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동로마/라틴/동로마/오스만/튀르키예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무너지면서 그 도시는 이제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라틴어로 콘스탄티노폴리스라 불린 그 도시를 오스만어(튀르키예어)인 콘스탄티니예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에서 통일해서 쓰고 있는 콘스탄티노플은 영어명입니다. 그때부터 이스탄불로도 불렸지만 그 이름은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튀르키예 공화국이 되기 전까지 공식 도시명으로는 인정되지 못했습니다. 이스탄불이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기 전 수도는 마르마라해 남부 아시아 지역에 있는 부르사였습니다.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의 승자 술탄 메흐메드 2세는 과거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정적인 리키니우스를 물리치고 점령지인 비잔티움으로 천도를 했듯이 그도 점령과 동시에 그렇게 했습니다. 이슬람교의 수도를 버리고 기독교도의 도시로 천도를 한 것입니다. 그만큼 콘스탄티노플은 정복자들에게 중요하고 매력적으로 보였나 봅니다.

옛 수도 부르사엔 오스만 제국의 1대, 2대 술탄의 영묘가 있습니다. 그 도시는 오스만 제국이 건국된 1326년부터 수도였습니다. 영묘는 도시를 다 내려다볼 수 있는 톱하네 공원에 조성되어 많은 시민과 관광객이 그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또 하나의 볼거리는 오스만 제국의 시조인 오스만 1세의 묘지를 지키는 오스만 전사의 근무 교대식입니다. 예니체리라고 불린 충성심 강한 술탄의 친위대는 그 명성이 과거 서방 세계에도 자자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성을 함락시키는 데에도 지대한 공을 세운 그들이었습니다. 과연 예니체리를 표방한 묘지의 보초병들은 위압감을 주는 표정과 자세, 기합과 걸음걸이로 관광객들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두 명의 전사가 무기로 칼과 도끼를 각각 들었는데 걸을 때 흔드는 팔의 각도가 매우 특이해 보였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옛 수도 부르사에 있는 초대 술탄의 영묘를 지키는 예니체리의 근무 교대식.
오스만 제국의 옛 수도 부르사에 있는 초대 술탄의 영묘를 지키는 예니체리의 근무 교대식.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첫날 메흐메드 2세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소피아 대성당이었습니다. 기도를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 무릎을 꿇고 오스만인에게 승리를 안겨준 그들의 유일신인 알라에게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성당에서 알라에게 감사를 드리다니요? 맞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날부터 정교회의 소피아 대성당은 이슬람의 성전인 모스크로 용도가 바뀌었으니까요. 신기한 일입니다. 어제까지는 기독교의 성전이었는데 오늘부터는 이슬람교의 성전이 되다니요? 일치하는 비교는 아니겠지만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어떤 절을 교회로 사용하는 모양새입니다.

그런데 서구 역사에선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는데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은 그 땅을 침공해서 7백여 년간 살아온 옴니아드 왕조의 무슬림을 몰아내고 그들이 사용했던 모스크를 성당으로 개조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건축물이 세비야의 대성당입니다. 이렇게 이스탄불의 소피아 대성당과 세비야의 모스크는 각각 서로의 종교적인 운명을 맞바꾸었습니다. 세비야는 1248년 기독교도들에게 함락되었습니다. 히스파니아 시절 로마인을 몰아낸 서고트족이 살던 땅을 후손이 찾은 것이니 수복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입니다. 그래서 중세 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도가 이슬람교도를 상대로 한 싸움을 국권회복운동을 뜻하는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 부릅니다.

스페인은 1492년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회복하고 통일이 되었습니다. 유럽의 정반대 쪽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과는 반대로 그곳에선 기독교도가 승리한 것입니다.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자의 결혼동맹으로 최종적으로 승리했고 통일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비야에서 무슬림의 마지막 도시인 그라나다까지는 불과 250km밖에 안 되는데 그곳까지 밀고 내려가는 데에는 무려 250년이나 걸렸습니다. 콘스탄티노플처럼 그라나다도 저항이 심했나 봅니다. 세비아 대성당은 오랜 재건 기간을 거쳐 1506년 준공되었습니다.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 초상, 젠틸레 벨리니, 1480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 초상, 젠틸레 벨리니, 1480

이제 기독교(정교회)의 소피아 대성당은 아야 소피아(Aya Sofya)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성스럽고 거룩한 지혜를 뜻하는 사원입니다. 아야는 때론 예수 그리스도를, 때론 성모 마리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렇게 장소와 이름 등 기독교적인 유산을 이슬람교가 그대로 승계하는 것은 그들이 그때엔 나름 기독교를 인정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양 종교의 최고 조상은 구약 성서에 믿음의 조상으로 등장하는 아브라함으로 같으니까요. 아브라함(이브라힘)으로부터 정실의 아들인 이삭과 측실의 아들인 이스마엘로 서로 다른 계보로 내려가 이삭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기독교가 탄생하고, 그로부터 6백 년 후 이스마엘의 후손인 무함마드가 출현하면서 이슬람교가 탄생했습니다. 그런 역사적인 배경으로 이런 교류와 교환의 역사가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전지전능한 하느님인 야훼(Yahweh)와 알라(Allah)는 뿌리가 같은 절대신(God)이기도 하니까요. 이슬람교에선 하느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무함마드보다 먼저 온 유능한 선지자로 인정합니다.

이스탄불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랜드마크인 아야 소피아는 그 도시의 파운더인 콘스탄티누스 1세 때인 330년대에 착공했지만 오늘날과 같은 비잔틴 양식을 대표하는 멋진 모습으로 등장한 것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였습니다. 그는 위에서 동로마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황제라 했는데 전쟁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내치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537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소피아 대성당의 준공식이 거행되었을 때 그는 그 성전이 이스라엘 왕국의 솔로몬왕이 건축한 성전보다 더 아름다울 것이라며 매우 기뻐했습니다. 또한 1453년 그 도시를 정복하고 소피아 대성당을 찾은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도 그 규모와 아름다움에 크게 감탄했습니다. 그래서 감히 그 성당을 훼손할 생각을 못 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 전인 1204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4차 십자군 원정 기사들도 그 성당에 들어서며 똑같이 놀랐을 것입니다. 서방엔 그런 성당이 아예 없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물론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을 비롯한 서방의 대성당을 보아온 제 눈에도 아야 소피아는 놀람 그 자체였습니다. 이런 웅장한 건축물이 5백 년대에 세워졌다니요?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입니다.

비잔티움, 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과 운명을 함께 한 도시의 랜드마크 아야 소피아.
비잔티움, 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과 운명을 함께 한 도시의 랜드마크 아야 소피아.

아야 소피아는 2천 년 가까이 기나 긴 시간 동안 콘스탄티노플의 역사와 함께 해왔습니다. 십자군이 침략한 라틴 제국 시절에 그 성당은 정교회가 아닌 카톨릭 성당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정교회, 카톨릭, 이슬람교 등 과연 모든 종교를 담고 포용해 온 아야 소피아입니다. 물론 초기에 정교회로 분리되기 전까지는 서방 카톨릭과 같은 성당으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튀르키예 공화국이 건국된 후 1935년부터 2019년까지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그간 지진과 화재, 약탈 등이 있었지만 보듯이 오늘날까지 굳건히 늠름하게 그 모습을 잘 유지해오고 있는 아야 소피아입니다.

위에 언급한 로마 카톨릭을 대표하는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을 비롯하여 우리가 아는 서구의 대성당들은 중세에 접어든 1100년 이후에 착공된 건축물들입니다. 그리고 1400년대 이후 르네상스 시기 때나 돼서야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서방을 대표하는 베드로 대성당은 1626년 완공되었습니다. 소피아 대성당은 그보다 천년 넘게 먼저 완공되었다니 과연 대단한 로마인의 건축 기술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만약 서로마 제국이 476년 멸망하지 않았다면 서유럽 지역에도 이런 오래된 대성당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소피아 대성당에 입당한 메흐메드 2세는 실내 제단과 십자가는 철거하고 기독교 성화들을 가리기 위해 그 위에 회를 덧칠했습니다. 모스크로 바뀌었으니 그것은 당연한 조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외부에 모스크를 상징하는 첨탑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중세 교회의 대표적인 실내 양식인 스테인드글라스는 건드리지 않아 지금도 아야 소피아의 돔에 맞추어 둥글게 빙 둘른 유리창엔 햇빛에 투영된 그것이 아름답고 화려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이번 튀르키예 여행으로 아야 소피아를 비롯하여 그 앞에 있는 블루 모스크, 옛 수도 부르사의 울루 자미 등 처음 가 본 모스크에서 알게 되었지만 그 실내엔 아무 종교적인 성물이나 구조물이 없습니다. 외부에 모스크를 상징하는 첨탑(미너렛)은 있으나 실내엔 기독교의 십자가나 성화 같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텅 빈 커다란 예배당에 성지인 메카를 향하는 문(미흐랍)과 예배 인도자인 이맘의 설교 자리(민바르)만이 있을 뿐입니다. 벽이나 기둥엔 알라와 코란이 적힌 역동적인 아랍어 서체의 액자들이 보였습니다. 캘리그래피의 원조라고 불리는 서체입니다.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모스크 아야 소피아의 실내 모습.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모스크 아야 소피아의 실내 모습. 

위에 등장한 동서교회 대분열 시 서방카톨릭과 갈등을 빚은 동방정교회의 성상파괴운동은 이런 이슬람교의 깨끗한(?) 모스크에서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모스크처럼 인간이 만든 성화나 성물 등도 우상으로 간주될 수 있기에 그것은 십계명의 우상금지에 위배되니 성전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탄불엔 그런 성상파괴운동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정교회 성당이 남아 있어서 저의 눈을 끌었습니다. 술탄이 살았던 톱카프 궁전 마당에 위치한 아야 이리니(Aya Irini)입니다. 아야 소피아를 빼닮은 비잔틴 양식의 건축물인데 오스만인들은 이 성당엔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 훌륭한 건축물을 모스크로 개조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야 이리니는 마치 방금 출토된 커다란 고고학 유적처럼 보입니다. 실내에 인테리어라곤 제단 위 천정 돔에 그려진 심플한 십자가가 다입니다. 성상파괴운동의 결과로 보입니다. 오스만 제국 시절 아야 이리니는 술탄의 친위대인 예니체리의 무기 창고로 사용되었습니다. 오늘날엔 살아있는 박물관으로 관광객들을 맞고 있습니다. 고대의 멋진 실내 공간이기에 콘서트가 열리기도 합니다.   

메흐메드 2세는 아야 소피아와 아야 이리니의 경우에서 보듯이 천년 넘게 내려온 기독교도의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을 그대로 보존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정복자의 특권인 약탈과 방화를 최대한 금지하였습니다. 그의 군대에게 스트레스 해소를 못 하게 막은 것입니다. 그래서 1204년 십자군 침공 시 서방의 기독교도들이 행했던 약탈과 방화가 그의 정복 시대엔 거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에 힘입어 오늘날 우리는 이스탄불에 가서 그대로 남아있는 로마 제국의 유적들과 기독교 흔적이 남아있는 종교 시설들을 관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상파괴운동의 영향으로 십자가 표식만 남아있는 이스탄불의 아야 이리니.
성상파괴운동의 영향으로 십자가 표식만 남아있는 이스탄불의 아야 이리니.


메흐메드 2세는 기독교 시설뿐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시스템도 그대로 존속시켜 주었습니다. 동방정교회의 총본산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직위와 사무실을 그대로 인정해 준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에게 그렇게 했듯이 일반 기독교도들에게도 종교의 자유를 허용해 주었습니다. 복종을 하고 세금만 잘 내면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무슬림이 99프로인 튀르키예의 이스탄불에 상징적이나마 정교회의 본산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대가 끊기지 않고 남게 된 것입니다. 1964년 교황과 만나서 천년 전 교회 대분열 시 벌어진 서로의 파문을 철회했던 바로 그 총대주교입니다. 오늘날 정교회의 최고 실권자는 국력이 가장 크고 신도수가 가장 많은 러시아 정교회의 모스크바 총대주교입니다. 정교회는 카톨릭처럼 교황 아래 전 세계의 사제와 신도가 있는 단일한 조직 체계를 갖추지 않고 정교회를 믿는 각 국가별로 독립된 체계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안티반달리즘(anti-vandalism)이라 할 종교와 문화를 파괴하지 않은 술탄의 정책은 이스탄불뿐만이 아니라 튀르키예 전역에 흩어져 있는 로마의 유적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스탄불 동쪽 아시아 지역으로 로마는 이 지역을 아나폴리아라 불렀습니다. 그중 셀축 지역의 에페소스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로마 시대의 유적지입니다. 그 시절 에페소스엔  25만 명의 인구가 살았습니다. 에게해와 닿은 항구에서 일자로 이어지는 가도를 지나면 개선문이 나오고 고대 도시가 시작됩니다. 중앙 도서관을 중심으로 그 앞 광장인 아고라, 그리고 사방으로 이어진 마차의 길, 여러 신전과 2만 4.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커다란 원형극장, 귀족들의 빌라촌, 분수와 공중 화장실 등은 로마의 포로로마노를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지로도 알려진 에페소스엔 사도 요한의 기독교 유적지와 그의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유언으로 잘 모실 것을 부탁한 어머니 마리아의 유적지도 남아 있습니다.  

로마인인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애 장소로 알려진 지중해 최고의 휴양지 안탈리아를 가도 로마는 널려있습니다. 그밖에 히에라폴리스, 라오디게아 등 가는 곳마다 로마와도 같은 계획도시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로마 시대 기독교 탄압으로 땅속으로 숨어 들어간 기독교도들의 지하 도시인 데린구유는 로마 시내의 지하 교회인 카타콤베를 그대로 연상하게 합니다. 하지만 지하 8층의 깊이와 수 km 밖 땅속 사방으로 피신처가 뻗어나간 규모는 카타콤베 이상입니다. 게다가 지금도 계속해서 새로운 지하 도시들이 발굴되고 있다고 합니다. 튀르키예는 이렇게 곳곳에서 다양한 고대 유적지의 발굴을 계속해서 진행 중에 있습니다. 과연 2천 년 로마 역사의 후기 천년을 이어간 동로마 제국의 땅이니 튀르키예는 절반의 로마가 맞습니다. 언젠가는 로마 이전 고대 그리스의 신화 속 전쟁인 트로이 전쟁의 유적지까지 제대로 발굴될지도 모를 것입니다.

튀르키예에 남아있는 로마 제국의 원형 경기장. (좌> 에페소스, 우> 안탈리아)  
튀르키예에 남아있는 로마 제국의 원형 경기장. (좌> 에페소스, 우> 안탈리아)  


오스만 제국은 메흐메드 2세의 증손자인 10대 술탄인 쉴레이만 1세(1494~1566) 때 최전성기를 맞이합니다. 역사에서 전성기라 함은 전쟁에서 크게 이기고 영토를 최대로 확장한 시기일 것입니다. 그는 침략 전쟁으로 제국의 영토를 동으로는 아라비아 반도, 남으로는 레반트라 불린 레바논과 시리아 지역, 동으로는 헝가리까지 넓히고 해상에서는 성 요한 기사단과 베네치아를 몰아내고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 북부까지 점령함으로써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개 대륙을 다스리는 대제국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내치에 있어서도 문학과 예술 등까지 뛰어난 정책으로 오스만 제국의 품격을 높였습니다.

하지만 쉴레이만 1세는 크게 두 가지 실책을 범했습니다. 첫째는 인재 정책으로 두 세력을 놓고 경합하게 해 우수한 한쪽을 등용했던 오스만 제국의 전통을 무시하고 그가 아끼는 특정 집단의 인재만을 등용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특정 예니체리의 힘이 세어져 정치에 관여하고 부패하는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또 하나는 역설적으로 정식 왕비를 들인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술탄은 결혼하지 않고 하렘에 거주하는 많은 여인들에게서 난 아들들 중 최고로 뛰어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탈락한 아들은 후환을 없애기 위해 모두 죽이는 것이 관례였는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은 것입니다. 평생 한 여인만을 사랑하여 술탄들 중 최초로 결혼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렘의 여인이 정치에 관여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왕비가 난 아들이 너무 못나고 방탕해서 그 다음 대부터 오스만 제국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아래 사람을 믿고 한 여인을 사랑한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이스탄불의 보스포루스 해협에 접한 서구 스타일의 돌마바흐체 궁전.
이스탄불의 보스포루스 해협에 접한 서구 스타일의 돌마바흐체 궁전.


이렇듯 달이 차면 기우는 법, 오스만 제국의 국기에 들어가 있는 초승달은 보름달이 되고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그 달은 그믐달로 쪼그라들었습니다. 그 깃발에 함께 떠있는 샛별의 밝기도 점점 희미해져 갔습니다. 그렇게 20세기를 맞은 발칸 반도의 오스만 제국은 점점 종이호랑이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제국을 상징하던 전사인 예니체리도 용맹성은 사라지고 부패해 오히려 제국의 멸망에 원인을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면서 제국의 운명은 끝이 났습니다. 서방의 기독교도 협상국들에게 뜯어 먹힌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 그 땅에 임재한 기독교의 신인지 이슬람교의 신인지 모르겠으나 신이 보우하사 구국의 영웅이 등장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멸망하였지만 그 영웅이 그리스를 비롯한 서구 열강과의 전쟁인 튀르키예 독립전쟁에서 승리해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영토를 오늘날과 같이 확정한 것입니다. 튀르키예 역사를 빛낸 세 사람, 메흐메드 2세, 쉴레이만 1세를 이은 케말 아타튀르크의 등장입니다. 그렇게 독립 영웅이자 건국의 아버지인 케말 아타튀르크는 1923년 튀르키예 공화국을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2022년까지 그 나라 밖 외국에서는 터키로 불린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는 1593년 동안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에서 아시아 지역인 아나톨리아 내륙의 앙카라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대신 이스탄불은 고도 콘스탄티노플을 대체하는 공식적인 이름이 되었습니다.

케말 아타튀르크가 등장하는 튀르키예 건국사는 제가 이곳에 먼저 쓴 <국부(國父)가 이름이 된 남자 케말 아타튀르크>에 소상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지난 10월 말 튀르키예를 여행하고 세 편의 글을 연작으로 쓰게 됐는데 그 나라의 건국일이 10월 29일이기에 시점에 맞추어 시대적으로 마지막인 튀르키예의 건국사를 가장 먼저 쓴 것입니다.     

현재도 발굴 중에 있는 로마 시대 부자 도시 라오디게아 유적지 내 아폴로 신전.
현재도 발굴 중에 있는 로마 시대 부자 도시 라오디게아 유적지 내 아폴로 신전.


이번 여행에서도 또 느꼈지만 유럽의 역사는 서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기독교라도 동방정교회보다는 서방카톨릭을 믿는 국가들이 역사의 중심에 있습니다. 근대 이후 개신교로 분파된 새로운 기독교 국가인 미국의 역사를 와스프(WASP, white anglo saxon puritan)가 주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 물론 성공회로 독립한 영국은 예외입니다. 여기서 동방과 서방의 경계선은 신성로마제국과 합스부르크 왕조의 동쪽 영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까지로 보입니다. 그 서쪽 유럽의 역사가 미국의 출현 이전 서양사를 주도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에서 산업혁명, 프랑스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나며 문명의 저울추는 확고하게 서유럽으로 기울었습니다.

이스탄불의 역사에서 보듯이 동부 유럽도 세계 제국 로마가 천년 넘게 있었고 같은 기독교를 믿어왔습니다. 그리고 그곳도 서구와 똑같이 찬란한 역사 속에 생산된 아름답고 귀중한 유적과 유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서양사가 마치 서세동점(西勢東漸)만 있던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동세서점(東勢西漸)한 역전의 역사도 만들었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그들은 서진에 성공해 과거 로마 제국과도 같은 최대 제국을 이루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이 믿었던 기독교가 서방과 천년 가까이 소원했던 정교회다 보니 손해를 보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 때도 그들은 서유럽을 정복하는 장대한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무슬림이기에 그 배척감은 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역사책에서 할애된 페이지도 서구에 비해 절대적으로 적은 동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유럽사에 비해 동유럽사는 잘 모릅니다.

그런 드러내지 않는 소외감 때문에 주로 동구 쪽에서 서방을 향해 튀는 행보와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방 입장에서 보면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대통령도 그런 지도자들 중 하나로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나토(NATO) 회원국임에도 유럽연합(EU) 가입엔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을 것입니다. 전쟁의 대리전이라고 하는 축구 경기는 유럽 리그에 속해있음에도 말입니다. 우리나라를 형제 국가로 칭하는 튀르키예는 6.25 전쟁 시 유엔군으로 참전해 1952년 서방의 군사동맹인 나토에 가입이 허용되었습니다. 당시는 튀르키예와 근접한 소련과 서방의 냉전이 한참 벌어지던 시기였습니다.

하광용은 대학 졸업 후 오리콤, 이노션 등에서 광고인 한 길로만 가다가 50세가 넘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세상사 이때 저때, 이곳 저곳, 이것 저것, 이사람 저사람에 대한 인문학적 관심이 많다. 박학다식한 사람은 깊이가 약하다는 편견에 저항한다. 그래서 그는 르네상스적 인간을 존경하고 지향한다. 박학과 광고는 어찌보면 ‘넓다’라는 측면에서 동일성을 지닌다. 최근 <TAKEOUT 유럽예술문화>라는 인문교양 에세이집을 출간한 그는 태평양인문학교실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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