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한 음식이 나왔습니다. 고풍스러운 웨지우드 접시 위에 놓인 정갈하고 식감 넘치는 스테이크가 실버 포크와 나이프 사이로 부드럽게 밀려 들어왔습니다. 보기만 해도 절반의 식사가 끝난 듯한 아름다운 미각이 입을 향해 올라오고 있는 디너입니다. 성스러운 날이라서일까요? 식탁 위 리델 와인 잔엔 보르도의 샤또파프클레망이 찰랑거리고 있습니다. 그 공간을 은은하게 꽉 채운 차이코프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 스트링 콰르텟은 그 테이블의 미각을 더욱 돋우면서 그 식사의 템포도 분위기에 맞춰 조절해주고 있습니다. 빈번하게 두 눈을 마주치는 연인의 눈망울엔 차오르는 행복감이 비칩니다. 특별한 날입니다. 그들 가슴에선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고 있을 것입니다.

그 홀을 가로지르는 벽 안쪽 갇힌 공간엔 그 음식을 요리한 주방이 있습니다. 조금 전 그곳의 분위기는 식탁이 있는 바깥 홀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피가 튀고 털이 날아다니는 살육의 현장이었습니다. 예리한 대도로 핏물 떨어지는 정육을 자르고 화염이 치솟는 프라이팬 위로 그 덩어리가 던져졌습니다. 사이드 디쉬를 다듬는 도마 위 칼질은 흡사 귓전을 때리는 망치 소리와도 같았고, 가스불 위 탕기에 담긴 끓는 물로 인해 공간은 안개와도 같은 하얀 김으로 자욱했습니다. 요리에서 탈락한 육식과 채식의 찌꺼기들이 싱크대 상면과 바닥을 어지럽히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안단테 칸타빌레는 들리지도 않고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포르테에서 포르티시모로, 때론 포르티시시모로, 그리고 프레스토만이 있는 작업 현장이었습니다. 이윽고 요리는 완성되어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하고 예쁜 접시에 올려진 스테이크는 테이블이 있는 홀로 향했습니다. 늘 반복되는 셰프의 일상 중 하나가 끝났습니다.

철 지난 영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위에 먼저 등장한 식탁의 영화는 1990년 개봉하여 불멸의 고전이 된 <시네마 천국>입니다. 그리고 아래 등장한 주방의 영화는 최근인 2023년 2월 개봉했던 <바빌론>입니다. 이 두 영화는 제 마음속에 이렇게 주방과 식탁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물론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바빌론>이라는 영화는 제가 이렇게 회고하며 글을 쓸 정도로 흥행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그 이상 가는 작품이라 생각하는데, 국내 개봉 시 20만명 관객 동원에 그쳤으니 말입니다. 예상에 못 미친 흥행 저조는 전 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출한 감독이 <위플래쉬>, <라라랜드> 등의 훌륭한 필모그래피를 가진 데이미언 셔젤이고, 흥행 보증수표 격인 할리우드의 스타 브래드 피트와 마고 로비가 출연했으며, 제작비가 무려 8,000만달러나 들어간 블록버스터이니 크게 흥행했을 법도 한데 그렇지는 못 한 것입니다.

'라라랜드'와는 전혀 다른 천사의 도시 LA를 보여준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바빌론', 2023
'라라랜드'와는 전혀 다른 천사의 도시 LA를 보여준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바빌론', 2023

물론 흥행한 영화가 모두 다 좋은 영화는 아닐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바빌론>은 개봉 전 예고부터 일으킨 파란만큼이나 개봉 후에도 논란이 많았던 파격적인 영화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일단 통상의 영화는 아름다운 식탁을 보여주는데, 그 영화는 지저분한 주방을 보여줬으니까요. 그 퇴폐적인 <바빌론>에 난데없이 우아한 <시네마 천국>을 호출한 이유는 그 영화가 위의 주방과 식탁만큼이나 시차를 둔 극명한 대비점도 있지만 같은 재료의 음식을 다루고 있는 공통점도 있기에 그렇습니다. 물론 그 공통점은 영화이지만 더 정확히는 영화 사랑입니다. 그것도 이 두 영화는 영화를 심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시네마 천국> 이전에 <바빌론>이 있었습니다. <시네마 천국>은 1940년대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바빌론>은 1920년대 미국의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합니다. 영화는 대도시인 LA의 이곳저곳과 뉴욕의 모습도 보여줍니다. <바빌론>은 무성 영화 시대의 열정적인 배우와 제작자, 그리고 제작 현장을 보여주지만 <시네마 천국>은 초기 고전 영화에 심취된 열정적인 관객과 종사자를 보여줍니다. <시네마 천국>은 이미 영화 속 월드 스타가 되어버린 꼬마 토토의 성장 영화로 그의 평생의 연인 엘레나와의 아름답고도 안타까운 로맨스와 알프레도 할아버지와의 세대를 뛰어넘는 인연을 다룬 인생 영화지만, <바빌론>은 거두절미하고 완벽한 성인들의 영화입니다. 물론 그 안에도 천방지축, 통제불능의 팜므파탈인 넬리 라로이(마고 로비)를 사랑하는 멋진 남자 매니 토레스(디에고 칼바)가 등장은 합니다. 매니는 모두가 타락한 영혼을 가진 <바빌론>에서 그나마 가장 순수하고 정상적인 캐릭터의 인물입니다. 그 역시 토토가 엘레나를 오랜 시간 기다렸듯이 넬리를 기다렸습니다.    

영화의, 영화에 의한, 영화를 위한 불멸의 고전 '시네마 천국', 1990
영화의, 영화에 의한, 영화를 위한 불멸의 고전 '시네마 천국', 1990

<바빌론>은 디오니소스적인 축제의 영화입니다. 신화 속 그리스의 그 축제를 가본 적은 없지만 지난 2월 영화를 본 당시 저의 기분은 마치 그곳을 다녀온 듯했습니다. 나쁜 기분이고 나쁜 경험이었습니다. 그 축제는 주술과 종교적인 예식으로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 흥겹고 즐거운 구간을 지나 광란과 광폭을 향해 치달았습니다. 술과 마약이 스크린의 배우들을 취하게 만들어 그들의 이성은 마비되고 모습은 짐승과도 같이 변하였습니다. 마침내 <바빌론>은 환각과 최면으로 뒤덮여 배설과 살육의 현장인 카니발로 변했습니다.

영화 속 그 어느 누구도 그것을 제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무성 영화의 인기 스타인 잭 콘래드(브래도 피트)도, 신인 배우인 넬리도 그러기는커녕 그들도 그 속으로 함몰되어 갔습니다. 지옥문이 열려 스틱스 강을 건너 명부의 신 하데스가 지배하는 어둠의 세계로 들어간 것입니다. 남자 주인공인 매니만이 <바빌론>을 빠져나오려 허우적거릴 뿐이었습니다. 결국 그들 모두는 행복하지 않은 파국을 맞습니다. 무성 영화가 유성 영화에 잡아 먹혀 그 한 시대가 끝났듯이 그들의 영화 인생도 그렇게 소리 없이 끝난 것입니다. <시네마 천국>에서 토토에게 인생에 대해 알려주는 알프레도 같은 동네 할아버지나 지혜로운 토토의 엄마와 같은 신화 속 아폴론과 같은 존재가 <바빌론>엔 없었습니다.

디오니소스의 카니발과도 같은 '바빌론'의 파티 장면
디오니소스의 카니발과도 같은 '바빌론'의 파티 장면

음악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네마 천국>을 떠올리면 우린 아.. 그 음악부터 떠올립니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아름다운 그 음악을 말입니다. 역대 영화 ost 중 그 어떤 차트를 보아도 탑 리스트에 올라있는 그 음악입니다. <바빌론>에도 당연히 음악이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있습니다. 감독은 소리가 없는 무성 영화를 소재로 한 이 영화에서 마치 소리로 복수라도 하듯이 시종일관 음악을 때려 넣었습니다. 예상되듯이 그 음악은 <시네마 천국>의 음악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클래식은 들리지 않습니다. 그 시대를 풍미한 재즈와 스윙만이 들리는데 하도 집요하게 그 음악을 남발해서 때론 그 음악이 위의 주방의 망치질과 같은 소음으로 들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음악을 주도하는 악기는 고음의 트럼펫과 저음의 바리톤 색소폰으로 그 둘은 서로 마치 누가누가 이기나 경쟁하듯이 영화 내내 스크린을 울려댔습니다. 특히 묵직한 바리톤 색소폰 소리는 마치 <왕벌의 비행>처럼 글을 쓰는 지금도 제 귀에 윙윙 대며 환청이 들리는 듯합니다. 저음임에도 고음의 트럼펫보다 강하게 느껴진 그 악기에 환청은 물론 환각 효과도 있는 듯했습니다. 영화를 본 그날은 제가 평생 들은 바리톤 색소폰보다 더 많은 그 악기의 소리와 연주를 <바빌론>에서 듣고 감상했습니다. 과연 음악 감독을 맡은 저스틴 허위츠는 전작인 <위플래쉬>에선 타악기인 드럼으로 제 귀를 그렇게 즐겁게 괴롭히더니 이번엔 바리톤 색소폰으로 저를 때렸습니다. 그 음악을 들으며 <시네마 천국>의 ost를 들을 때처럼 눈물짓는 관객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시네마 천국>과 <바빌론>에서 남자 주인공인 토토와 매니는 모두 한 여자를 사랑합니다. 토토는 청소년기에 시칠리아의 파란 하늘 아래에서 화장기 없는 얼굴에 긴 원피스를 입은 소녀 엘레나를 만나지만 매니는 매캐하고 화려한 파티장과 정신없이 돌아가는 영화 세트장에서 짙은 화장을 하고 마약에 절어있는 숙녀 넬리를 만납니다. 그래서 <시네마 천국>은 영화의 상징과도 같은 청순한 키스를 떠올리게 하지만 <바빌론>은 난잡한 섹스를 연상하게 합니다. 그래도 토토와 매니가 엘레나와 넬리를 사랑하는 마음은 같았을 것입니다.

'시네마 천국'의 엘레나와 토토의 첫 키스
'시네마 천국'의 엘레나와 토토의 첫 키스
'바빌론'의 넬리와 매니의 첫 만남.
'바빌론'의 넬리와 매니의 첫 만남.

<시네마 천국>에서 토토는 부유한 엘레나 집안의 반대로 그녀를 잃었지만 대신 알프레도의 권유로 고향을 떠나 로마에서 유명한 영화 감독이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알프레도에게 매달리고 쫓아다니며 그렇게 영화를 좋아하더니 결국 영화로 입신양명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사랑하고 기다린 엘레나가 부재하여 그는 미혼인 상태로 살게 됩니다. 아, 동거녀들은 계속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토토와 엘레나의 불발된 마지막 만남에 대한 비밀은 감독판 버전으로 재개봉한 <시네마 천국>에서 밝혀집니다. 놀랍게도 그 이유는 언제라도 아버지와 같이 토토의 편이 되어줄 것만 같은 알프레도가 만남 약속이 적힌 그녀의 편지를 토토에게 전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토토의 성공을 위해 그녀와의 사랑을 희생시킨 것입니다. 토토와 엘레나는 이별 30년 후 시칠리아에서 꿈같은 재회를 하지만 이미 애 딸린 유부녀가 되어버린 그녀이기에 그 현실을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바빌론>에선 오로지 하룻밤 사랑과 눈앞에 보이는 쾌락과 이익만을 좇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 세계에서 파경과 이혼은 밥먹듯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 어둠의 세계에서도 매니는 사랑하는 여인 넬리로 인해 그까지 굉장한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결정적으로 그는 그녀를 사지에서 구해내기 위하여 그가 그토록 좋아하던 영화 일까지 포기합니다. <시네마 천국>의 토토와는 반대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사랑을 위해 영화를 포기한 남자가 매니라면 토토는 영화를 위해 결과적으로 사랑을 포기한 남자였으니까요. 하지만 넬리는 매니가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정상적인 현실로 돌아올 수 없는 여자였습니다. 바빌론에 함몰되어 가고 있었으니까요. 결국 넬리는 무성 영화라는 제목의 영화 속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영화 같은 현실에서 사라졌습니다. 매니만이 그곳을 빠져나와 현실 세계로 돌아갔습니다.  

무성 영화 시대와 몰락을 함께 한 'Babylon'의 Babylonians
무성 영화 시대와 몰락을 함께 한 'Babylon'의 Babylonians

위에서 언급한 영화 사랑이라는 두 영화의 공통점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피날레입니다. <시네마 천국>과 <바빌론> 두 영화의 피날레 장면은 놀랍게도 유사합니다. 일단 둘 다 모두 스크린 속에 또 스크린이 등장합니다. 저는 이 <바빌론>의 끝 장면을 보며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시네마 천국>의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을 오마주 했구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 역시 그 영화를 보고 영화감독을 꿈꾼 토토 키즈일 수 있으니까요.

<시네마 천국>에선 영화감독이 된 토토가 로마의 집으로 돌아와 알프레도가 남긴 유품인 필름을 보는 장면으로 끝이 납니다. 과거 심의에 걸려서 상영하지 못하고 가위질당한 남녀 배우들의 키스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줄줄이 나오는 바로 그 장면입니다. 그 필름을 보며 토토는 무언가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복받쳐 눈물을 짓습니다. 30년 만에 간 고향인 시칠리아의 마을에서 엄마를 만나고, 알프레도의 장례식을 치르고, 그와 함께 지냈던 극장이 폭파되는 장면을 보고 온 그였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보고팠던 엘레나와도 만나고 온 그였기에 그 키스 장면들은 그에게 복합적이고 절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네마 천국'의 토토와 엘레나의 30년 만의 재회
'시네마 천국'의 토토와 엘레나의 30년 만의 재회

<바빌론>에선 정상적인 가정을 꾸린 매니가 1952년 가족들과 함께 그가 일했던 LA를 방문합니다. 그는 그간 뉴욕에서 잠수를 타며 라디오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LA에서 그는 극장에 들어가 그 해에 개봉한 뮤지컬 영화인 <사랑은 비를 타고>를 감상하는데 영화 속 배우들이 유성 영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의 과거를 회상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아마도 그의 보스였던 잭과 사랑했던 여인인 넬리가 떠올라서 그랬을 것입니다. 이윽고 그가 보는 스크린엔 영화 역사에 최초의 영화로 꼽히는 <열차의 도착>부터 현대에 오기까지 시대를 전환시킨 화제작들이 줄줄이 등장합니다. <찰리 채플린> 시리즈, <오즈의 마법사>, <싸이코>, <벤허>, <터미네이터>, <쥬라기 공원>, <아바타> 등의 장면들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입니다. 영화광일 수밖에 없는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비현실적으로 처리했을 것입니다. 매니는 그 영화들을 보며 계속해서 눈물을 짓습니다.  

<시네마 천국>이라는 제목은 토토가 어린 시절을 알프레도와 함께 보냈던 동네의 극장 이름입니다. 엘레나와의 첫 키스도 그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화재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았던 그 극장은 시대의 변화를 지탱하지 못하고 어른이 된 토토가 보는 앞에서 폭파되어 사라졌습니다.

<바빌론>의 유래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도시 이름이고 그 왕국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화려했던 문명과 강한 힘으로 그 지역의 맹주가 되어 유대인에게 바빌론 유수의 고통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그들을 포로로 끌고 가 60여년 간 노예 생활을 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 구원으로 인해 기독교 문명의 서구 역사에서 바빌론은 대개 좋지 않게 등장하곤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36년을 빼앗아 간 일본을 그렇게 생각하듯이 말입니다. 특히 신약 성서의 요한계시록엔 바빌론을 타락, 증오, 악덕, 음행의 도시로 소돔과 고모라 이상으로 나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계시록을 저술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요한은 그의 생존 600년 전 조상이 겪은 일임에도 바빌론을 그렇게 저주하였습니다.

고대 문명 강국 바빌론의 화려한 공중 정원과 바벨탑 상상 이미지
고대 문명 강국 바빌론의 화려한 공중 정원과 바벨탑 상상 이미지

바빌론엔 바벨탑이 있었습니다. 저는 <바빌론> 영화를 보며 무성 영화 시대의 몰락을 바빌론이라는 도시뿐만이 아닌 이 바벨탑에도 비유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건방이 하늘을 찔러 하늘과 직접 소통하겠다고 올라가던 탑이 하느님의 천벌을 받아 공사가 종결되었듯이 화려했던 무성 영화의 시대도 그렇게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때 바벨탑을 올린 사람들이 받은 벌은 언어의 혼란이었습니다. 여러 언어로 말이 뒤섞여 소통이 되지 않아 공사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고 끝난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 등장한 많은 언어들을 유성 영화의 등장으로 본다면 그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말과 소리에 적응하지 못해 무성 영화와 그 세대가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교만과 타락의 도시 바빌론에도 사랑의 흔적이 있습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라 불리는 신비한 공중정원이 그것입니다. 그 정원은 유대 왕국을 멸망시킨 네브카드네자르(성서명 느부갓네살)왕이 고향의 산천초목을 그리워하는 이민족 왕비를 위해 만들어준 것이었습니다. 황량한 사막에 붉은 꽃을 피우고 푸른 초목을 자라게 한 것입니다. 그녀를 향한 사랑의 힘으로 그것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영화 <바빌론>에서 죽음까지도 불사했던 매니에겐 넬리가 그녀와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하광용은 대학 졸업 후 오리콤, 이노션 등에서 광고인 한 길로만 가다가 50세가 넘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세상사 이때 저때, 이곳 저곳, 이것 저것, 이사람 저사람에 대한 인문학적 관심이 많다. 박학다식한 사람은 깊이가 약하다는 편견에 저항한다. 그래서 그는 르네상스적 인간을 존경하고 지향한다. 박학과 광고는 어찌보면 ‘넓다’라는 측면에서 동일성을 지닌다. 최근 ‘지명에서 이순으로의 기행’이라는 인문교양 에세이집을 출간한 그는 태평양인문학교실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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