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소설의 벨 에포크 7080's' 두 번째 이야기

"사라져가는 것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의 얼굴이 아니라 뒷모습만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한수산 작가의 초 베스트셀러 '부초'  (민음사 1977)
한수산 작가의 초 베스트셀러 '부초'  (민음사 1977)

정확히 100페이지, 소설 <부초>(민음사)에 나오는 말입니다. <부초>는 1970년대 유랑극단 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과 각 단원들의 개인사를 밀도 있게 다룬 한수산 작가의 소설로 그의 이름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린 최고 출세작입니다. 위의 문장은 우리나라가 수출 100억불, 1인당 국민소득 1000불을 목표로 대망의 1980년대를 향해 달려가던 1970년대 유랑극단이 처한 암울한 상황을 표현한 것입니다. 2024년 저는 첫 책으로 소설 <부초>를 읽었습니다. 난데없이 그 책을 집은 것은 저자인 한수산 작가를 만나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관여하는 인문학교실에 2월 강사로 그가 초빙되었습니다. 그래서 지 그전에 읽고 가야만 같아서 그 책을 찾은 것입니다. 고전이 된 소설에 거장이 된 작가의 만남까지 더해 1월 초 그 책의 첫 장을 넘길 때엔 흡사 목욕재계하는 기분까지 들었습니다.

사실 과거 <부초>가 한창일 때는 그 책을 읽지 못했습니다. 1977년에 출간되었으니 그 책을 읽기엔 제가 좀 어렸나 봅니다. 까까머리에 까만 교복을 입고 있었으니까요. 입시에서 벗어나 대학에 입학한 1980년대 초엔 이문열, 이외수, 김홍신 작가의 소설들을 나오는 족족 읽었습니다. 그들 각각의 처녀 베스트셀러인 <사람의 아들>, <들개>, <인간시장>을 처음 읽고 나서부터입니다. 제 앞에 그들이 나타난 1980년대 초는 그들이 가장 핫한 작가 그룹이었습니다. 제겐 그들이 순차적으로 내놓는 소설들이 코스 음식으로 치면 다 맛있는데 제 각각 다른 맛을 내는 별미라, 어느 하나 남기지 않고 다 읽어야 했습니다.

작가별로 작품별로 유사점이나 공통점은 없음에도 다 좋았다는 것입니다. 마치 당시 흥행 여배우 트로이카인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 씨처럼 말입니다. 그녀 3인도 각각 독특한 미모만큼이나 연기 또한 개성이 넘쳤지만 딱 1명을 뽑기 힘들 정도로 팬들은 그녀들을 다 좋아했습니다. 바로 전인 1970년대는 주로 남녀관계의 애정을 다루는 통속적인 소설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그녀들은 종종 소설 속의 여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소설이 인기를 끌면 예외 없이 영화로 제작되어 이들 여배우 트로이카가 돌아가면서 여자 주인공 역을 맡았으니까요. 이곳에 지난 회차에 쓴 <우리 소설의 벨 에포크 7080's>에 상세히 설명된 내용을 이 글에서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 글의 속편과도 같은 이 글입니다.

이렇게 저의 소설가 트로이카가 된 3인 중 이문열 작가는 1980년대 초 제가 다닌 대학에서 열린 특강의 강사로 초빙된 적이 있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그에게 매료된 저는 당연히 참석을 하였는데 강의실에서 본 그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아시아적 전제주의와 우리 역사..', 정확히 생각 안 나는 그날의 강의 제목도 생경하고 거창했지만 강의 시 그의 역사에 대한 박식함에 혀를 내두른 것입니다. 당시 읽은 소설인 <사람의 아들>, <젊은 날의 초상>, <황제를 위하여>와 당시 본 영화인 <안개마을> 이야기를 하는 줄 알고 갔다가 엉뚱한 역사 공부만 잔뜩 하고 왔습니다. 소설가를 만나러 갔다가 역사학자를 만나고 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안개마을>은 이문열 작가의 소설 <익명의 섬>을 영화화 한 작품으로 위의 여배우 트로이카 중 정윤희씨와 청년 안성기씨가 주연으로 나왔습니다.

그의 강의 소감을 엉뚱한 역사 공부라고 표현한 것은 이문열 작가의 역사 강의 내용이 제목에서 유추되듯이 중고 시절 학교에선 배운 적이 없는 내용이었기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20대 초에 들은 그의 강의는 제가 평소 생각해 왔던 소설가라는 사람의 상식을 깼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강의 내용까지 생각나는 것은 아닙니다. 부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강의 제목에서 보듯이 워낙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까요. 생각해 보니 그렇게 감동받은 <사람의 아들> 줄거리도 거의 생각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땐 그와 쌍벽이라 여기며 읽었던 이외수 작가의 <들개>나 <칼>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전인 중고 시절 읽은 앙드레지드나 헤르만 헷세의 소설들은 지금도 내용이 생각나는데요. 그리고 중학교 때 신문을 통해 훔쳐서 본 최인호 작가의 연재소설 <불새>도 기억이 나는데 말입니다. 사람의 기억력이란 그런가 봅니다. 인류 역사상 20대 이후에 천재로 밝혀진 사람은 없다는 말에 공감이 되는 저의 예입니다.  

이문열 작가는 <사람의 아들> 출간 해인 1979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습니다. 그 상은 오늘날까지도 끊기지 않고 수상자를 배출하는 권위 있는 상입니다. 그 2년 전인 1977년엔 역시 7080년대 우리 소설의 벨 에포크에 한 획을 그은 한수산 작가가 <부초>로 그 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그 상의 초대 수상자입니다. 이 글 인트로에 밝힌 지난 2월 한수산 작가의 강연은 젊은 날 이런 문제작인 <부초>를 읽지 않은 제가 다시 그 책을 읽을 최적의 타이밍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염려된 점은 출간된 지 거의 50년이 지난 작품이라 서점에 있을까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부초>는 지난 긴 세월에 떠나가지 않고 아직도 꿋꿋하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오늘도 그렇겠지요.

'부초' 를 읽고, 한수산 작가의 강연을 들은 후 그에게 받은 그 책의 저자 사인. 표2엔 그의 젊은 날의 모습이..
'부초' 를 읽고, 한수산 작가의 강연을 들은 후 그에게 받은 그 책의 저자 사인. 표2엔 그의 젊은 날의 모습이..


한수산 작가는 <부초>를 쓰기 위해 3년간 13개 곡예단을 찾아다니며 취재를 한 후 3개월간 집에서 칩거하며 그 소설을 완성했습니다. 말이 취재이지 집에 들여놔야 할 쌀 살 돈까지 털어 곡예단원들에게 술을 사줘가며 곡예단의 상황과 단원들의 개인사를 파헤친 것입니다. 가난한 작가가 더 가난해져 가는 단원들을 만나 함께 하며 쓴 책이었습니다. 한수산 작가의 트레이드마크인 사실주의는 이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2017년에 출간된 그의 후기 역작인 <군함도>의 경우는 그가 일본 생활 시절인 1990년 취재를 시작해 27년을 숙성시켜 완성했습니다.

사실 이번에 <부초>를 읽으며 저는 그 점에도 깜짝 놀랐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곡예단에 대해 사실적으로 묘사를 했는지 말입니다. 그곳은 일상의 라이프와는 다른 세계로 특수하면서도 좁은 집단이니까요. 그가 소설을 쓴 나이가 31세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했습니다. 마치 진짜 곡예단원이거나 곡예단 운영자가 쓴 글처럼 느껴졌으니까요. 그리고 사라져 가는 유랑극단 시대와 거의 마지막 남은 그 현장을 쓴 소설이라 슬플 수밖에 없는 스토리이지만 문체는 견고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이 글 맨 위에 올린 "사라져가는 것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의 얼굴이 아니라 뒷모습만을 보았기 때문이리라"라는 문장에서 보이듯 말입니다. 사실주의와 함께 한수산 작가를 따라다니는 유미주의가 유감없이 들어가 있는 소설 <부초>입니다.

그는 취재 후 글을 쓴 3개월 동안은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집에서 먹고 자는 시간을 빼곤 오로지 글만 썼다고 합니다. 그의 일정표가 텅 비어있던 3개월이었습니다. 이윽고 대학노트 16권이 깨알 같은 글씨로 꽉 채워졌습니다. <부초>는 그렇게 완성이 되었습니다. 노트를 덮고 3개월 만에 집을 나선 작가는 쭈쭈바를 입에 물고 한강변을 산책하였는데 영혼의 키가 움쑥 자란 것과 같은 감동을 느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소설을 완성했을 때 전국의 곡예단 수는 3개로 줄어들었습니다. 3년 만에 13개에서 3개로, 이렇게 1970년대는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지금은 딱 하나 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젠 더 이상 유랑도 하지 못하고 도시에서 밀려나 저 멀리 바다 건너 대부도에 자리하고 있는 동춘서커스단이 유일합니다.

사람은 살면서 그를 변화시키거나 발전시키는 변곡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작가 한수산에게도 그런 변곡점이 있었습니다. 강원도 출신인 그는 대학교를 두 군데 다녔습니다. 그 두 학교에서 그는 필생의 은사 두 분을 만나게 됩니다. 그를 이후 정상의 소설가로 만들어준 거인들입니다. 박목월 시인과 황순원 소설가가 그가 피기 전인 젊은 날의 한 페이지에 등장합니다. 어쩌면 저는 우리 현대 문학사에 빛나는 그 두 작가의 어느 한 면을 소개하고파서도 한수산 작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글을 쓰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를 통해 들은 그가 청년 시절 경험한 그 두 거장의 글쓰기 스타일이 별나고 재밌어서입니다. 본래부터도 별난(?) 공통점으로 잘 알려진 그들입니다. 두 작가는 동갑내기로 모두 1915년 생입니다. 그리고 모두 그들의 피를 이어받아 작가로 유명해진 아들을 두고 있는데 그들의 이름이 같습니다. 박동규 교수와 황동규 시인이 그들입니다. 각각 아버지와는 달리 산문과 운문의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은 이채롭습니다. 

박목월 시인은 이름만 들어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가 떠오릅니다. 한수산 작가는 춘천교대를 다녔는데 그 곳에서 훗날 서울대 국문과로 옮긴 박동규 교수를 은사로 만났습니다. 그 사제의 인연으로 그는 박교수의 본가인 박목월 시인의 서울 집에서 3일간 머무른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그는 그곳에서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흡사 집이 책 속에 파묻혀 있듯이 그 집은 온통 책으로 채워지고 덮여있었는데 그가 목도한 그 현장감만으로도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 집은 방이든, 거실이든, 계단이든 어딜 가도 책이 있어 손에 잡히고 발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그런 집이 정말 흔치 않던 시대였으니까요. 책감옥과도 같은 대 시인의 그런 집 공간에 3일간 갇혀있던 것만으로도 그 문학도는 문학적인 충격을 받았습니다. 불과도 같은 책의 세례를 받은 것일까요? 그날 이후 그는 전업 작가의 꿈을 꾸고 살게 됩니다.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순수 문학을 주장한 청록파로 유명한 박목월 시인 (1915~1978)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순수 문학을 주장한 청록파로 유명한 박목월 시인 (1915~1978)


박목월 시인은 시를 쓰는 방법이 독특했다고 합니다. 원고지가 아닌 노트에 썼는데 초고를 쓰고 수정을 할 때 그 초고에 직접 수정을 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대로 놔둔 채 그다음 페이지에 새로 고친 내용을 포함해 전부 다시 쓴 것입니다. 이후 또 수정이 생기면 역시 또 페이지를 넘겨 수정한 시를 적는 식으로 시를 완성해 갔습니다. 결국 더 이상 수정이 없이 만족하게 되면 그 시는 그 페이지에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시인은 그가 쓴 시의 전 과정을 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대별로 그의 생각의 변화 과정을 고친 시어들을 통해 알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그의 대표작인 <나그네>도 그것과 조금씩 다른 미완성본이 꽤나 많이 그 노트 앞에 적혀있을 것입니다. 얼마 동안이나 구름에 달 가듯이 가면서 완성한 시일까요?

황순원 소설가의 이름만 들어도 어린 시절 가슴을 콩닥거리게 한 <소나기>가 떠오릅니다. 그 소설은 1960년부터 올해까지도 65년 간 초중등 교과서에 실려있는 전설의 스테디셀러입니다. 한수산 작가는 경희대 국문과로 학적을 옮겼는데, 그때 그의 담당 교수가 그였습니다. 황순원 작가의 글쓰기 특징은 작품을 쓸 때 연필로 쓰고 수정을 할 때는 지우개로 지워가며 수정을 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원고를 보면 지운 자국이 다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엔 지우개가 그렇게 좋지도 않아 잘 지워지지 않았으니 지저분해 보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 황순원 교수에게 한수산 학생은 혹독하게 소설 작법을 교육받았습니다. 매주 소설을 써서 평가를 받는 도제 시스템이었는데 아무리 한수산 작가가 필살기를 발휘해 이 정도면 됐겠지 하며 자신만만하게 쓴 소설을 제출해도 그 교수는 칭찬과 동조는커녕 핀잔을 주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대호가 새끼 호랑이를 교육하는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한국 단편소설의 대가로 많은 후학을 양성한 황순원 소설가 (1915~2000)
한국 단편소설의 대가로 많은 후학을 양성한 황순원 소설가 (1915~2000)


위의 박목월과 황순원 작가의 글쓰기 수정 방법은 시와 소설이라는 장르의 특성도 작용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소설은 시와는 달리 그 다음 페이지에 수정본만을 앉히기가 어려우니까요. 그러면 버려야 할 이전 페이지와 그 순서가 매우 혼동될 것입니다. 그래서 연속성을 가지고 쓴 데에 고쳐가면서 작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전의 스토리에 계속 새 내용을 이어 붙이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시는 길이가 짧으니 상관이 없습니다. 이전 페이지와 연속성이 없으니 새 페이지에 수정한 시 전체를 써도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박목월 시인이 특이했습니다. 시어 하나 정도 바꾸는 수정이라면 지워서 써도 될 것을 그다음 페이지에 전체 시를 다 쓴 것이니까요.

이렇게 우리나라 현대문학사를 빛낸 두 거인에게 영향을 받아 한수산 작가는 소설의 전성시대인 1970년대에 화려하게 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어려움을 뚫고 성공했다고 해서 다른 작가들처럼 이후 계속 정상에서 그 성공의 열매를 이어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스타 작가로서 장밋빛 탄탄대로만 걷게 될 것 같은 그에게 생각지 않은 고난의 가시밭 길이 나타난 것입니다. 소설의 단계로 치면 위기와도 같은 일이 그에게 일어났습니다. <부초> 성공 후 불과 4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의 직업이 작가이고 당시 그가 산 시대가 그런 시대였기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는 '한수산 필화 사건'으로 불리는 사건에 연루되어 혹독한 고초를 겪었습니다. 신군부가 들어선 1981년 그가 <중앙일보>에 연재하던 <욕망의 거리>라는 소설 속 표현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가 묘사한 인물이 당시 신군부의 핵심 인물을 희화화했다고 해서 보안사(기무사)로 끌려가 고문을 받은 것입니다. 소설 뿐만이 아닌 모든 창작 분야에서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 가슴 아픈 시절이었습니다. 연기자가 VIP를 닮았다는 이유로 TV 출연이 막히기도 했었으니까요. 그런 부조리와 모순으로 인해 그는 보안사에서 나와 시간이 흐르며 육체의 상처는 지워져도 마음의 상처는 지워지지 않아 절필을 선언하고 온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살게 됩니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갈 줄 알았던 그 나그네에게 먹구름이 몰려와 달을 가린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1970년대 말 날렸던 인기 소설가는 1980년대엔 우리에게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 4년간 체류하며 어려움에 처한 그에겐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독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존에 낸 그의 책을 계속해서 사준 것입니다. 그런 독자들을 통해 용기를 얻게 된 그는 다시 펜을 들었습니다. 우리 앞에 <군함도>가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우리의 가슴 아픈 역사가 담긴 그 역사의 현장에 직접 상륙해 취재를 하고 완성한 소설입니다. 그의 명작 <부초>에서 잘못 알려진 곡예단의 이야기를 바로 잡아 쓴 것처럼 <군함도>도 과장되고 잘못 알려진 역사를 바로 잡아가며 썼습니다. 과연 그의 소설을 관통하는 사실주의의 대가답게 말입니다.

<군함도>는 그가 최초로 취재를 시작한 지 무려 27년 만에 최종적으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 여러 제목의 책을 거치며 덜어내고 다시 쓰고를 반복하며 완성된 책입니다. 그 책은 가해자인 일본과 역시 피해자인 대만에서도 출간되었습니다. 극장에서 상영된 영화 <군함도>는 그의 소설이 원작이 아닙니다. 그 사이 입국한 그는 세종대학교의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도 양성하였습니다. 그의 대학 시절 은사인 황순원 교수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중국의 성인인 공자는 70세를 가리켜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면 틀림이 없다는 종심(從心)이라 칭했고, 시성인 두보는 옛날에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며 고희(古稀)로 칭했습니다. 공자는 72세에 죽고 두보는 그 전인 68세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만약 80세까지 살거나 그 나이대에 근접했다면 80세를 무엇이라 칭했을까요? 그날 강의 현장에서 80세를 2년 앞둔 노 작가는 생에 도가 튼 도사처럼 유려하고 진지하게 그의 생과 그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그의 문체만큼이나 준수한 외모로도 젊은 시절 팬이 많았던 한수산 작가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많은 팬에 둘러싸인 그입니다. 그의 생엔 여러 고난의 시기가 있었지만 이젠 그것들은 물 위 부초처럼 떠있지 않고 바닥으로 다 가라앉은 듯했습니다. 그의 인생 최고 위기인 필화 사건을 이야기할 때도 격앙되거나 톤을 높이지 않았으니까요. 오히려 그런 부분에선 더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와도 같은 표정과 웃음을 보여주며 걱정하는 청중들을 배려하는 듯했습니다. 그에게 초월주의자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 작가가 되어'란 제목으로 진행된 한수산 작가의 강연 (2024. 2. 15)
'이 땅에 태어나 작가가 되어'란 제목으로 진행된 한수산 작가의 강연 (2024. 2. 15)


그는 지금 카톨릭에 귀의하였습니다. 그의 대외적인 활동도 카톨릭과 관련된 일이 가장 많다고 합니다. 백두산에서 천지의 물로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지금 그를 변화시키는 또 한 번의 변곡점을 맞은 듯합니다. 학창 시절 박목월 시인과 황순원 소설가가 그를 변화시켰듯이 카톨릭의 지저스 크라이스트나 그에게 세례를 준 사제가 그 역할을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산전수전을 겪었지만 그의 강의가 그렇게 평화로웠던 이유도 될 것입니다. 강의를 마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갈 때 그의 뒷모습만큼이나 강의 시 얼굴도 아름다웠던 노작가였습니다.

한수산 작가는 지금도 소설을 집필 중에 있습니다. 청년기와 중장년기를 지나 삶을 초월한 노년기에 쓴 그 소설이 어떻게 책으로 나올지 궁금합니다. 그날 강의 중엔 어떤 소재로 쓴다고는 밝혔지만 이 글에서 제가 밝히기엔 적절하지 않아 보입니다. 강의가 끝나고 제가 맺음말을 할 때 초빙 강사인 그에게 감사를 드리며 다음과 같이 요청을 드렸습니다. "한수산 작가님 본인의 삶을 소재로 한 자전적 소설도 한 권 쓰세요"라고 말입니다. 소설의 모든 단계별 요소를 갖춘 드라마틱한 그의 생이니 그 자체로 충분히 소설이 될 수 있다며 말입니다. 그 소설엔 이 글에서는 빠진 소설가를 꿈꾸는 잘생긴 남자 주인공의 알콩달콩한 연애 이야기와 그녀와 이룬 가족 이야기까지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의 인생에 가장 큰 변곡점이라 할 수 있는 100권의 대학 노트와 1만매의 사제 원고지 이야기도 포함해서요.

하광용은 대학 졸업 후 오리콤, 이노션 등에서 광고인 한 길로만 가다가 50세가 넘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세상사 이때 저때, 이곳 저곳, 이것 저것, 이사람 저사람에 대한 인문학적 관심이 많다. 박학다식한 사람은 깊이가 약하다는 편견에 저항한다. 그래서 그는 르네상스적 인간을 존경하고 지향한다. 박학과 광고는 어찌보면 ‘넓다’라는 측면에서 동일성을 지닌다. 최근 <TAKEOUT 유럽예술문화> <TAKEOUT 유럽역사문명>이라는 인문교양 에세이집을 출간한 그는 태평양인문학교실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하광용 작가의 책 '테이크아웃 유럽예술문화'와 '테이크아웃 유럽역사문명'.
하광용 작가의 책 '테이크아웃 유럽예술문화'와 '테이크아웃 유럽역사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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