치한 김창열 미술관에서 이 글이 발아했습니다. 온통 물방울 천지인 그곳에서 전 작가에도 놀라고 작품에도 놀랐지만 그의 이력에서도 놀라서 그랬습니다. 바로 '맹산(孟山)'이란 지명이었습니다. 제가 숱하게 들어온 맹산, 김창열 화백이 그곳 맹산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북 출신의 실향민이 즐비한 우리나라에서 평안남도에 소재한 그의 고향에 놀랄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만은 제겐 맹산이 특별한 지명이기에 그랬던 것입니다. 제가 몰랐던 지명인 맹산을 각인시켜준 분, 그분의 고향도 맹산이라 그랬습니다. 제주의 맹산이란 두 글자에서 퍼뜩 제가 떠올린 그분, 그는 바로 김동길 선생님이었습니다.

고 김동길 박사, 1928. 10. 2 ~ 2022. 10. 4

김동길 선생님은 지난 10월 4일 유명을 달리하였습니다. 당시 빈소는 그가 생전에 살았던 누나 집인 고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의 집 마당에 지은 김옥길 기념관에 차려졌습니다. 평생 미혼으로 살아 후사가 없음에도 역시 예상대로 각계각층의 많은 인사들이 그의 빈소를 찾아와 애도를 표했습니다. 94년, 길다면 긴 인생 동안 이런저런 많은 족적을 남겨서 그랬을 것입니다. 저는 그의 사망 직후부터 지금까지 그와는 길지 않은 인연이었지만, 그래도 그와 관련된 글을 쓸까 말까를 고민해왔었는데 김창열 미술관에서 본 맹산이라는 지명에서 이렇게 쓰기로 마음을 굳히고 지금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2022년이 다 끝나가는 12월의 마지막 주에 말입니다.

본래 저는 김동길 선생님과 아무 연이 없었지만 일부러 그를 찾아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처음 봤을 때의 인상이 강해 그것이 동기가 되고, 거기에 다른 연까지 겹쳐서 태평양인문학교실의 출입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 교실은 그가 1991년 설립한 사단법인 태평양시대위원회 산하의 인문학교실입니다. 오늘 이 글은 그때 제가 받은 그의 첫인상에 대한 글입니다. 이렇듯 첫인상은 세상의 인상 중 가장 강한 인상인가 봅니다. 제가 멀리서나마 그를 처음 본 것은 그가 87세일 때 당시 저의 광고주였던 CEO 교육기관인 세계경영연구소(IGM)의 조찬 모임에서였습니다. 장충동에 소재한 앰배서더 호텔에 250여 명이 모인 그날 아침 김동길 선생님이 강사로 초빙되어 그곳에 왔습니다. 햇수는 기억 못 해도 그의 나이를 기억하는 것은 당시 그가 그렇게 본인을 소개한 기억이 또렷이 살아있어서 그렇습니다. 요즘 논란이 되는 우리 나이였겠지요. 강연 제목은 <시와 인생>이었습니다.

그의 첫인상이 강했다는 것은 일단 그때도 그는 노령으로 인해 걸음이 불편해 부축을 받고 강단에 올라서 의자에 앉아 강의를 하였는데, 신기하게도 강의 부교재가 없었습니다. 책상 위엔 종이 한 장 없었고, 전면 스크린 화면에도 그 어떤 글자나 이미지가 띄워있지 않은 채 꺼져 있었습니다. 오직 구술로만 강의를 진행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간 여러 강의를 들어왔지만 당시와 같은 그런 강연은 처음이었습니다. 당시 제 속에선 "무슨 예수나 공자도 아니고.."란 생각이 언뜻 스쳐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제가 제대로 놀란 것은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저의 관점에선 아래 세 가지 부분에서 그랬습니다.

연세대 재직 시 2천 명이 넘는 학생의 수강 신청으로 강당에서 수업을 진행했던 명강사 김동길 교수

첫째로 오전 7시 30분에 시작한 강의는 9시까지였는데, 사실 그간 그 시간을 정확히 채운 강사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대개 1시간 정도를 하고 남은 시간을 질의 응답으로 채우곤 했는데 김동길 선생님은 9시가 되어도 끝나지 않고 오히려 주최측에 시간 연장에 대한 가능 여부를 묻더니 15분을 더한 9시 15분에 강의를 마치었습니다. 쉼 없는 스트레이트로 가볍게 100분을 돌파한 열강이었습니다. 바로 전 부축을 받으며 강단에 올라간 그의 모습이 무색할 정도의 노익장을 보여준 것입니다. 놀라운 체력입니다.

둘째로는 강의 내용이었습니다. 올드 앤 와이즈라고 그의 삶에서 체득한 경험이 주가 되는 강의가 이어질 줄 알았는데 김동길 선생님은 진짜 대학 강의를 하듯 <시와 인생> 주제에 적합한 아카데믹한 강의를 하였습니다. 그것도 한국, 중국, 영국 등을 오가며 그의 스승인 함석헌의 시, 삼국지의 위인 조조의 한시, 그리고 영국의 로버트 브라우닝과 알프레드 테니슨 등의 영시가 줄줄이 이어졌습니다. 물론 부교재가 없으니 모두 암송으로 그 시들을 들려주었습니다. 저의 선입견이 깨졌습니다. 저는 암기라는 것은 나이가 있다고 믿어 오며 제가 성인이 된 어느 시점부터 암기가 안 되는 것을 당연시하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는데, 김동길 선생님을 보니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양한 언어로 쓰인 그 많은 시들을 초중고 시절 다 외웠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물론 인생의 대선배로서 그 시들과 연계된 의미 있는 이야기들도 그 특유의 화법으로 재미있게 전달해주었습니다. 선생이나 스승은 학생이나 제자보다 나은 탁월함으로 가르치는 사람인데 그는 그날 틀림없는 선생과 스승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놀라운 지력입니다.

마지막으론 이건 좀 과외의, 그리고 저만의 놀라움일 수도 있겠지만 김동길 선생님은 그날 강의 중 정치 이야기를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마이크가 주어졌고 나름 리더층 군중 250여 명이 그의 앞에 있었음에도 그는 정치엔 침묵했습니다. 앞에 수업을 듣기 전 저는 지레 그가 틀림없이 정치 이야기를 꺼낼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렇게 허를 찔린 것이었습니다. 100분도 넘어가는 긴 시간 동안 그는 오롯이 강의 주제인 <시와 인생>으로만 그 시간을 채웠습니다. 학자이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정치인이기도 했고, 그 당시 보수 논객으로 TV 종편 프로에 거의 매일 출연하다시피 한 그인지라 더욱 그럴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는 그렇게 그 시간을 잘 참고(?) 문사철 박사의 모습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학문적 수준과 인생에 대한 식견만 본 그와의 첫 대면이었습니다. 저는 이것도 인내력이라 하겠습니다.

영문학, 역사학, 철학 전공으로 평생 80권이 넘는 다양한 책을 쓴 김동길 선생님

제가 제주의 김창열 미술관에 전시된 김창열 화백의 작품에서 놀란 것은 물방울에서 그가 추구하는 아트의 세계보다는 그 많은 물방울을 어쩌면 그렇게 손으로 다 정교하게 그렸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김동길 선생님의 학문에선 그 많은 명징한 암기에 놀랐듯 김창열 화백의 예술에선 그 많은 정교한 붓질에 놀랐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물방울에 어린 시절 조부에게 익힌 천자문 타이포그래피까지 더해 후기 작품에선 자연과 문명의 결합까지 시도하였습니다. 그의 미술관에서 그의 영롱한 물방울을 직접 대면하니 왠지 물감을 화폭에 페인트 뿌리듯 마구 뿌려댄 현대 미술의 거장 잭슨 폴록의 작품이 참으로 쉬어 보이게 느껴졌습니다. 아마 잭슨 폴록이 김창열 화백의 그림을 직접 보았다면 화폭에 물감 대신 물을 뿌린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할 정도로 그의 물방울은 원소 H2O로서 견고하고 정교해 보였습니다. 이렇게 범부인 하수는 학문과 예술의 본질보다는 울타리 밖의 가장자리에 더 놀라곤 합니다. 김창열 화백은 1972년 캔버스에 첫 물방울을 떨어트린 이후 죽기 전까지 무려 49년 간 지독하고 집요하게 물방울만 그렸습니다.

맹산이 낳은 두 거장은 활동한 생존 연도도 비슷합니다. 김동길(1928~2022) 선생님이 김창열 화백(1929~2021)보다 1년 먼저 태어나고 1년 늦게 사망하였으니 두 분은 완전 동시대 동향인입니다. 이런 두 사람인지라 어떤 큰 인연이 있을 법도 하지만 그 기록은 잘 찾아지지 않았습니다. 마치 17~18세기 동시대 독일에서 같은 국적으로 서로 멀지 않은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바흐와 헨델이 평생 한 번도 못 만나고 죽은 것처럼 말입니다. 어린 시절 소학교 시절 공부를 잘했던 김창열이 맹산의 그 학교에서 늘 1등을 했었는데, 그 학교로 전학을 왔다 얼마 안 있다 다시 전학 간 어린 김동길에게 그때만 1등을 빼앗겼다는 이야기만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습니다.

제주 저지리 김창열 미술관의 김창열 화백 동상.
제주 저지리 김창열 미술관에 있는 김창열 화백 트레이드 마크인 물방울 작품.
제주 저지리 김창열 미술관에 있는 김창열 화백 트레이드 마크인 물방울 작품.

태평양인문학교실에 와서는 김동길 선생님이 그의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진행했던 강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약 2년에 걸쳐 매달 한국의 근현대사에 족적을 남긴 위인들에 대한 그의 강의였습니다. 김옥균, 안중근, 이승훈, 김구, 조만식, 이상재, 이승만, 안창호, 최현배 등이 그의 강의 리스트에 있었습니다. 역시나, 그리고 언제까지나 모든 강의는 말씀으로만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게 늘 빈 몸으로 나타난 그였습니다. 이후로 선생님은 건강상의 이유로 산발적으로 특별한 날에만 교실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곤 강의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선생님은 그가 몸담았던 모교 연세대학교를 떠난 후에도 당신의 몸이 허락하는 한, 그리고 당신의 정신이 살아있는 한 끝날까지 후학들에게 배움을 주다가 그가 손수 지은 교실을 졸업하였습니다.

올해 2월엔 최고의 문화인 이어령 선생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후에도 유작으로 남겨진 그의 한국인 이야기는 계속해서 책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또 분야는 다르지만 매주 온 국민에게 웃음을 선사한 희극인 송해 선생님도 6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10월에 김동길 선생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생에 80권이 넘는 책을 저술한 선생님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2022년 한 해 우리 사회의 어른이라 할 수 있는 선생님들을 잃었습니다. 살아있던 문화적 사회 자산이 이승에서 저승으로 빠져나간 것입니다. 한 시대가 이렇게 가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분들의 생전 자산은 사후 유산으로 남아 후대로 이어질 것입니다. 당장은 새해인 2023년도로 말입니다.

태평양인문학교실에서의 김동길 선생님 수업(2018. 9). 마지막 수업은 이후 한번 더 강단에 선 2019년 1월 김옥길 기념관 수업.
태평양인문학교실에서의 김동길 선생님 수업(2018. 9). 마지막 수업은 이후 한번 더 강단에 선 2019년 1월 김옥길 기념관 수업.

※ 지난 10월 4일 김동길 선생님 사망 시 태평양인문학교실에서 추모 영상을 제작하였습니다. 영상 구현이 불가하여 그 안에 있는 추모시만을 발췌합니다.

눈을 뜨기 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으셨나 봅니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지그시 감기곤 했던 당신의 눈이 꼭 감겼습니다
         
평생 나비 넥타이만 고집하시더니
그것 떼어 내
진짜 나비가 되어 날아가셨습니다  
       
가시는 길
철조망 너머 고향 맹산 들르시고
어린 시절 평양 구경도 하고 가십시오
          
이윽고
하늘 열리고 천사의 나팔 소리 들리니
가볍게 훨훨 올라가십시오
당신이 믿던 그 신이 계신 곳으로
       
보고픈 어머니와 누님도 계신 곳
아이처럼 살포시 품에 안기세요
          
존경하는 스승 함석헌과 백낙준도 계신 곳
청년처럼 와락 안아드리세요  
       
술 빚을 진 시인 천상병도 계신 곳
허허 하며 등 두드리며 웃겠지요
     
아, 링컨 대통령도 뵙겠네요
당신이 닮고파하던 역사의 거인
    
선생님의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이 끝났습니다
94년 걸린 일입니다
        
물려줄 게 참으로 많으신 분..

시신은 연세대에
살던 집은 이화여대에

그렇게 마지막 한 터럭까지
다 주고 가셨습니다
                  
석양에 홀로 서 계셨던
당신이 벌써 그립습니다

하광용은 대학 졸업 후 오리콤, 이노션 등에서 광고인 한 길로만 가다가 50세가 넘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세상사 이때 저때, 이곳 저곳, 이것 저것, 이사람 저사람에 대한 인문학적 관심이 많다. 박학다식한 사람은 깊이가 약하다는 편견에 저항한다. 그래서 그는 르네상스적 인간을 존경하고 지향한다. 박학과 광고는 어찌보면 ‘넓다’라는 측면에서 동일성을 지닌다. 최근 ‘지명에서 이순으로의 기행’이라는 인문교양 에세이집을 출간한 그는 태평양인문학교실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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