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크리스마스.. 한 여름과 한 겨울이 붙어 있는 이 말은 언필칭 어울려 보이지도, 공감을 얻어내기도 힘든 단어의 조합으로 보입니다. 이 타이틀을 쓰는 지금 전 과거 어렸을 때 신문의 해외 토픽란에서 본 한 컷의 사진도 함께 떠올립니다. 12월 이맘때쯤 보았을 것입니다. 사진의 배경은 오스트레일리아의 파란 바닷가로 해변에서 젊은 남녀들이 수영복 차림으로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쳐대며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모습이었습니다. 사진은 말을 못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그들은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그렇게 외치고 있는 듯했습니다. 해외 토픽란에 실릴 정도로 화려하고 짧은 수영복에 많은 몸을 노출한 그들에게서 크리스마스를 느끼게 해 준 것은 머리에 쓴 산타 모자가 전부였습니다.

당시 어린 마음에 그것을 본 저는 꽤나 놀랐습니다. 제 머릿속에 있는 크리스마스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기에 그랬습니다. 눈 내리는 고요하고 거룩한 밤에 갓난아기 예수 그리스도와 할아버지 산타클로스가 오버랩 되는 것이 당연한 크리스마스인데 그런 수영복 차림의 크리스마스라니요? 굳이 제목을 달자면 8월의 크리스마스일 것 같은 그 정경은 그래도 그들에겐 정상적인 12월의 크리스마스였습니다. 지구의 신비가 만든 다운 언더의 별난 크리스마스입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그러함에도 우리 귀에 매우 익숙하게 들립니다. 말을 해도 입에도 착 붙습니다. 그래서인가 그 크리스마스는 어디엔가 진짜로 있을 것만 같은 크리스마스처럼 들립니다. 아마도 그것은 1998년 당대 최고의 청춘 스타인 한석규 씨와 심은하 씨가 출연한 동명의 영화에서도 기인할 것입니다. 그런데 허진호 감독이 연출한 그 <8월의 크리스마스>는 그 이전에 일본의 유명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먼저 경험한 크리스마스이기도 합니다. 그 영화 개봉 12년 전인 1986년에 그가 쓴 수필의 제목이 <8월의 크리스마스>였으니까요. 두 작품 간의 상관성은 잘 모르겠으나 확실한 것은 8월의 크리스마스는 영원히 오지 않는 크리스마스라는 것입니다.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것이지요. 기쁘다 구주 오신 크리스마스가 들어간 <8월의 크리스마스>가 어감은 발랄해 보여도 내용은 심오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이유입니다.

2013년 재개봉한 1998년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2013년 재개봉한 1998년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음악 마니아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8월에 크리스마스 캐럴 음반을 사며 고민에 빠집니다. 그 음악을 12월에 들을지, 안 들을지도 모르는데 선뜻 8월에 사는 것이 불합리해 보여서 그렇습니다. 설사 귀한 음반이거나, 가격이 싸더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크리스마스가 과연 그가 그런 구매 행동을 할 정도로 의미 있는 것인가라는 원천적인 고민까지 합니다. 눈 내리는 12월엔 팍 와닿는 크리스마스가 폭양이 내려 쬐는 8월엔 와닿지 않아서 그럴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살까, 말까를 고민하는 그의 심경을 '망설임의 바다'에 놓여있는 것이라고 그의 <8월의 크리스마스>에 썼습니다. 그러함에도 주저하는 것은 막상 12월이 되었을 때 "그때 살 걸"하며 후회를 한 경험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시즌이 되어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살아나면 그의 감흥도 살아날 테니 말입니다. 8월엔 보이지도 않고, 볼 수도 없는 크리스마스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살면서 흔히 겪는 경험일 것입니다. 그 중심에 놓인 것이 꼭 크리스마스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First of May, 5월 1일을 가리키는 이 날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메이데이이니 노동자의 날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크리스마스 시즌입니다. 전 지금 크리스마스를 열흘 앞두고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밖엔 눈도 오고 기온도 급강하해서 겨울의 정수를 느끼면서 말입니다. 크리스마스 영화와 수필에 이어 이번엔 노래입니다. <First of May>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3형제 가수인 비지스의 대표곡입니다. 제목을 듣는 순간 벌써 첼로로 시작되는 그 노래의 유려한 멜로디가 귀에 나지막이 울려 퍼지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노래에 유독 익숙한 제 귀는 지금 그렇게 오디오가 지원이 되고 있네요. 과연 제목만큼이나 아름다운 5월의 노래입니다. 하지만 멜로디 속 가사로 들어가면 이 노래는 계절의 여왕인 5월보다는 12월 크리스마스의 노래입니다. 그렇다면 이 노래도 왠지 <8월의 크리스마스>만큼이나 슬픈 사연이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듭니다.

비지스의 6집 더블 앨범에 수록된 'First of May', 1969

<First of May>의 크리스마스엔 크리스마스 트리가 등장합니다. 그 트리는 아이와 어른의 세계를 구분하는 경계선입니다. 정확히는 그 높이가 그렇습니다. 크리스마스 트리보다 키가 작았을 땐 아이의 세계이고, 그것보다 키가 크면 어른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오롯이 화려한 오색등으로 빛나는 크리스마스 트리로만 보이지만 그것보다 키가 작았을 때는 세상 모르고 사는 꿈 많고 행복한 아이의 세계이고, 그 높이를 추월하는 순간부터는 만만치 않은 어른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산처럼 생긴 그 트리가 보호막인 것처럼 그 아래서 아이는 보호받고 살다가 이후 보호막이 걷혀진 세상에 던져진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아이는 어른이 되어 고해와도 같은 사바세계에서 거친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결국 그 트리 아래서 손가락을 걸며 약속했던 그 아이와의 첫사랑도 깨지게 됩니다. 바로 그날, 그래서 매년 그 슬픔에 눈물짓는 날이 바로 5월의 크리스마스인 5월 1일인 것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난 크리스마스 트리보다 키가 작았고 그 아래 세상에 살았습니다. 어느 날 내 키는 크리스마스 트리보다 커졌고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마치 아이의 성장 일기처럼 들리는 <First of May>의 스토리입니다. 이 노래처럼 비지스는 많은 팝송 가수들 중 우리 한국인의 정서에 꽤나 가까운 노래를 부른 가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적어도 디스코 열풍에 맞춰 발매한 <Saturday Night Fever> 이전까지의 노래들은 그랬습니다. <Massachusetts>, <Holiday>, <To Love Somebody>, <Don't Forget to Remember>, <Words>..  어딘가 슬픔이 묻어나는 듯한 감미로운 음성과 화음으로 슬로 풍의 서정적인 발라드를 주로 불렀던 그들이었습니다.

'First of May' 노래에서 아이와 어른의 경계로 등장하는 크리스마스 트리 (출처, pixabay)
'First of May' 노래에서 아이와 어른의 경계로 등장하는 크리스마스 트리 (출처, pixabay)

우리에게도 비지스처럼 허무하게 무너진 5월을 슬퍼하며 노래한 시인이 있었습니다. 김윤식이라는 본명보다 영랑이라는 아호로 더 알려진 그의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시인은 그렇게 슬퍼하였습니다.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모란은 뚝뚝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린 그날,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동시에 뻗쳐 오르던 보람까지 서운하게 무너졌다"고 하며 "모란이 진 그날 하루 때문에 한 해가 다 가서 1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하게 운다"고 하였습니다. 영랑이 눈물까지 보인 그날은 <First of May>의 주인공이 탄식하던 5월 1일과 같은 날일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서 어린 시절부터 고이고이 아름답게 키워왔던 사랑이 모란처럼 바닥에 떨구어진 날입니다. 그들에게 5월의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찬란한 슬픔의 봄이 되었습니다.  

예견되었듯이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도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남자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크리스마스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진 않지만 그 시기라는 것을 암시는 합니다. 하지만 그 시즌에 떠나간 남자(정원-한석규)는 죽어가며 꼭 불행하지만은 않은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의 고백과도 같은 독백에서 보듯이 여자(다림-심은하)의 사랑을 확인했고, 그럼으로써 그가 운영하던 사진관의 사진들처럼 지나간 추억이 될 줄 알았던 사랑을 그가 간직한 채로 죽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진심을 알았는지 여자도 남자가 그 사이 전시해놓은 사진관 안 그녀의 사진을 보고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돌아섭니다. 묵직한 카타르시스가 그녀에게 일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영화 중반 흘러나왔던 산울림의 노래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가 한 번쯤은 더 나왔어도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다림-심은하)의 사진이 걸린 그(정원-한석규)의 사진관 앞에 선 그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엔딩 장면 (출처, 네이버 영화)
그녀(다림-심은하)의 사진이 걸린 그(정원-한석규)의 사진관 앞에 선 그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엔딩 장면 (출처, 네이버 영화)

비지스의 <First of May>에서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서 맺어진 첫사랑은 어느 5월에 깨졌지만 이후 새로운 사랑이 멀리서 왔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노래의 맥락 상 어른이 되어 맺어진 그들의 새로운 사랑도 크리스마스 시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또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도 그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며 지난 8월에 고민 끝에 사놓은 캐럴을 순차적으로 들을 생각에 기쁨과 흥분에 들떠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렇듯 12월의 크리스마스는 1년 간 이런저런 막힌 사연을 가진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축복의 날이 됩니다. 크리스마스를 대표하는 영화인 <러브 액츄얼리>에서 여러가지 사연을 가진 다양한 커플들의 사랑이 12월의 크리스마스를 기해서 다 이루어지듯이 말입니다. 과연 전 세계인의 축일 크리스마스입니다. 크리스마스가 1년의 마지막인 12월에 있어서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Merry Christmas & Happy Ending!  

하광용은 대학 졸업 후 오리콤, 이노션 등에서 광고인 한 길로만 가다가 50세가 넘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세상사 이때 저때, 이곳 저곳, 이것 저것, 이사람 저사람에 대한 인문학적 관심이 많다. 박학다식한 사람은 깊이가 약하다는 편견에 저항한다. 그래서 그는 르네상스적 인간을 존경하고 지향한다. 박학과 광고는 어찌보면 ‘넓다’라는 측면에서 동일성을 지닌다. 최근 ‘지명에서 이순으로의 기행’이라는 인문교양 에세이집을 출간한 그는 태평양인문학교실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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