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발표작 '숨쉬는 게르니카', 비극적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영감
내년 스페인 전시 목표, '숨쉬는 게르니카' 다음편 작업 중
작가의 대표작 <생존은 역사다 Survival is history> 는 1945~1995년, 약 50년 동안 전 세계에서 발생했던 큰 사건들을 서사적 시각으로 만들었다. 작가는, 인류는 희로애락을 끝없이 생성하고 소멸시키는 순환을 거듭하며 그 묵시록들을 기록하여 왔다고 본다. 그 기록 자체가 “살아있는 DNA"이기 때문에 곧바로 “생존은 역사다” 가 된다. ‘바로 당신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발표한 <숨쉬는 게르니카 Breathing Guernica>는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오마주하여 창작하였다.
<숨쉬는 게르니카>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직접 영감을 받았다. 작품 중앙에 위치한 소녀 아멜리아 아니소비치(Amelia Anisovych)는 피난처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위해 겨울왕국(Frozen)의 OST 'let it go' 를 불렀으며 바로 뒤에 서 있는 소녀는 ‘나니아 연대기’에 출연했던 우크라이나 아역배우 소니아이다. 소니아는 러시아의 폭격으로 숨졌다.
아멜리아는 그 후 피난을 간 폴란드의 한 무대에서 전통 의상을 입고 우크라이나 국가를 부르게 되면서 40여 개국에 중계되고 유튜브를 타고 전 세계 사람들에게 심금을 울리게 되었다.
한국 미술계 글로벌 작가 부재, 시스템 탓
백남준 이후 제대로 된 글로벌 작가가 나오지 않는 이유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 인큐베이팅 된 이우환도 한국 미술계에 진입하는데 상당한 애로를 겪었다. 곽인식(1919~1988)이 제창한 ‘모노파’라는 일본 현대미술의 한 흐름을 완성한 철학 전공의 이우환은 국내에서는 2000년대초 까지도 ‘재일(在日) 미술가’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런 이우환을 일본을 가장 잘아는 기업인 삼성이 지원했기에 국내에도 정착할 수 있었고, 글로벌 작가가 될 수 있었다..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이우환이 글로벌 작가가 된 건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전시를 가졌기 때문이다. 삼성이 상당 부분 후원하였기에 가능하였다. 결과가 원인의 정당성도 만드는 것이다.
카셀 도큐멘타 이후 국제적인 작가로 부상한 육근병은 주최측으로부터 작품 제작비와 참가 개런티를 보장받는다. 그럼에도 설치 작가가 부담해야 할 상당한 비용은 자신의 회화(드로잉) 작품 등을 팔아 충당해 왔다.
주로 현장성을 중시하는 설치와 영상 작품을 발표하는 그를 미디어아트 작가로 부른다. 육근병은, “미디어아트는 테크놀로지 측면보다는 인문학적인 면을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미디어는 중간, 보편성이라는 의미의 ‘미디엄’에서 파생되었다. 미디어아트는 그 본래의 뜻대로 영화처럼 대중성을 담보하여야 되나 미술계 내외부에서 현학적인 해석을 하려는 경향을 비판한다.
그는 설치 미술과 입체 미술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광활한 땅을 캔버스 삼은 ‘대지 미술’이라고 일컬어지는 게 설치에 속한다. 실내 작업실에서 작업한 작품을 해체해서 전시 장소로 이동, 재조립하는 것은 입체 미술로 구분해야 된다는 주장이다.
국내 미술관 및 갤러리의 열악한 전시 조건도 설치 미술이 발전하는데 한계가 있다. 중국 같은 경우, 대형 전시장 옆에 동일한 크기의 현장 작업실이 작가에게 주어지기도 한다.
육근병은 본격적으로 작가 생활을 시작한 1980년대 후반 이후 글로벌 미술계 현장에 있었다. 현실에서의 현대 미술은 서양중심적이다.
미국의 문학평론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1935~2003)의 명저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을 번역한 박홍규는 오리엔탈리즘을 ‘동양에 대한 서양의 차별과 편견’으로 이해한다. 육근병은 (그러한 오리엔탈리즘의 프리즘으로 타자화된 중동, 아시아인들이 배우는) 서구 미술사는 사대주의적인 사고를 갖게 한다고 말한다.
그는 현대 미술에서의 장르적인 구분, 용어 선택 등을 서구 기준으로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것을 현실로 본다. 흔히 미술사에서 현대 미술(Modern Art)의 다음 단계로 거명되는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이 독일어(kontemporär)에서 파생되어 나왔음을 상기시킨다. 아시아의 작가군, 담론 생산, 시장 측면을 고려하면 지금의 글로벌 미술은 ‘나우 아트’(Now Art)라고 불러야 한다는 게 육근병의 주장이다.
국내에서 작가 매니지먼트나 갤러리 시스템이 받쳐주지 않는 것에 실망하고, 2004년 이후 오랫동안 활동을 중단하였다. 급기야 작가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서울의 언론사 문화부 기자가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네 제가 육근병입니다”고 말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거봐 살아있잖아’ 하는 대화 소리가 들렸다.
2007년 일맥 문화예술 부문 상을 수상했으며, 일본 미야기현 도호쿠(東北) 예술공과대학 객원교수로 임용되었다.
2011년 서울에서 가진 개인전은 20여점의 드로잉만으로 구성되었다. 전시 타이틀 'Scanning the dream'은 '작가가 눈으로 보고, 머리로 상상하고 사유하는 모든 것을 꿈처럼 생각하며, 그것을 그대로 스캔하여 작품으로 형상화 한다'는 의미이다. 작가에겐 언제나 소통에 대한 갈망이 있었으며, 이는 '시선'이나 '바라봄'에 대한 사유를 낳았다.
어린 시절 나무 대문의 작은 틈으로 엿보던 너머의 세계는 '시선으로 맺은 만남'이었다. 그의 작품들은 서구 중심주의 미술계에서 ‘소통’과 ‘만남’이라는 개념을 통해 타자화된 동양인의 시선을 담아, 비로소 서로 마주보는 관계를 맺도록 한다는 의미로 읽혔다.
거슬러 올라가면 미디어아트의 출발지 비디오 아트를 개척한 백남준은 일본과 독일에서 공부한 음악 학도였다. 백남준의 예술 세계가 점프하게 된 건, 동양의 선(禪) 사상에 기반을 둔 미국의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와의 만남으로 서구 문화를 새롭게 인식한 게 계기가 되었다.
육근병은 일본 문화계 인사들과의 교류 폭이 넓다. 건축가 안도 다다오, 전후 뉴에이지 음악가이자 화가인 류이치 사까모토 (Ryuichi Sakamoto, 1952~), 아방가르드 무용인 부토(舞踏) 공연자 이자 실험음악가인 도모에 시즈네(Tomoe Shizune) 등이 그들이다. 2012년 도모에 시즈네와 협업. 뮤직비디오 ‘잠으로의 풍경’을 한국과 일본에서 선보였다.
이처럼 현대 음악가들과의 협업하거나 자신의 영상에 음악 작업을 직접 입히는 이유는 청각을 주요 조형 언어로 보는 그의 예술관에서 기인한다.
음악과 미술의 일체화 흐름은 일찍이 근대주의(Modernism)의 출발에서도 보인다.
독일 바우하우스를 창립했으며 교장을 지낸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ous, 1883~1969)가 기초 교육 책임자로 영입한 화가 요하네스 이텐(Johannes Itten, 1888~1967) 은 1916년에 '바흐 가수(Bachsanger)'를 그렸는데, 요한 세바스찬 바흐(1685~1750) 음악에 영감을 받아 바흐의 대위법을 색의 다양한 조합으로 표현하려는 시도였다.
이텐이 개발한 색환은 빨강·파랑·노랑 등 기본 색이 정해진 규칙에 따라 서로 대립 혹은 조화하며 12가지 색으로 확장해간다. 음악을 가르쳤던 게르트루드 그루노우(Gertrud Grunow)는 쇤베르크의 12음을 색과 기하학적 형태에 연결시켜, 공감각적 색환을 도표로 만들기도 했다.
2012년 12월 서울 일민 미술관 전시는 아카이브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작업실이 있는 경기도 양평의 들꽃 12가지와 일본 아오모리의 평범한 남녀 12명의 영상을 거대한 나무 박스에 집어넣은 ‘Transport(2012)’는 생명의 오묘함을 다룬 작업이다.
바람결에 무심히 나부끼는 무명천을 찍은 ‘Nothing(2012)’도 정지된 화면과 화면 사이에 자신의 경험과 철학을 새겨 넣은 작업이다.
거꾸로 걷는 인간과 물의 흐름을 보여주는 ‘Apocalypse(2012)’는 시간의 거스름을 통해 존재의 구원에 천착한 작품이다.
2013년 서울 남산 표갤러리에서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Sound of Silence)전을 가졌다.
2016년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 전에서는 콜라주 기법을 활용한 회화와 드로잉, 영상 등 작품들을 선보였다.
2017년 도호쿠 예술대학 객원교수를 그만두었다. 대학이 소재한 미야기현 인근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누출 사고도 심리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2018년 서울 아트선재센터에서 회고전 성격의 <생존은 역사다> 제목으로 전시를 가졌다.
작가는 2023년 피카소 작품 <게르니카. 1937년>의 무대인 스페인 전시를 목표로 <숨쉬는 게르니카> 다음 편을 작업 중에 있다. 내년 2월이면 이 작품에 들어갈 소리 작업이 끝난다. <십이지신상>은 네 번째 버전을 작업중이다.
작가는 2001년 9.11사태로 무산되었던 미국 뉴욕 유엔(UN) 본부에서의 매머드 영상 쇼 작업 재개를 준비중에 있다.
육근병은 동시대의 국제적 문제에 관심이 많고 작품의 주제가 된다. 폭력적인 자본주의와 또 다른 형태의 폭력적인 오리엔탈리즘이 부딪힌 9·11이, 폭력을 반대하는 주제의 작품 구현을 무너뜨린 것이다. 9·11 이후 세상은 광기의 살육만이 있었다.
육근병은 백남준을 선배 예술가이자 전략가로 존중한다. “작가가 전략이 없으면 프로가 아니다”고 말한다.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는 동시대에 겹쳐 살았지만 서로 다른 세계를 추구했다.
역설적이게도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린 이후 파시즘이 주도하는 제 2차 세계 대전이 본격화 되었다. 이 땅에서 미술 교육을 받고 작업을 놓지 않은 육근병은 어쩌면 또 다른 세상의 비극을 예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그러한 일어나지 않은 비극을 딛고 넘어서야 빛을 발하는 아이러니한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심정택은 쌍용자동차, 삼성자동차 등 자동차회사 기획 부서에서 근무했고 홍보 대행사를 경영했다. 이후 상업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50여회의 초대전, 국내외 30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한 14년차 미술 현장 전문가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칼럼을 써왔고, 최근에는 미술 및 건축 칼럼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저서로는 '삼성의몰락', '현대자동차를 말한다', '이건희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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