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너미 시리즈3- '악성 베토벤 & 식성 로시니' (4)

세상의 모든 음악이 한순간에 사라져도 바흐만 있다면 모조리 다 복원될 수 있다고 하는 그토록 위대한 바흐도 사망 직후 명예를 회복하기까지는 거의 100년이 걸렸다.

위대한 철학자 니체는 자신의 철학이 이해되려면 100년은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코페르니쿠스보다 1700년 앞서 지동설을 주장했던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 아리스타르코스만큼은 아니지만, 음악사에서 재평가가 느리게 도래한 작곡가로는 로시니를 빼놓을 수 없다.

반면 베토벤은 중년 이후 명성을 누렸으며, 따라서 경제적으로도 그리 쪼들리지 않았다. 그의 명예는 살아 생전이나 타계 후에도 변함이 없었고 오히려 갈수록 높아만 갔다. 

베토벤의 데드마스크와 그를 토대로 복원한 두상
베토벤의 데드마스크와 그를 토대로 복원한 두상

악성(樂聖)의 명예는 영원했다, 베토벤

베토벤은 나이가 들어갔고, 1821년 여름 심한 황달을 앓은 이후 질병의 빈도와 강도가 증가했다. 건강이 악화된 베토벤은 1826년 9월말 동생 요한의 시골 집으로 갔다가 12월 초에 춥고 습한 날씨를 막을 수 없는 마차를 타고 빈으로 돌아오는 여행에서 폐렴을 얻었다. 이후 다리와 복부의 수분 저류 및 황달과 함께 심각한 간경변 증상까지 찾아왔다. 말썽꾼 조카 카를은 12월 동안 베토벤을 간병하다 한달 뒤 입대하기 위해 떠났다. 1월 말에는 주치의 말파티 박사가 와야 했고, 위독하다는 소식이 퍼지자 디아벨리, 리히노프스키, 훔멜과 제자 쉰들러와 힐러 등 많은 친구들이 방문했다. 3월 24일, 그는 방문자들에게 "박수를 쳐주게, 친구들, 희극은 끝났네."라고 말했다. 

빈 중앙묘지 명예구역에 위치한 루트비히 반 베토벤의 묘지
빈 중앙묘지 명예구역에 위치한 루트비히 반 베토벤의 묘지

이틀에 걸친 여러 의사들의 치료 시도뒤 베토벤은 56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임종하는 자리에는 안젤름 휘텐브렌너와 제수인 요한나만이 지켜봤다. 베토벤의 머리카락에서는 보통 사람의 수백배에 달하는 납이 추출되어 최근의 의학자들은 그의 사인을 납중독에서 오는 합병증으로 보고 있다. 3월 29일 열린 장례식에는 무려 2만명에 이르는 빈 시민들이 그를 기리며 장례 행렬에 참여했다. 베토벤의 시신은 두 번 발굴되었는데, 1863년에 뼈를 측정하고 두개골을 사진으로 촬영했다. 1888년에 그의 유골은 다시 대중의 존경과 함께 베링 묘지에서 빈 시립 중앙묘지의 명예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은 베토벤을 매우 존경하여 집필한 <베토벤의 생애>가 환영받지 못하자 그를 모델로 소설 <장 크리스토프>를 써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반면 독일 음악가인 막스 레거는 "베토벤이 귀가 들렸다면 이렇게 과대 평가받았을까?"라고 반문했다가 베토벤 추종자들에게 엄청난 공격을 받았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베토벤 추종자는 슈베르트였다. 소심한 그는 베토벤과 불과 2km 거리에 살면서도 찾아가지 못하다가 베토벤이 죽기 1주일 전에야 지인들의 주선으로 겨우 기회를 잡는다. 베토벤은 그의 악보를 보고 일찍 만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정작 슈베르트는 그런 찬사를 듣기도 전에 베토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먼저 뛰쳐나오고 말았다고 한다. 생전에 베토벤을 너무나 존경했던 슈베르트는 사후 베토벤 곁에 묻히길 바랐고, 결국 1년후 그 소원을 이루었다. 

베토벤의 음악계에 대한 기여는 매우 컸고, 그 이후의 음악가는 크든 작든 그의 영향을 받았다. 모차르트를 제외한 이전의 음악가들의 작품들은 궁정 또는 교회의 공식 및 사적 행사를 위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베토벤은 그런 후원자와의 주종 관계를 거부하고 대중을 향해 작품을 발표하는 음악가의 선구자가 되었다. ‘음악가는 귀족의 하인이 아니라 예술가’임을 공언한 그의 절대음악적 태도는 각각의 곡을 그 자체로서 독립적 예술 작품으로 성립하는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고전음악의 엄격한 형식미를 거부하지 않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음악을 구현하는데 성공했지만, 스스로 그 형식을 넘어선 표현의 영역 확대에도 성공했다. 그가 고전음악의 완성자이며, 동시에 낭만음악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그로 인해 교향곡은 이전의 30~40분에서 1시간을 넘는 확대를 이루었고 성악과도 결합되었다. 피아노는 다른 악기와 함께 독주 소나타를 할 때 더 이상 반주에만 머무르지 않고 동등한 협주의 수준까지 올라갔다. 현악 4중주는 특히 후기 작품들의 경우 이전의 형식이나 주법을 넘어선 영역을 개척했다.

브람스 등 후대 작곡가들은 교향곡 분야에서는 이미 벤토벤이 다 해버려서 할 것이 없다는 푸념을 했고, 그래서인지 슈베르트, 브루크너, 드보르자크, 말러 등 이후의 심포니스트들은 9번까지만 번호를 붙인 교향곡을 썼다. 9번을 넘어선 유명 작곡가는 고작 쇼스타코비치 정도이다. 바그너의 경우 교향곡 9번의 ‘시와 음악의 융합’에 매료되어 낭만주의 음악의 최전선에서 악극을 탄생시켰다. 반면 브람스는 베토벤의 견고한 구성과 극적인 전개를 통한 고전주의 음악 형식의 구축이라는 측면을 이어받아 신고전주의로 불렸다. 베토벤이 확립한 ‘고전주의 형식에서의 극적인 전개와 구성’은 이후 드보르자크와 차이콥스키, 그리고 20세기에는 쇤베르크,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등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베토벤과 로시니의 짧은 인연 

생전 베토벤은 일찍부터 성공해 유럽 전역에 오페라들을 공연시키던 로시니를 부러워했다고 한다. 반면 로시니는 스무살 무렵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을 듣고난 후 음악성은 물론 혁신적 발상에 충격을 받아 베토벤은 만나고 싶어했다고 한다. 로시니는 지인들을 통해 베토벤을 만나려고 수차례 노력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중 1813년 베토벤이 교향곡 7번을 초연할 때 참여했던 바이올리니스트를 통해서 드디어 뜻을 이루게 된다. 그는 베토벤이 빈에 왔을 때 얼마간 가르치기도 했고 오랜 기간 친구로 남았던 사람이었다. 

로시니는 <세비야의 이발사>와 <신데렐라>의 대히트 이후 1822년 이사벨라 콜브란과 결혼했다. 신혼여행차 음악의 도시로 떠오른 빈을 방문했을 때, 드디어 베토벤을 만나게 된다. 베버와의 오페라 배틀에서도 승리해 빈 관객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직후였다. 로시니는 음악 스타일은 달랐지만 존경하던 22살 연상의 베토벤에게 비싼 와인을 사들고 인사하러 갔다. 당시 베토벤은 귀가 완전히 멀어서 통역의 중개로 필답을 주고받아야 했다. 이 때 베토벤은 로시니에게 이렇게 적었다. 

“아, 로시니 선생, 당신이 바로 <세비야의 이발사>의 작곡가이군요. 축하드립니다. 이탈리아 오페라가 계속되는 한 계속 공연될 오페라인 듯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희가극(오페라 부파)만 쓰세요. 다른 장르의 오페라는 당신의 스타일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소.”

베토벤은 분명 로시니를 만나기 전 <세비야의 이발사> 공연을 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미 귀머거리가 된 그가 과연 이 오페라를 제대로 즐겼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이처럼 어정쩡한 덕담이면서 동시에 은근히 한 방 먹이는 듯한 평가밖에 해 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호사가는 이 만남에 대해 살리에리와 모차르트의 만남 같다고 묘사했다. 로시니를 모차르트로 표현한 배후에는 외면적으로는 인기에 초연하며 예술에만 심취해 있는 듯하면서도 천재적 대중성에 대해서는 질투한 인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당시 벤토벤은 빈 관객들로부터 위대성이 칭송되긴했지만, 흥행은 로시니가 단연 그보다 앞섰기 때문이기도 했다. 

로시니는 존경하는 이 거장 음악가가 허름한 하숙집에서 볼품없는 옷차림으로 지내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안 좋았는지, 베토벤을 위한 모금운동을 제안하기도 했다는데 실제로 모금활동이 행해졌다는 기록은 없다.

로시니 만년의 사진
로시니 만년의 사진

잊혀졌던 로시니, 20세기 후반에 맞은 르네상스

로시니는 음악사의 대표적인 천재였던 모차르트나 멘델스존 등과 달리 76세까지 꽤 장수한 탓인지 상대적으로 천재라는 이미지가 약한데, 로시니도 이미 18세에 수준급 오페라를 작곡한 만만찮은 재능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는 원숙해질 나이인 40세가 되기도 전에 작곡을 그만 뒀다. 

그는 엄청난 작곡속도로 유명했는데, 천재성보다는 특유의 빈둥대는 성격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느긋하게 놀다 마감이 걸려야 비로소 작곡을 시작했는데, 극장주 바르바야가 극장 다락방에 가둬두고 감시하던 하인들에게 제 시간에 못 끝내면 창밖으로 던져버리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니 주요 아리아와 서곡 등만 신경 써서 작곡하고 나머지는 날림으로 처리하거나 기존의 곡을 적당히 재활용해  채우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자기 것뿐 아니라 다른 작곡가 것도 몰래 가져다가 알아듣기 어렵도록 변주시켜 집어넣는 만행도 자행했는데, 오히려 관객들은 어디선가 들은 듯 익숙한 음악을 더 좋아했다고 하니 아이러니 아닌가. 나중에는 자신의 순수한 창작 비중이 늘어갔고 작곡 스타일이 더 세심해지기는 했다고 평가된다.

그가 프랑스에서 접한 낭만주의 음악으로의 전환을 모색한 작품이 바로 그의 마지막 오페라인 1829년작 기욤 텔(Guillaume Tell, 이탈리아에서는 굴리엘모 텔, 독일에서는 빌헬름 텔, 영어권에서는 윌리엄 텔로 쓴다)이었다. 음악사학자들은 그의 말년 작품인 '노년의 과오'에 대해 베토벤과 쇼팽 등의 영향이 많이 느껴지지만 고전주의 양식에서 벗어나지는 않은 것으로 평가한다. 로시니가 갑자기 작곡을 중단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엇갈린다. 낭만주의가 주류가 되면서 로시니가 자신의 음악이 더 이상 환영받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는 것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로시니의 음악은 고전과 낭만 사이 과도기 양식에 해당되기는 하지만, 그는 벨칸토 창법과 오페라 세리아, 오페라 부파 등 고전시대의 오페라 작법에 충실했던 작곡가였다. 

또 하나의 주된 이유로 자신의 오페라를 제대로 연주해낼 가수들의 부족을 드는 경우도 많다. <세비야의 이발사>와 <신데렐라>를 포함하여 <세미라미데>, <기욤 텔> 등의 후기의 대작들은 작품성 측면에서도 정점을 이루고 있어 여주인공을 구하기가 어렵다. 1820년대가 지나면서 자신의 아내이기도 했던 이사벨라 콜브란처럼 벨칸토 창법에 충실한 가수들이 점점 사라졌던 것도 그가 오페라계를 떠나게 만든 요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도니제티와 벨리니 등 로시니보다 단명했던 벨칸토 오페라 작곡가들도 있었지만, 베르디나 푸치니와 같은 걸출한 후배 작곡가들이 등장하면서 연주가 어려운 로시니 오페라들은 자취를 감췄다. 20세기 중반까지도 그의 심각한 오페라들은 주로 서곡과 몇몇 아리아만 연주되었는데, 다행히 20세기 후반부터 여러 가지 공연상의 난점을 극복하고 전체 오페라가 종종 공연되는 부활기가 도래했다. 

20세기 후반의 로시니 르네상스는 체칠리아 바르톨리(Cecilia Bartoli, 1966~ )이라는 걸출한 오페라 가수의 출현으로 가능했다.

20세기말 로시니 오페라를 부활시킨 체칠리아 바르톨리
20세기말 로시니 오페라를 부활시킨 체칠리아 바르톨리

부모 모두 오페라 가수인 집안에서 태어난 체칠리아는 이름도 같은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공부하고 19살에 TV 공연으로 데뷔하자마자 파리 오페라극장의 마리아 칼라스 헌정공연에 초청된다. 21살에 베로나 아레나 공연에서 남다른 데뷔를 하더니 이듬해 쾰른과 취리히에서 <세비야의 이발사> 타이틀 롤을 맡으며 주목을 받는다. 거장 바렌보임과 아르농쿠르가 그녀를 발탁하면서 단숨에 모차르트와 로시니 스페셜리스트로 떠올랐다. 메조 소프라노이면서도 끝없이 올라가 콜로라투라까지 커버하는 놀라울 만큼 넓은 음역에다 고난도의 스케일을 별로 힘들이지 않게 소화해내는 표현력은 120년 가까이 잠들어있던 로시니의 오페라들을 깨워 무대 위로 불러냈다. 성악가로서는 사기 캐릭터라고 불리는 그녀의 출현으로 세계 오페라계는 레퍼토리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고, 오늘날 로시니 오페라의 공연과 연구는 지휘자 정명훈과도 절친인 그녀의 공헌이 적지 않다.

로시니가 이른 시기에 음악을 그만둔 또다른 중요한 이유로는 너무 일찍 큰 돈을 벌었던 것을 들 수 있다. <기욤 텔>을 작곡한 후 로시니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머리에 떠오르는 선율을 그저 손으로 옮기기만 하면 됐지만, 이제는 수고스럽게 찾아다녀야 하게 됐네." 낭만시대에 맞는 음악을 작곡하려면 편하고 익숙한 이전의 틀을 깨뜨리는 고통이 필요한데, 이미 부와 명성이 충분한 로시니는 굳이 그런 고통을 감내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게 아닐까.

로시니는 두 번 결혼에 남긴 자식이 없이 사망하면서 당시 250만 프랑, 현재 시세로 따지면 수백억이 넘는 돈을 남겼다. 그는 유언을 통해 유산의 일부는 둘째 부인 올랭프에게 주고 친척들에게도 조금씩 나눠준 후 남은 돈은 모두 파리 시 당국에 기부해 사회에 환원했다. 파리 시에서는 이 돈으로 그의 이름을 붙인 음악학교와 각종 재단을 설립했으며 이들은 현재까지도 남아 활발히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으로 로시니의 출생지인 이탈리아의 페사로에도 그의 기부금으로 로시니 음악원이 설립되어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로시니가 개발한 요리 뚜르느도 로시니.
로시니가 개발한 요리 뚜르느도 로시니.

요리계에 이름을 남긴 식성(食聖) 로시니

로시니가 음악을 그만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그가 먹는 것을 너무 좋아했다는 것이다. 요리책을 썼을 만큼 대단한 미식가였다. 스스로 일생 동안 단 세 번을 울었다고 말했다. “내 오페라가 최초로 공연에 실패했을 때, 어린 니콜로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었을 때, 파리의 센강에서 보트를 타다가 송로버섯을 곁들인 칠면조 요리를 빠뜨렸을 때였지.”

그는 19세기 프랑스 식탁의 기본을 정립한 전설적인 주방장 마리-앙투완 까렘(Marie-Antoine Carême 1784~1833)과 깊은 우정을 나누며 새로운 식재료와 조리법을 개발했다. 여러 해 동안 이 두 사람은 그들이 속한 서로 다른 분야의 예술에 경의의 표시를 주고받았는데, 까렘이 볼로냐에 있는 로시니에게 맛있는 가메 빠테(game pate)를 보내면, 곧 로시니는 까렘을 위한 짧은 아리아를 작곡하여 선물하곤 했다.

타고난 재복 외에도 로시니는 사교적이고 느긋한 성격으로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바흐, 헨델,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바그너 등 음악사에 남들과 타협할 줄 모르는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들이 많은 것에 비하면 음악사 가운데 가장 평온하고 부유한 삶을 누리다 간 흔치 않은 경우다.

올랭프와 그가 살았던 파리의 저택에선 늘 음악과 요리가 함께 하는 주말 모임이 열리곤 했다. 작곡을 멈춘 후에 로시니는 미식가(goumand) 겸 예술애호가로 유명해졌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에는 '알라 로시니(alla Rossini)'라는 로시니 취향의 요리법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으며, 심지어 아직까지도 그의 이름을 내건 요리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송로버섯을 찾는 암퇘지 사육 때문에 은퇴했다는 설도 있다. 그가 뚜르느도와 칠면조, 트뤼프와 푸아그라로 개발한 요리인 '뚜르느도 로시니'‘는 지금까지도 메인 디쉬로 당당히 테이블 위에 오르고 있다. 프랑스의 유명 요리사인 폴 보퀴즈도 이를 토대로 그의 이름을 딴 "로시니 스테이크" 라는 것도 판매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미식가 못지않게 대식가이기도 해서 이런 일화도 전해진다. 어느 부르주아의 저택으로 점심 식사 초청을 받고 가서 먹었는데, 자기 기준으로 워낙 양이 적었던 모양이다. 주인장이 그에게 "괜찮으시다면 나중에 이런 자리를 다시 마련하겠습니다."라고 의례적인 인사를 하자 "괜찮으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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