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거제 전시 ‘직관의 시간’, 7월 3일까지

2018 spring 162.2×130.3㎝ oil on canvas / 사진 제공 = 갤러리거제
2018 spring 162.2×130.3㎝ oil on canvas / 사진 제공 = 갤러리거제

1953년 대구에서 유성기 음반으로 발표된 가수 백설희(1927~2010)의 대표곡 '봄날은 간다'는 조용필 나훈아 장사익 한영애 등이 리메이크한 불후의 명곡이다. 같은 이름의 영화(2001년)에선 남자가 변심한 여자에게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며 울먹였다. 전주(前奏)가 해금으로 시작되는 장사익의 노래,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구절은 절창(絕唱)이다. 

봄날도 가고 코로나 팬데믹도 끝나는 시기, 화가 나오미군지는 회고전 성격의 전시를 경남 거제도의 갤러리거제에서 갖는다. 

2018 summer 162.2×130.3㎝ oil on canvas / 사진제공 = 갤러리거제
2018 summer 162.2×130.3㎝ oil on canvas / 사진제공 = 갤러리거제

나오미군지는 2018년 경기도 용인 영은미술관에서 ‘생전장’(生前葬) - Flash back : Art of dyning을 타이틀로 초대전을 가졌다. 영화에서 ‘Flash back’은 ‘과거의 회상 장면으로의 전환’을 말한다. 작가는 이를 ‘재생 - 죽고 태어난다’로 이해했다.

영은미술관은 그녀의 남편이자 예술적 동지인 도흥록(1956~2016) 조각가의 작품 유작을 기증받아 소장하고 있다. 작가는 작품을 기증함으로써 비로서 평화와 안식을 얻는다. 

지난주 경기도 용인의 자택에서 가진 인터뷰 내내 고인故人)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나오미는 인터뷰 후 보내온 문자에서 “제 자신의 장례식을 지난번 전시 때 했습니다”고 했다.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성실한 가장이자 영감을 주고받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 보였다. 

글을 쓰면서 특정한 환경과, 사람 또는 영혼에 지독하게 매몰되어 있는 예술가를 분리하는 게 옳으냐 그대로 안고 가느냐 하는 문제에 맞부닥치게 된다.  

예감 80호 oil on canvas 2016년 / 사진제공 = 갤러리거제  
예감 80호 oil on canvas 2016년 / 사진제공 = 갤러리거제  

“남편 투병 이후의 그림은 생사를 경험한 영감으로 가득할 것”이라고 했다. “어릴 때 운명에 대한 예감이 있었던 듯 하다”고 말한다. 

컬렉터는 작품을 컬렉션하면서 작가와 무언의 관계를 맺는다. 2010년 4월, 서울 인사동 선화랑 전시회에 나온 나오미의 겨울 풍경 작품들중 소품을 컬렉션했다. 작품들은 정직하고 담백했다. 이번 전시에 나온 겨울 풍경은 여전히 헐벗었다. 

winter 2021-1(F 30B) oil on canvas / 사진제공 = 갤러리거제
winter 2021-1(F 30B) oil on canvas / 사진제공 = 갤러리거제

나오미는 다자이 오사무(1909 ~ 1948)가 1948년 발표한 소설 <인간실격>의 배경이 된 ‘도쿄에 폭설이 내리던 밤’의 무대가 된 그 도쿄 출생이다.

집 2층에 누워 창 너머 보는 풍경이 좋았다. 나무는 풍경의 중심 대상이다. 화폭 속에 스스로 걸어들어가 나무가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눈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빨리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야했다. 어린 시절부터 서예를 했기에 먹으로 크로키를 하는 게 익숙했다.

무사시노 미술대학 서양화과에 다니면서 재료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다. 유화는 안료를 기본으로 어떤 재료를 조합하느냐에 따라 스펙트럼이 넓다는걸 알았다. 인물, 정물 등 다양한 대상을 그렸다. 일본 미술 대학은 대체로 전통 일본화든 서양화든 재료 연구에 강하다. 

강점기 일본을 통해 유입된 한국의 서양미술, 특히 호남 중심의 일명 남도화는 붓으로 콕콕 찍어누른듯 대상과 주변의 경계가 흐린 게 특징이다. 재료에 대한 분석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물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산과 바다, 평야에 둘러쌓인 지역 기후 조건에서 특유의 화풍이 생성되지 않았나 생각이 미친다.           

무사시노 미술대학 인근이 조선대학(김일성 대학)이다. 통학 길에 한국유학생들의 한국어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대학 졸업 때쯤 스승은 꼼꼼하고 섬세한 일본화보다는 서양화를 계속 공부하길 권했다. 1980년대 중반, 일본은 여전히 성장 위주의 정책으로 사회 전반이 미국 중심의 서구 문화를 따라가기 바빴다. ‘동양’이니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말은 비하의 뜻을 갖게 됐다. 당연히 동양적 고유성은 등한히 했다. 나오미 스스로 길에 들어선 서양화는 자신이 가고자하는 방향과 달라보였다. 유럽이나 미국에 유학 갈 이유가 없었다. 마침 유학생으로부터 한국어 사전도 선물로 받은터였다. 

이름부터 ‘동양’을 품고 있는 서울대 미대 동양화과에는 무언가 자신이 찾고자 하는 게 있는 듯 보였다. 3학년으로 학사 편입했으나 사실상 2학년부터 다시 시작했다. 이종상, 김태정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특히 서예에 바탕을 둔 김태정은 문자가 가진 원시적 조형성을 강조했다. 그로부터 획이 가진 힘을 배웠다. 납작한 먹 선은 진검으로 그린듯했다. 먹의 연속은 입체로 보였다.  

한편 어학당 시기부터 알게 된 지인의 소개로 일본 큐슈 사가현의 아리타시(佐賀縣 有田市)를 자주 다녔다. 도쿄와 큐슈는 멀지만 부산과 큐슈는 가까웠다. 도자기에 주로 산수(山水)를 그리는 협업이었다. 

The Lake Ⅱ30×41㎝ 2005 / 사진제공= 갤러리거제 
The Lake Ⅱ30×41㎝ 2005 / 사진제공= 갤러리거제 

나오미는 일루젼(illusion)을 일으키기 위해 사실적으로 그린다 했다. 대상 안에 이미 일루젼이 있었으나 요즘은 그림 안에서 나온다. 

의식과 무의식은 동전의 양면이다. 의식은 의지를 동반한다. 의지의 지배를 받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를 끄집어 내는 게 화가의 일이다. 대상이 나인지, 내가 대상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야 한다.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의 경지인 ‘료이자오’(聊以自娛)에 들어서야 했다. 나무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듯 보였다.    

나오미군지는 20대 중반까지 일본에서 보내고 35년 이상을 한국에서 살고 있다. 프랑스 파리와 남프랑스의 햇빛이 다르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햇빛이 다르듯 나무의 수종이 다른 일본과 한국의 햇빛은 다르다. 

봄에서 여름으로 바뀌어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木漏れ日. komorebi)은 퍼져 보인다. 그러한 그림을 그릴 때 생명을 얻는다고 했다.  

KOMOREBI F30B oil on canvas 2022 / 사진제공 = 갤러리거제
KOMOREBI F30B oil on canvas 2022 / 사진제공 = 갤러리거제

그녀가 천착하고 있는 풍경화는 원거리 여행을 통한 사생이 아니라 주변 생활에서 대상과 모티프를 얻는다. 풍경이기도 하며 펼쳐진 대상은 사계절의 변화와 반복된 관찰 끝에 화폭으로 옮겨진다. 감각한 기억은 짧은 동선 안에서 진화한다.   

5월의 신록을 비추는 빛은 생명이다. 이양하(1904~1963)는 명문 ‘신록예찬’(新綠禮讚)에서 인생을 자연에 거울처럼 비추어 쓰고 있다. 신록예찬은 노래 ‘봄날은 간다’보다 5년 앞서 1948년에 발표되었다. 

< 이즈음의 신록에는, 우리 사람의 마음에 참다운 기쁨과 위안을 주는 이상한 힘이 있는 듯하다.(...) 

신록에 있어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이즈음과 같은 그의 청춘 시대-움 가운데 숨어 있던 잎의 하나하나가 모두 형태를 완전한 잎이 되는 동시에, 처음 태양의 세례를 받아 청신(淸新)하고 발랄한 담록(淡綠)을 띠는 시절이라 하겠다.​(...)

어떤 나무에 있어서는 불과 3, 4일이 되지 못하여, 그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은 지나가버린다. 그러나 이 짧은 동안의 신록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참으로 비할 데가 없다. >

21summer 2022-1 45.5×53㎝ oil on canvas / 사진제공 = 갤러리거제
21summer 2022-1 45.5×53㎝ oil on canvas / 사진제공 = 갤러리거제

나오미군지는 소나무 아래 잡목 없는 풀에 비친 빛이 좋았다. 풀은 초록빛을 띠다 짙은 녹색을 띠며 바람이 거세지면 갈색으로 변한다. 사람의 인생도 순환한다. 

<나무들은 어느새 숲이 된다. 
무너진 나무 틈으로 빛이 들어간다. 
잠자던 씨앗이 눈을 비빈다. 

그날의 신록은 눈부시다.>(작가 노트 중에서)

나오미군지 작품은 인간의 삶과 그 여정에서 마주하는 풍경의 본령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시기별로는 20대인 1980년대 부터 최근작 까지 총 90여점이 출품되는 갤러리거제 전시 ‘직관의 시간’은 7월 3일까지 계속된다.  

심정택은 쌍용자동차, 삼성자동차 등 자동차회사 기획 부서에서 근무했고 홍보 대행사를 경영했다. 이후 상업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50여회의 초대전, 국내외 30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한 14년차 미술 현장 전문가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칼럼을 써왔고, 최근에는 미술 및 건축 칼럼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저서로는 '삼성의몰락', '현대자동차를 말한다', '이건희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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