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포스트, “이태원 참사, 1995년 삼풍 유령 소환” 비판

워싱턴포스트 “책임있는 공직자 책임회피 27년 전과 같아"

이태원 참사 어처구니 없지만, 한국도 ‘시스템 사회’로 변화 중

미국도 어린이 대상 총기난사 반복 방지 못한 병폐 드러나

지난 1995년 6월29일 오후 6시 무렵 기자가 내근을 하던 한국일보 사회부에 독자들의 제보 전화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제보자들은 긴박한 목소리로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믿을 수 없는 제보 전화에 혼이 나가 있는데, 얼마되지 않아 방송에서 뉴스 속보가 흘러나왔고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가라는 취재지시가 떨어졌다.

이렇게 시작된 붕괴참사 취재는 한달 가까이 이어졌고, 백화점 인근에 텐트를 치고 거의 노숙을 하다시피 구조 현장을 지켜야 했다. 당시 무너진 왼쪽 건물과는 달리 오른쪽 동은 외관상으로는 멀쩡했지만, 건축 구조상 붕괴가 우려된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하지만 무너진 지하 현장 측면으로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오른쪽 건물 밖에 없어 응급 구조대원과 자원봉사자들은 목숨을 걸고 구조 작업을 벌여야 했다.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소식을 전하고 있는 6월 30일자 한국일보 1면 보도. (한국일보 홈페이지)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소식을 전하고 있는 6월 30일자 한국일보 1면 보도. (한국일보 홈페이지)

기자도 처음 공개된 지하 현장에 경찰 및 구조대 관계자들과 투입돼 참담한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아비규환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당시의 현장은 아직도 간간히 꿈에 나타날 정도였다. 그런 참혹한 현장이었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돌더미를 헤치는 구조대원들의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502명이 숨진 붕괴 참사 27년 후 서울 이태원의 한 거리에서 156명의 젊은 목숨이 스러져간 또 다른 참사가 발생했다. 미국 유력지인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4일 ‘이태원 핼러윈 참사, 1995년 삼풍 붕괴의 유령을 소환하다’는 제목의 기사로 "한국사회가 지난 27년간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신문은 “삼품백화점 붕괴는 초고속 경제성장을 통한 현대화 과정에서 공무원과 건설업자들이 안전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면서 “안전을 위협하는 문제들을 용인해온 관행이 이번 이태원 참사에도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또 ‘한류’로 대표되는 한국 문화 중심지로 자리잡은 이태원에서 미국인 2명을 포함한 20여명의 외국인들이 사망했다는 점을 거론하며 “한국은 전세계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쿨’한 것이 있지만, 거기에 어울리는 책임감을 갖추진 못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책임질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전혀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는 점도 27년전과 달라지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한국은 정말 27년간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것일까? 한국 방송에 출연해 미국에서 바라본 한국의 문제점을 주로 지적해왔지만 막상 미국 언론이 작심하고 한국을 비판하자 이같은 문제에 대해 깊게 생각해 봤다.

결론적으로 삼풍백화점 참사 현장을 취재했고 한국에서 31년, 미국에서 22년을 살아온 기자는 ‘성장통 같은 아픔을 겪고 있지만 한국 사회도 안전시스템을 제대로 갖추기 위해 전진하는 중’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삼풍백화점 붕괴부터 세월호 참사, 이번 이태원 참사까지 대형 사건이 터질 때마다 한국에서 가장 먼저 배우려고 하는 것은 미국의 시스템이다. 삼풍백화점 참사 당시에도 한국 정부는 미국 연방 재난관리청(FEMA)의 종합적 대응방식을 도입했고, 이번 이태원 참사 이후 미국의 911처럼 112와 119신고를 통합하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대부분의 대응책들이 사건이 터진 후 제시되는 것들이어서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이라는 비판도 듣고 있지만 외양간을 다시 고치지 않으면 다시는 소를 키우지 못하는 법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가며 한국 사회도 조금씩 시스템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지적은 조금은 게으른 추론과 취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8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희생자 추모공간에 시민들이 적은 추모글과 꽃이 놓여 있다. (사진=뉴스1)
8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희생자 추모공간에 시민들이 적은 추모글과 꽃이 놓여 있다. (사진=뉴스1)

미국에서도 연방정부와 주정부, 로컬 정부가 각각 다른 시스템을 갖고 있어 각종 안전사고를 막지 못한다는 자성이 많다. 올해 발생한 텍사스주 유밸디 초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은 지난 2012년 발생한 코네티컷주 샌디훅 초등학교 참사의 복사판이었지만 10년만에 벌어진 똑같은 사건을 아무도 막지 못했다. 오히려 경찰 프로토콜의 허점까지 거론되며 지자체 경찰의 구조적인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한국사회가 미국 언론이나 정치인의 말에 너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그리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미국의 좋은 시스템은 배워야 하지만 한국의 상황에 맞게 응용하고 정착시켜야 한다. 마찬가지로 미국 언론의 지적도 적합한 부분은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비판적 시각으로 분석해야 한다.

이상연은 1994년 서울 한국일보에 입사해 특별취재부 사회부 경제부 등에서 기자 생활을 했으며 2005년 미국 조지아대학교(UGA)에서 저널리즘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애틀랜타와 미주 한인 사회를 커버하는 애틀랜타 K 미디어 그룹을 설립해 현재 대표 기자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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