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원주시 소초면 흥양리 ‘카페 서천담’에서 상설 전시
필자는 갤러리 사업을 할 때부터 작가 작업실을 방문해 왔다. 작품을 정의하고 미학적 가치를 분석하며 판단하는 비평의 목적은 아니었다. 미술을 잘 모르면서 사업에 뛰어들었던 갤러리스트가 빠르게 미술 전반을 이해하며, 나름 갤러리 정체성에 부합하는 작가를 선정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이후 글쓰기를 하면서 실제 작품을 보고, 작품 세계를 종횡으로 이해하기 위한 작가와의 소통으로 그 목적이 바뀌었다.
임동훈 작가의 작업실은 강원도 원주시 외곽 치악산 국립공원 초입에 자리잡고 있다. 수년전부터는 둘레길이 생겨 주변으로 외지인의 방문도 잦다. 6년여전 겨울, 영화 촬영팀을 따라왔다가 자리 잡게 되었다. 치악산은 겨울이 특히 좋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속의 존재이다. 건축적으로 장소에는 고유의 혼이 머문다. 노르웨이 건축이론가 노르베르그 슐츠(Christian Norberg-Schultz)는 이 터의 장소성을 '제니우스 로사이(Genius Loci)', 곧 '장소의 혼'이라 했다. 작가는 작업실을 직접 설계했고, 지역민들과 같이 지었다.
원주는 특징이 없는 도시이다. 텃세 또한 없다. 직업적인 작가들도 화랑가도 없고 일정 규모의 미술 시장을 형성하지도 못한다.
원주라는 '지역사회권‘에 뚝 떨어진 임동훈 작업의 궤적은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장소성과 맞아떨어지면서 진화하고 있는 듯 보인다. 작업의 궤적(軌跡)은 재료적 미디엄(medium·용제)의 변화 과정이기도 하다. 미디엄은 소금, 실리콘, OHP(overhead projecto) 투명 필름 순으로 발전해 오고 있다.
최근에는 투명한 아크릴 원액같은 바인더를 사용한다. 묽게 만든 물감을 색별로 캔버스에 떨어뜨리고 마르는 사이 사이에 바인더를 적용한다. 작품의 표면은 부드러운 광택을 낸다.
초고속 카메라 촬영으로나 겨우 볼 수 있는 짧은 시간 동안의 (필름)프레임은 운동, 파장으로 보여진다. 작가는 이러한 순간(영화에서 한 프레임은 1초에 24개 장면)을 평면에 공간적으로 가두어 두는 작업을 일관되게 한다.
이전에는 점들이 형태를 이루는 작업을 하였다. 구체적인 형상 그리기를 목표로 한 게 아니었다. 평면에 공간감을 내기위해서는 막(幕) 같은 게 필요했다. 작가가 재료에 매몰된 이유이기도 하다.
미술은 조형을 강조하든 메시지 전파를 목적으로 하든 기본적으로 전달의 기능이 있다. 작가들이 대개 그렇듯이 임동훈도 관객에게 친절하지 않다. 조형과 메시지를 아우르는 욕심 또한 있다.
그는 경남 창원(구 진해)출신이다. 부친은 40여년을 진해를 사령부로 둔 해군에서 직업 군인을 했다. 청소년 시기, 미술을 하겠다고 하니 집에서 쫓아냈다. 대구에서 미대를 다니며 회화를 공부했다.
경제적으로 먹고 살만해지고 사람들의 의식이 깨이면서 미술학도는 예비 예술가로 대접받는다. 독재 개발 시대 근대화의 역군인 부모 세대와 시대에 빚진 게 없는 자식 세대는 종종 극단적인 문화적 충돌에 이른다.
임동훈이 7년여간 미국 뉴욕에서 공부와 더불어 생활을 위해 영상 및 사진 작업 현장에 스태프로 참여하였다. 영화는 스크린으로 비춰지는 공간과 시간의 예술이다.
다양한 라이프 스타일에서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지는걸 보았다. 현장에서 만난 이들은 대부분 시공간적으로 뿌리가 없는 듯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며 묘한 불안감의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
임동훈은 애초 대학입시를 위해 조각을 배웠으나 곧 회화로 바꿨다. 영화 및 사진 작업 현장 등에서 손과 눈으로 몸으로 배운 감각이 남아있다. 임동훈의 작업은 이러한 삶의 궤적에서 체득한 모든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
그는 시간을 영화의 프레임처럼 공간이 오는 것으로 이해한다. 시간의 거리(A Distance of Time)라는 측면에서 보면, 시간의 단위가 겹쳐진다. 이러한 작가의 인식은 일상과 작업을 대하는 태도를 결정한다.
그는 뉴욕에서 공부하고 생활하며 자신이 한국에서 배웠던 미술이 어거지였다는 것을 알았다. 한편으로는 ‘내가 여기 왜 무엇 때문에’라는 정체성의 혼란도 있었다. 자신에게 맞는 그림을 그리고 있나라는 회의가 들었다. 작업실은 뉴욕과 인근 도시로 여러번 옮겼다.
그들과 유전자 자체가 다르며, 미술가로서 안으로는 그렇지 않으면서도 마치 센 척 하지 않았나 의구심이 들었다. 모든걸 버리고 새로 시작하자는 생각을 굳혔다. 귀국이후 대구를 중심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2010년 전시부터 자연물을 오브제로, 미디엄으로 소금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곡물이나 씨앗은 발아하고 썩고 부패한다. 자연의 이치이며 시간은 모든 과정을 지배한다. 소금으로 염(殮·코팅)하기로 했다. 아교에다 소금을 섞어 회칠처럼 칠하면 레이어가 생긴다. 조명에 반짝반짝 또는 번들번들 빛나기도 한다. 송곳으로 반복해서 긁으니 일정한 패턴이 나왔다. 물감을 나이프로 긁으면 물성이 더 드러난다.
소금은 한편으로 상징이기도하다. 성경을 포함, 일반적으로 소금은 삶과 죽음 또는 그 경계를 상징한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명분으로 사회 문제를 의도적으로 설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상징성이 부각되는걸 되려 피한다.
주변에 놓인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재들을 택했다. 여름 산책 길에서 만나는 벌레, 각종 곰팡이, 벌집, 한낮에도 어둑한 계곡 바위에 말라버린 물 자욱과 선, 레이어들. 작업의 모티프는 이러한 원형(原形)을 가진 단일한 덩어리이다.
창으로 보이는 산의 녹색과 근경 나무의 녹색은 공기층의 차이로 색이 다르다. 막이기도 하고 창이기도 한 그 무엇을 구현해 보고 싶었다. 시간 속에 공간을 담아내려는 그의 지난한 노력의 출발점이 되었다.
40여년 이상된 대구의 한 아파트 철거현장을 찾았다. 각 동과 층, 호실이 지상으로 무너져내린 폐허를 뒤졌다. 옷감, 철 조각, 나무 액자, 유리 등. 이들을 평면 보드에 부착하고 다른 보드에는 동일하게 물질의 용어를 나열해 써 넣었다.
작가는 현상(phenomenon)을 만들어내는 노동자이다. 그리스적 어원을 가지는 ‘현상’, 즉 파이노메논(ϕαινμενον)은, ‘자신을 그 자체로 내보여준다’를 의미하는 동사 파이네스타이(ϕανεσϑαι)에서 나왔다. 작가가 만드는 현상은 스스로 존재하는 모습대로가 드러나야 하면서도 새로운 의미를 지녀야 한다.
바닥에 수평으로 놓인 캔버스에 묽은 물감을 떨어뜨리면 물성 자체의 중력으로 물감이 캔버스에 스며든다. 소금은 이 속도를 지연시키며 물성 끼리의 밀고 당김을 통해 형상이 만들어진다. 임동훈은 제작의 전 과정에서 반응을 관찰하고 변화하는 성질을 소금으로 조절한다.
그는 소재나 재료에 대한 실험을 바탕으로 각종 현상적인 사건의 근본에 접근하겠다는 태도를 보여준다.
희뿌옇게 움직이고 있는 듯한 단세포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덩어리가 캔버스 위를 느리게 유영한다. 가장 단순한 형태인 원형을 자연물로 염색하고 여기에 실리콘을 한 겹 입히고, 그 위에 또 원형을 올린다. 실리콘이 가지고 있는 몽글몽글한 물성, 유동성, 투과와 차단 등 이중적 성질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듯한 원형을 시간의 덫에 가두고 있다. 이런 원형의 여러 층들은 유동적인 형태의 흐름을 만들어 마치 원시적인 생물체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작가는 캔버스 위에 물감을 떨어뜨리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증발되고 건조될 때까지 기다린다. 그 물감의 흔적은 중첩되며(layered) 특별한 흐름을 만들면서 저마다 다른 형태로 움직인다. 작가는 캔버스에 점을 찍어 말린 후, 실리콘으로 얇게 화면 위에 바른다. 실리콘 위에 또 점을 찍는다. 이처럼 10겹 이상 층을 올리면서 시간의 결을 보여준다. 켜켜이 쌓여진 평면들로 인해 점은 입체감을 갖는다.
점은 그려졌다기보다는 중력의 작용을 받아 떨어뜨려진 것 같은 이미지를 준다. 반복된 행위에 의해 완성되어가는 과정은 실리콘으로 인해 이전의 행위들이 사라지지 않고 화면 깊숙한 곳에 자리하며 시간의 깊이를 만들어낸다.
움직이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듯하고, 정지해있는 듯하면서도 끊임없는 움직임이 느껴지는 정중동(靜中動)의 미학으로 남는다.
서울로 옮긴 2018년 전시는 ‘중력’(重力)이 주제였다. 곰팡이부터 작은 곤충들까지 자연의 생존 본능, 살아가는 방식 등 반복적인 행태를 점으로 기록하며 표현하였다. 선이든 형체든 모든 것을 중력이란 동일 선상에서 해석하였다. 통상 중력이란 볼륨과 매스를 가지며 무게가 있는 단위에 적용한다는 관념을 여지없이 깨트린다.
서울에서 이어진 2020년 전시는 ‘시간의 거리’를 주제로 삼았다. 층층이 번갈아 쌓인 실리콘은 완전하게 압축되고 기저까지 투시되어 은근하게 전 과정이 모두 비친다. 이 과정은 식별 불가능할 정도의 아주 작은 움직임의 흔적을 드라마틱하게 확장시킨다.
임동훈 작품은 원주시 소초면 흥양리 대왕고개길 작가 작업실에서 멀지않은 ‘카페 서천담’에서 연중 상설로 전시를 한다.
심정택은 쌍용자동차, 삼성자동차 등 자동차회사 기획 부서에서 근무했고 홍보 대행사를 경영했다. 이후 상업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50여회의 초대전, 국내외 30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한 14년차 미술 현장 전문가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칼럼을 써왔고, 최근에는 미술 및 건축 칼럼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저서로는 '삼성의몰락', '현대자동차를 말한다', '이건희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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