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정에서 갈라선 매형과 처남

"황사영은 제 조카사위이지만 원수입니다. 그자는 죽어도 변치 않을 것입니다. ‘이백다록’은 이승훈입니다. 그는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정약용.
정약용.

충격이었다. 이승훈은 우의정 이병모가 주도하는 국문장에서 처남인 정약용이 자신을 천주교 신자인 베드로라고 주장하고, 본인은 천주교를 배교(背敎)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그저 하늘을 보고 웃고 말았다. 정치적 생존을 위해 스스로만 살고자 하는 처남에 대해 그는 분노를 버리고 그저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승훈은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국문장에 함께 있는 또 다른 처남 정약전을 묵묵히 바라 보았다. 자신의 처남인 정씨 형제들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지만 그들을 살리기 위해 더 이상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명문 평창 이씨 집안의 영재  

이승훈(李承薰)은 조선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학을 믿고 중국에서 신부로부터 최초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다. 이승훈은 조선 최고의 천재로 불렸음에도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끝내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승훈은 조선의 명문 가문으로 알려져 있는 평창 이씨 집안으로, 서울 남대문 밖 반석동에서 영조 재위 32년(1756)에 태어났다. 처남인 정약용보다는 6살 연상이었다. 이승훈의 부친은 이동욱으로 훗날 중국의 수도 연경에 가는 사신단의 서장관(書狀官)으로 갔다. 이승훈의 어머니는 실학자이자 정조시대 최고의 천재로 불리던 이가환의 누나였다. 이가환은 조선후기 실학의 선구자인 성호 이익 선생의 조카로, 정조가 채제공의 뒤를 이어 정승에 임명하겠다고 했던 사람이었다. 

당대 최고의 천재들이었던 정약용, 이덕무, 박제가 등 모두가 이가환을 스승처럼 받들었다. 그만큼 이가환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이가환 역시 정조가 죽고 나서 조선 천주교도의 우두머리라는 죄명으로 사형을 당해 죽었다. 정적 제거의 대표적인 수단이 바로 천주교라는 이념논쟁이었다. 오늘로 치면 무조건 빨갱이 타령과 같은 것이다.

이승훈의 어머니가 이처럼 대단한 인물의 누나였으니 이승훈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성호 이익 선생의 조카로 실학적 학풍이 가득한 집안에서 성장한 이승훈의 어머니는 남편 못지않게 이승훈에게 주자성리학만이 세상 학문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은연중에 강조하였을 것이다. 뛰어난 부모를 만난 자식들은 다른 이들보다 분명 행운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면에서 이승훈은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라 남들보다 특별한 혜택을 받은 것이다.

이승훈, 정약용 집안의 가족이 되다

소수 세력이었던 경기도 일대의 남인 가족들은 다른 당파들과 달리 가족간의 애정이나 끈끈함이 남달랐다. 이승훈의 부친 이동욱은 영조 42년(1766)에 정시 문과에 급제한 수재로서 일찍부터 영조의 기대를 받았던 인물이었다. 영조는 이동욱과 함께 정약용의 부친인 정재원을 총애하였는데, 아마도 이 두 사람은 조정에 출사하여 더욱 가까워졌을 것이다. 결국 이 두 사람은 사돈관계를 맺게 되어 이승훈과 장약용의 누나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승훈 초상화.
이승훈 초상화.

이로써 이승훈은 나주 정씨 집안의 식구가 되었고 정약용, 정약전 등 당대를 풍미할 걸출한 인물들과 새로운 세상을 여는 주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것이 정약용 형제들과 이승훈의 운명이었다.

이승훈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비범하여 20세부터 저명한 석학들과 사귀면서 학문과 경서에 힘쓰기 시작하였다. 정조 4년(1780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이후 과거를 단념하고 오로지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아마도 이는 한해 전에 있었던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였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정조 3년(1779)에 정약전의 스승인 녹암 권철신이 주도한 천진암 강학회는 한국 천주교회의 성립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이 강학회에 참석했던 인물들은 훗날 천주교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이승훈은 정약전, 정약용 등 처가집 형제들과 함께 강학회에서 새로운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천주교를 받아들이면서 내세(來世)에 대한 고민속에서 문과에 합격하여 조정에 출사하는 것을 덧없이 생각했을 것이다. 어쨌건 이승훈은 진사시험만 합격하고 더 이상 과거시험을 보지 않았고 오로지 수행과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조선 천주교 성조(聖祖) 이벽과의 만남

천진암 강학회에서 이승훈과 사귄 이벽은 그에게 북경에 다녀올 것을 권고하였다. 당시 조선의 젊은 선비들은 모두 북경에 다녀오는 것을 소망하였다. 이미 노론 계열의 젊은 실학자였던 박제가, 이덕무 등이 북경을 다녀왔기에 남인의 젊은 학자들도 북경에 다녀오고 싶어하였다. 하지만 이벽이 이승훈에게 북경에 다녀오기를 권고한 것은 단순히 북학(北學)의 개념속에서 청나라의 문물을 배우고 오라는 것이 아니라 북경의 천주교회에 다녀오기를 기원했기 때문이다.

아담 샬
아담 샬

이벽이 천주교를 접하게 된 것은 그의 6대 조부 이경상 때문이었다. 이경상은 병자호란 때 심양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를 8년간이나 가까이 모셨다. 이때 소현세자는 북경의 동화문 동화관에 머물면서 당시 북경의 남당 천주교회에 선교 활동을 하던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신부와 접촉하였다. 이경상은 소현세자를 가까이 모시면서 함께 청국과 서양의 문화에 접촉하였다.

다행히 이승훈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이승훈의 부친 이동욱이 정조 7년(1783)에 중국으로 가는 동지사(冬至使) 사행단에 서장관으로 포함돼 북경에 가게 되었다. 이때 이승훈은 아버지 이동욱의 자제군관으로 선발되어 북경에 갈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 

조선시대 북경으로 사행을 떠나는 사신단의 책임자인 정사(正使)는 5명, 부사(副使)는 3명, 서장관은 1명을 자제군관으로 데려갈 수 있었다. 연암 박지원이 과거에 합격한 조정의 관리가 아니었음에도 북경에 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팔촌형인 박명원이 사행단의 우두머리인 정사(正使)였기에 그의 자제군관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벽의 특별한 주문

이승훈이 북경에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돈인 이벽은 즉시 이승훈을 찾아갔다. 그리고 이승훈에게 매우 의미있는 이야기를 하였다. 

“자네가 북경에 가게 된 것은 참된 교리를 알라고 하늘이 우리에게 주시는 훌륭한 기회일세! 성인들의 교리와 만물의 창조주이신 천주를 공경하는 참다운 방식은 서양인들에게서 가장 높은 지경에 이르렀네. 그 도리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것 없이는 자기 마음과 자기 성격을 바로잡지 못하네. 그것이 아니면 임금들과 백성들의 서로 다른 본분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것이 없으면 생활의 기초가 되는 규칙도 없네. 그것이 아니면 천지창조며 남북극이며 천체의 규칙적 운행을 우리는 알 수가 없네. 그리고 천사와 악마의 구별이며 이 세상의 시작과 종말이며 영혼과 육신의 결합이며 죄를 사면하기 위한 천주 성자의 강세이며, 선한이는 천당에서 상을 받고 악귀는 지옥에서 벌을 받는 것 등 이 모든 것도 우리는 알 수가 없네.”

천주교 종교서적을 아직 모르고 있던 이승훈은 이벽의 말을 듣고 크게 놀라고 감탄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벽에게 서학과 연관된 책을 몇 권 보고자 하였다. 이벽은 이승훈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책인 ‘천주실의(天主實義)’ 등을 보여주었다.

천주실의
천주실의

이승훈은 이벽이 가지고 있던 책들을 대강 읽어보고 나서 기쁨이 넘쳐 자기가 북경에 가서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이벽은 이승훈이 북경에 가게 된 것은 천주가 조선을 불쌍히 여겨서 구원하고자 보낸 것이니, 북경에 있는 천주당에 가서 신부들을 만나 모든 것을 물어보고 교류를 하고 예배와 관련된 것을 자세히 알아보라고 하였다. 

이벽의 이같은 이야기를 들은 이승훈은 엄청난 사명감을 갖게 되었고 이벽의 말을 스승의 말처럼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기들의 공통된 소원 실현을 위하여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다.

이승훈,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다

결국 이승훈은 이벽의 권고대로 북경에 가서 4곳의 성당중의 하나인 ‘북당(北堂)’을 찾아가 그라몽(Grammont : 梁棟材) 신부를 만나 그에게 수학을 비롯한 서양 과학 서적을 얻고 천주교 교리를 습득한 후에 조선 천주교회의 초석이 되라는 의미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영세를 받았다. 이는 한국 천주교회사에 기념비적인 일이다. 그가 어떻게 그라몽 신부에게 영세를 받게 되었는지 상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조선에서 건너온 젊은이의 신앙적 열기에 그라몽 신부가 감동하여 영세를 준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때 북경에 있던 선교사 방답 홍 신부가 1784년 11월 25일에 서양의 자기 친구들에게 이 기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적어 보냈다 

“조선 사신들이 작년 말에 왔는데 그들과 그들의 수행원들이 우리 성당을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종교 서적을 주었습니다. 이 양반 중 한 분의 아들은 나이 27세인데 이승훈이라고 합니다. 그는 서적들을 열심으로 읽어 거기에서 진리를 발견하였고 또 천주의 은총이 그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에 교리를 깊이 연구한 다음 입교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에게 성사를 주기 전에 그에게 많은 문제를 물어보았는데, 그는 모두 대답을 잘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중에서도 만일 왕이 그의 행동을 못 마땅이 생각하여 신앙을 버리라고 강요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결심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서슴지 않고 자기가 그 진리를 명백히 하는 종교를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형벌을 감수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또 복음이 가르치는 순결은 여러 여자를 데리고 사는 것을 용인지 않는다는 것도 잊지 않고 알려주었더니 그는 법적인 아내 밖에 없고 또 다른 여자를 결코 얻지 않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출발하기 전에 그 아버지의 승낙을 얻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라몽 신부가 ‘베드로’란 본명으로 그에게 영세를 주었습니다. 그의 성은 이가이며 왕가의 인척이랍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면 인간의 공명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시골로 물러가 자기 영혼을 구하는 데만 전력하고자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우리에게 소식을 전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북경에 있는 서양 신부들은 이승훈에게 영세를 주고 조선에 천주교를 보급한 것을 너무도 귀하게 생각한 것이다. 이와같이 다른 나라에서 천주교를 신앙하겠다고 신자가 찾아온 것은 세계 천주교회사에서도 매우 특이한 일이다. 더욱이 그 나라의 최고 명문 거족이자 장차 나라를 이끌어갈 지도자가 될 사람이 찾아왔으니 서양 신부들의 기쁨은 놀랄 만한 일이었다.

평등정신을 추구한 이승훈

이승훈은 북경에서 천주교 서적과 성물(聖物)을 받아서 정조 8년(1784) 3월에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이승훈이 귀국하던 시기에 이미 조선에서는 사돈인 이벽을 중심으로 자생적인 천주교 교리 연구가 활성화되어 있었다.

이승훈은 귀국하자마자 조선 천주교 신자들의 부탁으로 사제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진짜 신부는 아니었기 때문에 임시 대리하는 사제인 ‘가사제(假司祭)’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승훈은 그해 겨울 정약전과 정약용, 이벽, 권일신, 이존창, 홍낙민 등과 역관 최창현, 김범우 등에게 영세를 주었고 곧바로 신앙집회를 열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조선에서 최초로 천주교회가 성립된 것이다.

이벽의 묘.
이벽의 묘.

정약용은 이승훈이 친누이의 남편이자 학문적 동반자였기에 그가 말하는 천주교 신앙에 적극적이었다. 정약용이 훗날 동부승지를 사직하는 상소를 보면 이승훈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컸는지 자세히 알 수 있다. 이승훈이 단순히 천주교를 전파한 신앙인으로서가 아니라 평창 이씨 가문과 여주 이씨 가문의 실학적 기풍을 실천하고 노력한 것을 정약용의 글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성호 이익이 직접 논에 들어가 농사를 지었던 것을 알고 있었던 이승훈은 평등 정신속에 신분 차별만이 아닌 남녀의 차별도 없애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는 신분 고하를 가리지 않고 천주교를 통해 평등정신을 실천하였다. 여인들에게도 차별을 하지 않았고, 노비들도 해방시킬 준비를 하였다. 그가 바로 노비를 해방시키지 않은 것은 너무 급하게 추진하였을때 천주교가 오히려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승훈이 천주교 신앙에 매진하였던 것은 오래도록 고민했던 평등정신을 실현할 도구로 봤기 때문일 것이다.

사교(邪敎)의 우두머리, 이승훈

이승훈이 주도하는 천주교 신앙집회는 끝내 발각되고 말았다. 정조 9년(1785)에 오늘의 명동성당이 자리잡은 명례동에 있던 역관 김범우 집에서 미사를 드리던 중 적발됐다. 이때 정약용이 함께 있었던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형조의 나졸들에게 발각된 이른바 ‘을사추조 적발사건’으로 김범우가 투옥되고 예수의 성상이 압수되었다. 이 사건으로 서학은 사교(邪交)로 지목받기 시작하였고, 이승훈은 사교의 우두머리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오히려 이승훈은 정조의 총애로 평택현감에 제수받았다. 정조가 이승훈을 얼마나 총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정에서 천주교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조정의 논의를 피하게 하기 위해 정조가 정약용을 지방의 수령으로 보냈 듯 이승훈도 평택현감으로 보낸 것이다.

평택현감으로 있던 이승훈은 정조 15년(1791)에 전라도 진산에서 정약용의 사촌 형제인 윤지충, 권상연이 천주교 신앙 때문에 어머니의 신주를 불사른 사건이 발생하자 사교의 우두머리를 탄핵해야 한다는 상소로 곤궁에 처하게 되었다. 

정약용의 친구였다가 그를 배반한 이기경이 ‘사서(邪書)를 열독함은 장차 천하를 뒤집으려는 심산’이라고 모함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승훈은 의금부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지만 아무런 증거가 없어 무죄로 석방되어 평택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승훈을 제거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었다. 조선시대는 수령으로 부임하여 3일 내에 향교의 대성전에 가서 공자 위패에 절을 해야 하는데, 이승훈이 부임하고 나서 향교에 들려 낡은 건물 수리만 지시하고 공자에게 절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 탄핵을 요구하였다. 결국 정조도 어쩔 수 없이 이승훈을 충남 예산으로 유배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이승훈은 5년간 유배 생활을 하다가 정조 20년(1796)에 해배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천주교 창립 초기 집회인 강학회. (사진=천진암성지 회보 19호)
천주교 창립 초기 집회인 강학회. (사진=천진암성지 회보 19호)

이승훈, 평등을 실현하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이 되다

정약용과 더불어 조선 사회를 개혁시키고자 노력했던 이승훈에게 비극이 찾아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정조의 죽음이었다. 정조의 죽음 이듬해인 순조1년(1801) 2월 9일 이승훈의 외삼촌인 이가환, 처남 정약용 등과 함께 의금부에 수감되었다. 정조의 반대 세력들은 대비인 정순왕후와 함께 개혁 세력들을 제거하기로 하였다. 

신분제도를 없애고 백성들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은 기득권들에게 존재해서는 안되는 인간들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천재라는 이름으로 백성들로부터 존중을 받고 있었고, 허세와 위선이 아닌 실학정신으로 무장하여 백성들의 삶속에 함께 있었다. 그래서 더욱 무서운 존재들이었다. 만약 그들이 계속 세상에 남아 평등이라든가, 신분 해방이라든가 하는 이상한 소리를 외치면 기득권 사회의 구조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고 노론 세력들은 판단한 것이다. 그 중심에 이승훈이 있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결국 이승훈은 반드시 죽여야 할 대상이었다.

정순대비를 중심으로 하는 권력의 주체들은 가장 무서운 인간인 이승훈과 이가환을 죽이기로 결정하였다. 정약용과 정약전은 천주교 배교의 문서들이 존재하였다.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이 자기 형제들을 살리기 위해 정약용과 정약전이 배교했다는 문서를 들고 의금부로 왔기 때문에 이 두 형제는 죽일 수 없었다. 

하지만 이승훈은 그렇지 않았다. 아마도 정치적 생존을 위해 무던히 애썼던 정약용과 노론 세력이 은밀한 타협을 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노론 기득권은 정약용보다 더욱 과격한 신분해방주의자 이승훈을 죽이는 것으로 종교라는 이름으로 하는 탄압을 정리하기로 한 것이다. 

결국 이승훈은 천주교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2월 26일 정약종,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등과 함께 서소문 네거리에서 참수되었다. 조선 사회를 개혁하고 백성들을 평등한 사회로 만들어 갈 수 있는 미래의 지도자가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조선의 비극이었다. 

이승훈의 묘
이승훈의 묘

이승훈의 시신은 집으로 옮겨졌다가 인천에 매장되었다. 그 뒤 그의 후손들이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인 천진암으로 옮겨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조선 사회의 개혁 사상가였던 이승훈은 현실 사회에서 실학정신으로 사회적 변화를 추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교(邪交)의 우두머리란 이유로 그의 사상이 현실에 크게 반영되지 못하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오늘 이 글을 통해 그의 신분제도의 모순을 바로잡고자 했던 미완의 항거를 재조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승훈이 서소문 네거리에서 참수당하기 전에 지었던 절명시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月落在天 水上池盡(월락재천 수상지진)”  
“달이 지더라도 하늘에 있고, 물이 넘쳐도 연못에 가득하네” 

세상과 백성을 사랑했던 자신의 변함없는 마음을 남긴 것이리라! 
삼가 이승훈의 명복을 빈다. 

김준혁은 역사학자다. 정조(正祖)가 건설한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의 경제적 기반인 대유평(大有坪)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다. 이런 인연으로 ‘정조’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화성의 복원 등에 참여하였고, 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을 지냈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를 거쳐 2014년부터 한신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조, 새로운 조선을 디자인하다>,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리더라면 정조처럼> 등 정조 관련 다수의 저서가 있다. 오랫동안 수원에서 시민운동을 하였고, 촛불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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