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하는 전태일.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화면)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하는 전태일.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화면)

“배가 고프다”
전태일 열사가 죽기 직전 했던 마지막 말이다. 분신 하루 전날 저녁에 국수 한그릇을 먹고는 그 다음날 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분신을 하고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하는 과정에서 이미 입과 호흡기 등이 모두 불로 인하여 기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는 먹을 수가 없었다. 참된 노동자들의 세상을 꿈꾸기 위해 목숨을 걸고 그 스스로가 불기둥이 되었던 그는 살아 생전에도 배고픔으로 고통스러워 하였고 죽는 그 순간까지도 배고품 속에서 숨을 거두어야 했다. 이 얼마나 비참한 노동자의 모습이었는가?

오늘 다시 전태일과 같이 분신하는 노동자가 나타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문재인 정부에서 주 52시간의 노동을 법제화하여 운영하고 있는데, 윤석열 정부가 갑작스럽게 주 65시간, 아니 80.5시간까지 노동하게 할 수 있는 법안을 만들고 있다. 한국 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개혁을 하겠다고 하는 것이라는데, 참으로 어이없다. 철저하게 자본가들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고, 전두환 노태우 시대도 아닌 1970년대 유신 시대의 노동 현실로 돌아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청년 전태일.
청년 전태일.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저녁이 있는 삶’을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장기간의 노동보다 가족들과 함께 ‘저녁이 있는 삶’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 많은 노동자들의 피땀으로 벌어들인 국가 소득을 국민을 위한 복지로 전환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가 시작된 후  천공 스승이라 불리는 자의 지시에 의한 것인지 알순 없지만, 집권 주도층들의 노동과 노동자들에 대한 인식이 천박해지고, 이러한 인식 때문에 노동정책은 날로 후퇴하고 있다. 노동자들과의 대화나 타협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국가의 힘에 의한 폭력적 태도로 짓누르려고 한다. 

이러한 강압은 노동자들의 저항을 부르게 되어 있다. 이는 역사의 필연이다. 노동자의 저항을 힘과 폭력으로 막으려 하겠지만 어찌 거대한 불평등과 불공정을 타파하려는 민주주의 소망을 막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이번 주 글에서는 우리 역사에서 노동자의 저항이 얼마나 무서운 불화살인지를 알려주는 전태일 열사의 투쟁과 저항을 통해 지금은 비록 어렵지만 반드시 불평등 불공정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고 싶다.

전태일 평화시장으로 가다 

‘영화 전태일’에서 진한 눈물을 흘리게 하는 장면이 하나 있다. 어린 소녀 미싱사가 피를 토하는 장면이다. 그녀는 피를 토하면서 입과 손에 묻은 피를 닦을 물이 없다고 울부짖었다. 이 장면은 내게 충격으로 와 닿았다. 정말 그랬을까? 나는 2000년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어린이를 위한 <전태일 전기>를 쓰기 위해 전태일 기념사업회를 다니면서 그러한 상황이 현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비극이었다.

동대문 일대 경제 기반의 한 축이던 평화시장의 재봉 작업장들은 대부분 유리창도 없었다. 지금 같은 환풍 시설은 아예 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작업장의 중간 부분에 나무판으로 칸막이를 하여 2층 다락방을 만들어 재봉 기계를 설치하였다. 옷을 더 많이 만들기 위해서였다. 작업장의 높이가 1.5m 정도이니 일어설 수가 없었다. 견습공과 미싱사는 아침에 출근하여 재봉틀 앞에 앉으면 낮 1시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잠시 허리를 펴게 되고, 앉은 자리에서 점심을 빨리 먹고 퇴근할 때까지 허리를 구부리고 일을 해야 했다. 상상할 수 없는 고통스런 삶이었다. 미싱사들은 손가락 끝이 달아서 지문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박노해 시인이 말한 주민등록증을 만들기 위해 인주를 묻혀 지문을 찍어도 지문이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전태일이 일하던 재봉작업장.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화면)
전태일이 일하던 재봉작업장.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화면)

작업장에 창문이 없으니 미싱을 돌리면서 나오는 옷감의 실먼지들은 모두 어린 여공(여성 노동자)의 입과 폐로 들어갔다. 몇 년이 지나면 이곳에서 일하는 여공들 대부분은 폐결핵에 걸리고 만다. 지방에서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던 어린 소녀들은 가혹한 작업장 환경과 14시간 이상의 노동에 끝내 몸을 망쳐 죽거나 아니면 폐인이 되어 고향으로 내려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전태일은 16살에 평화시장에 재봉사 견습공, 일명 시다로 들어갔다. 1948년 8월 24일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노동운동을 했다는 아버지는 사업 실패로 인한 울화병으로 가족들에 대한 폭력이 컸다. 건강이 좋지 못했던 어머니 이소선은 아버지 대신 온갖 어려운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식모살이를 갔다. 

어머니가 없는 집에서 가출한 전태일은 어린 동생 둘을 데리고 서울로 왔다. 오늘의 초등학교에서 해당하는 고등공민학교만 졸업한 전태일이 서울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구두닦이와 비닐 우산 장수 등이었다. 자신이 입고 있는 겉옷을 팔아 구입한 구두통을 동네 깡패들에게 빼앗기고, 사과 상자로 얼기설기 만든 잠을 잘수 있는 공간은 누군가에 의해 부서졌다. 그러니 살길이 막막했을 것이다. 어린 여동생을 고아원에 맡기고 남동생 태삼과 죽을 힘을 다해 살았다. 자신의 여동생을 고아원에 맡길 때 그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반드시 찾으러 오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그 약속이 이루어질지 본인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여동생까지 고아원에 맡긴 전태일은 더 이상 날품팔이 일을 하지 않고 정식 직장을 구하기 시작했다. 동대문에서 우연히 본 평화시장의 재봉사 보조를 구한다는 안내 전단을 본 후 그는 곧바로 평화시장으로 달려갔다. 

재봉사 견습공이 된 전태일은 한 달에 1,500원의 월급을 받기로 했다. 당시 전태일이 숙박했던 하숙집의 하루 하숙비가 120원이었으니 1,500원으로는 전태일의 한달 생활비가 어림도 없었다. 그래도 전태일은 이 일을 하기로 하였다. 모자라는 돈은 아침 일찍 여관에서 손님들의 구두를 닦고, 밤에는 껌과 휴지를 팔았다. 뼈가 휠 정도로 힘들었지만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모든 것을 참을 수 있었다.

당시 찻집에서 커피 한잔은 50원이었다. 14시간의 노동에 커피 한잔 값밖에 안 되는 일당 50원, 너무도 작은 임금이었지만 태일은 열심히 일해서 가족을 찾고, 고학으로 대학교까지 마치겠다고 생각하였다. 전태일은 성실히 생활하여 미싱 보조를 거쳐 1966년 가을 통일사라는 회사에 어린 아이들 막바지를 만드는 미싱사로 취직하게 되었다. 미싱사 보조에서 미싱사가 된 것이다. 그리고 기술과 성실성을 인정받아 몇 년이 지난지 않아 재단사까지 승진했다. 그리고 어머니도 다시 만나 작은 판자집을 구해 살기 시작했다. 

서울 청계천에 세워진 전태일 동상.
서울 청계천에 세워진 전태일 동상.

가혹한 노동 현실과 착한 재단사 '전태일'

재단사는 공장 주인을 대신하여 어린 여공들에게 더 많은 옷을 만들게 윽박지르는 일도 해야 했다. 당시 평화시장 재단사들 대부분이 그렇게 여공들을 윽박지르며 일을 하였다. 본인 스스로도 노동자이면서 더 가엽고 힘없는 이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예전 대지주 아래 농민들을 괴롭히던 ‘마름’과 비슷한 모습이다. 

그러나 전태일은 그러지 못했다. 너무도 고운 성품이어서 어린 여공들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자신이 사먹을 점심 값과 교통비로 풀빵을 사서 배고픈 여공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물로 배를 채우고 뛰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훗날 노동자를 위한 청년 예수가 될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닌가 한다.

재단사가 된 이후부터 전태일은 평화시장의 엄청난 모순과 부정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냥 재단사가 되어 월급 더 받고 어린 여공들에게 군림하며, 돈을 모으게 되면 미싱 몇 대 사서 독립하여 사장님 소리 듣는 소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태일은 그런 미래를 박차고 노동 현실의 부조리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전태일이 다니는 통일사라는 피복공장 있는 평화시장은 서울 동부지역 청계천 6가에서 동대문운동장 쪽으로 약 600m에 걸쳐 뻗어 있는 3층 연쇄 건물이었다. 이 평화시장은 물건이 없어서 못 판다고 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당시 평화시장은 미싱사 한사람, 보조 한사람, 시다라고 불리는 견습공 2명으로 되는 4인 1조의 작업조가 기본이었다. 작업량이 비교적 많은 기간은 보통 아침 8시 30분 출근, 밤 11시 퇴근으로 노동시간이 하루 평균 14~15시간에 달했다. 일거리가 밀릴 때는 야간 작업을 하는 일이 많았으며, 심한 경우는 사흘씩 연거푸 밤낮으로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인들은 나이 어린 견습공들에게 잠 안오는 약을 먹이거나 주사를 놓아 밤일을 시켰다. 이름 모를 주사약을 맞고 비몽사몽간에 미싱을 돌리다가 자기 손가락에 바느질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처럼 주 5일제 40시간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재단사들과 모임을 하고 있는 전태일.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화면)
재단사들과 모임을 하고 있는 전태일.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화면)

‘남민전’의 전사 김남주 시인은 자신의 아들 이름을 ‘토일’로 지었다. 토요일과 일요일 만큼은 노동자가 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꿈을 담아 이름을 지은 것이다. 물론 지금 그 꿈을 이루어가고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1970년대 초반 한국의 노동현장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린 노동자들의 노력으로 수출은 호황을 이루었다. 그 호황으로 재벌은 자본을 축적하고 권력자들은 재벌과의 유착으로 호의호식했다. 반면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일주일에 거의 하루도 쉬지 못하고 하루에 14시간 이상 노동을 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비정상인가?

전태일은 이런 노동의 비극을 느끼기 시작했다.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되어  기뻐했지만, 근로기준법과 현실은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깊은 슬픔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이 비극의 현실에 낙심하지 않고 근로기준법을 따르는 진짜 세상을 만들고 싶어했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한 꿈이었다. 법을 만들어놓고도 어느 누구도 실천하려 하지 않았다. 평화시장의 사업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부의 근로감독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노동자의 편이 아니었다. 평화시장의 부정한 행위에 대하여 자료를 모으고 근로감독관에게 수없이 노동 현장의 개선을 요청하였지만 번번히 거절당하였다. 어렵사리 경향신문을 통해 평화시장의 현실을 알릴 수 있었지만, 오히려 전태일이 평화시장에서 쫓겨나는 결과로 끝났다. 노동자를 위한 나라는 없었다.

평화시장에서 쫓겨난 그는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어린 여공들과 자신을 사랑하는 친구들을 위하여 그는 할 일이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모란공원' 묘지에 있는 전태일 열사 동상(왼쪽)과 이소선 여사 묘소. (사진=김준혁)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모란공원' 묘지에 있는 전태일 열사 동상(왼쪽)과 이소선 여사 묘소. (사진=김준혁)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바보같은 삶을 살았다는 자책감으로 평화시장을 개혁하기 위한 모임 ‘바보회’를 만들었다가 실패한 그는 다시 의식 있는 재단사들을 만들어 ‘삼동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동화시장과 통일시장 3곳의 시장 재단사들의 모임이었다. 이들은 세 시장의 사업주들을 찾아다니며 근로기준법을 지켜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들의 요구는 철저히 묵살되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길은 바로 스스로 불기둥이 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할 수 있는 시대에 대한 저항이었다.

1970년 11월 13일.
깨끗하게 구두를 닦고 자신의 옷 중에서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머리도 단정히 만졌다. 어머니에게 밝은 웃음으로 인사를 하고 전태일은 평화시장으로 갔다. 그날 삼동회 회원들은 현수막을 걸고 전단지를 뿌리며 동대문 평화시장의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기로 하였다.

경찰들과 사업주들의 방해로 노동자들이 점심 시간에 시장 거리로 나오지 못했다. 시위를 준비하던 전태일은 친구들에게 먼저 시장 거리로 내려가라고 하였다. 친구들이 먼저 내려간 뒤 전태일은 10분쯤 후에 온몸에 불을 붙이고 거리로 뛰어 내려갔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시키지 말라!”

전태일은 한발 한발 나아가면서 짐승처럼 울부짓 듯 소리치다 끝내 쓰러졌다. 때마침 그 자리에 있던 전태일의 친구가 근로기준법 책을 불길속으로 던졌다. 전태일이 계획했던 근로기준법의 화형식이 이루어진 것이다.

분신으로 쓰러진 전태일은 다시 일어났다. 온 몸이 숯덩어리가 된 그는 비틀거리며 있는 힘을 다해 다시 외쳤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마지막 저항의 함성은 바로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였다.

청년 전태일의 영정 사진을 품에 안고 절규하는 이소선 여사.
청년 전태일의 영정 사진을 품에 안고 절규하는 이소선 여사.

전태일의 분신은 한국 노동운동에 새로운 시작을 알려주었다.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던 한 어머니는 노동현장에서 언제나 앞장서는 투사가 되었다. 바로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이다. 이소선 여사는 노동자의 어머니이자 민주주의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청계피복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면서 한국 노동계에 민주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22살의 청년 노동자의 분신을 통한 저항이 시대를 변화하게 한 것이다.

지금 윤석열 정부는 잘못된 과거로 회귀하려고 한다. ‘저녁이 있는 삶’은 커녕 다시 전태일의 시대로 돌아가 하루에 14시간의 노동을 할 수 있는 세상으로 가고자 한다. 50여 년 전에 전태일의 저항이 있듯 50여 년 후 오늘 또 다른 노동자의 저항을 부를 것이다. 그 저항이 거대한 해일과 폭풍이 되어 이 정권을 삼킬 수도 있다. 윤석열 정부여, 부디 상식 있는 노동정책으로 전환하길 바란다. 왜 그대들은 거꾸로 가려 하는가? 

김준혁은 역사학자다. 정조(正祖)가 건설한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의 경제적 기반인 대유평(大有坪)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다. 이런 인연으로 ‘정조’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화성의 복원 등에 참여하였고, 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을 지냈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를 거쳐 2014년부터 한신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조, 새로운 조선을 디자인하다>,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리더라면 정조처럼> 등 정조 관련 다수의 저서가 있다. 오랫동안 수원에서 시민운동을 하였고, 촛불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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