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 여성 혁명가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남성이 우선시되는 가부장적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든 여성들이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실제 봉건체제를 뒤엎고자 하는 혁명을 주도한 여성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다. 우리가 만난 자유인 황진이, 김만덕 등도 모두 시대에 앞서는 여인임에는 분명했지만, 스스로가 주도하여 세상을 바꾸고자 한 여인은 조선 역사상 ‘용녀(龍女)’ 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지금까지 우리 역사에 잘 알려지지 않은 여인, 용녀!이름도 범상치 않은 용의 여인, 용녀. 그녀는 왜 세상을
재판정에서 갈라선 매형과 처남"황사영은 제 조카사위이지만 원수입니다. 그자는 죽어도 변치 않을 것입니다. ‘이백다록’은 이승훈입니다. 그는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충격이었다. 이승훈은 우의정 이병모가 주도하는 국문장에서 처남인 정약용이 자신을 천주교 신자인 베드로라고 주장하고, 본인은 천주교를 배교(背敎)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그저 하늘을 보고 웃고 말았다. 정치적 생존을 위해 스스로만 살고자 하는 처남에 대해 그는 분노를 버리고 그저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이승훈은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
이상한 술자리, 민란의 시작1800년(순조 즉위년) 8월 15일 저녁. 경상도 인동(현 구미시 인동)의 사대부 장시경(張時景)의 집에서 작은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장시경은 집안의 노비들과 인근의 남자들을 불러 술을 빚어 대접했다. 술자리에 참여한 노비들은 갑작스런 술자리가 영 이상했다. 얼마 전 임금이 죽어 매우 슬퍼하고 집밖으로 나가지 않던 주인 장시경이 갑자기 술을 베풀었기 때문이다.노비들도 분위기가 이상해서 어떤 연유로 술을 주는지 물었다. 장시경은 아무런 소리를 하지 않고 그냥 오늘은 많이 마시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의 분부
창경궁의 폭음, 갑신정변의 서막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늦은 밤 9시에 연회가 한창인 우정총국 옆 민가에서 불이 올랐다. 초가 지붕에 난 불은 옆집으로 옮겨붙으며 대규모 화재로 번지기 직전이었다. 근대 우편제도를 새로 실시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종로 거리에 우정총국을 건립하고 그 날 기념행사와 연회를 하던 조정 대신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혼란을 느꼈다.연회의 주관자인 홍영식은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이었고, 홍영식과 함께 개화파의 일원이었던 김옥균은 연회 내내 들락날락 하였다. 김옥균의 이상한 행동에 수상함을 느낌
명나라에 항거한 국왕 광해! ‘왕(王)’이 항거를 한다. 조정의 대신들과 사대부들이 목숨같이 섬기는 강대국에 항거를 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임금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국왕일 것이다.과연 강대국에 항거하는 국왕이 우리 역사에서 존재하였을까? 그렇다. 실제 존재하였다. 이런 국왕이 소설이 아닌 우리 역사에서 실제로 존재하였다. 바로 조선의 15대 국왕 광해군(光海君)이었다.광해군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폭군(暴君)으로 알고 있다. 연산군과 함께 폭군이라는 이름으로 반정(反正)에 의해 국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인물이기
식민지 조선은 친일파들의 세상1945년 7월 24일. 서울 덕수궁 옆 부민관(府民館) 일대의 거리는 ‘아시아분격대회’의 현수막과 벽보가 가득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에 조선의 청년들을 보내고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군을 패배시켜 위대한 천황의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러니 이 곳이 조선 땅의 거리인지 아니면 일본 동경의 거리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일본이 나라를 빼앗은 지 거의 36년이 되어 가고 있으니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덕수궁 일대도 조선의 정기는 사라지고 오로지 일본의 모습만이 가득한
사형장의 두 청년 군인어느덧 4월이 왔다.붉은 진달래 한라산에 가득하고, 노란 유채는 제주의 온 들녘에 가득하다.맑디 맑은 제주 봄하늘은 4월만 되면 눈물의 하늘로 바뀐다.4월 제주는 아름답지만 슬프다. 두 청년이 사형장에 서 있다.두 눈은 흰 천으로 가려져 있다. 군복을 입고 있는 두 청년은 이제 23살과 20살이다. 이 청년들은 죽음이 눈앞에 있음에도 태연하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중 23살의 청년은 문상길 중위이고, 또 한 청년은 20살의 손선호 하사다. 이 젊디 젊은 청년들이 왜 같은 군복을 입은 군인들에
해월 최시형, 동학의 포교자거장 임권택 감독이 연출한 영화 개벽은 1991년 당시 대종상을 휩쓴 명작이었다.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가 대종상을 받는 것은 거의 없는 일이었음에도 영화 개벽은 동학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의 삶과 죽음으로 다루면서 진한 감동을 주었다.동학(東學)에서 해월 최시형을 기억하는 이들은 사실상 드물다. 왜냐하면 동학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수운 최제우이기 때문이다. 또한 동학의 이름이 천도교(天道敎)로 바뀐 이후 사람들은 3.1만세혁명의 민족대표 33인의 수장인 손병희를 떠올리기에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은 사
좌파 50인에 들지 못했으니 분발하세요!”아이! 고얀년 같으니라고!“허름한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던 이이화가 휴대폰으로 온 문자를 보고 갑자기 내뱉은 말이다. 함께 술을 마시던 이들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왜 그러시냐'고 물었다. 이이화는 껄껄 웃으면서 문자를 읽어주었다.“이번에 좌파 50인에도 선정이 못되었으니 분발하세요!”딸에게서 온 문자였다. 아버지가 조선일보 등 보수 세력이 만든 대한민국 좌파 지식인 50인에 들지 못했다고 열받아서 분발하라고 보낸 딸의 문자를 읽어주는 이이화의 모습을 보며 막걸리를 마시던 사람들은 포복절
전설의 조선검, 김체건(金體乾)!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검인(劍人)으로 불리는 김체건, 훈련도감 교관에 불과했던 그가 어떻게 전설의 조선검으로 불리게 된 것일까? 그의 아들 김광택은 영조의 호위무사이자 금위영 교련관으로 검선(劍仙)이라 불렸다. 검의 신선이라니! 이 얼마나 멋진 이름인가?김체건의 무예는 그의 아들 김광택에게 전수됐고, 김광택의 무예는 임수웅과 백동수에게로 전달되었다. 임수웅은 사도세자의 최측근 무사였고, 백동수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최측근 무사였다. 참으로 특별한 인연이다.사도세자는 임수웅와 함께 1759년
기녀들의 망곡례(望哭禮)폐하! 폐하!이 나라를 어찌 하시고 이리 억울하게 붕어하셨습니까?저 간악한 일본과 어찌 싸워야 하는 것인가요?1919년 3월 27일,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고종황제 국장례(國葬禮의) 하나인 ‘망곡(望哭)’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때 나무 비녀를 꽂고 나막신을 신은 기녀들이 대성 통곡을 하며 망곡례에 참가하고 있었다. 화려한 치장을 모두 풀어 던지고 하얀 소복을 입고, 엎드려 통곡하고 있는 기녀들에게 망곡례에 참가한 모든 백성들이 함께 곡을 하며 슬퍼하였다.이들은 과연 누구인가?바로 수원의 기녀들이었다. 고종이
김원술의 목을 베어주십시오!“석문전투에 패배한 김원술의 목을 베어야 할 것입니다.”신라의 태대각간(太大角干) 김유신은 국왕 문무왕(文武王)에게 아들인 김원술의 목을 베달라고 요청하였다. 서라벌 반월성에 있는 궁궐안에 있는 고위 관료들과 장수들은 모두 충격에 빠졌다. “당나라 사람들의 계략을 예측할 수 없사오니, 장졸들을 시켜 제각기 긴요한 곳을 지키게 해야 합니다. 다만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훈(家訓)마저 저버렸으니 목을 베어야 할 것입니다.”김유신은 참으로 단호했다. 김유신의 청천벽력같은 말에 대해 모든 대신
다산 정약용의 장인 홍화보무관 홍화보(洪和輔)!우리 역사에는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아간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을 것이다. 그중에는 이름 있는 이들도 있고, 세상에 이름을 날리지 않은 이들도 있다. 이순신, 권율, 곽재우처럼 백성들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가난한 백성들이 진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고 인정해 줄 만한 이 중의 하나가 홍화보라고 생각한다.홍화보는 우리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무관하면 떠오르는 인물들 대부분은 전쟁과 함께 살아간 장수들이다. 을지문덕부터 시작하여 이순신에 이르기까지 전
온양행궁에서 울리는 여인의 한맺힌 울음소리에고, 에고, 에고!세조 14년(1469) 2월 어느 날 새벽에 온양행궁 정문의 앞 마당에서 한 여인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울렸다. 온양행궁 내전에서 새벽에 일어나 간밤에 들어온 조정의 일을 확인하던 세조는 갑자기 들려오는 여인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임금이 온양행궁에 행차하여 피부병을 치료중인 것을 온양 백성들이 모를 릴 없을텐데, 감히 새벽에 임금의 잠을 깨우는 여인의 울음을 세조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세조는 새벽 근무를 담당하고 있는 관리를 불러 이 여인이 왜 이렇게 구슬프게 우는
고개를 숙이고 살아가는 진성대군호색(好色)이라는 표현할 정도로 여인을 좋아했던 성종이 비교적 젊은 나이인 38살에 세상을 떠나고 왕위는 장자인 연산군이 이어받았다. 연산군은 종친과 외척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너무도 싫어했고, 또한 이들도 연산군이 무서워서 정치에 관여하지 못했다. 7살에 아버지인 성종을 잃은 진성대군(중종)은 형인 연산군을 무서워서 대하기 어려워했고, 일찍부터 자신의 생모인 윤비가 폐서인되어 사약받고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연산군은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차갑게 대하였다.진성대군(중종)은 성종의 둘째 아들이자
동방에서 태어났으니 동학(東學)이라!“부귀자는 공경(公卿)이요 빈천자는 백성이라”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가 당대 사회의 모순을 통탄하며 한 말이다. 부유한 자들은 모두 권력을 가진 고관대작들이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은 백성들이라는 것이다. 수운의 이 말은 150여 년이 지난 이 대한민국 땅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일부 가난한 자들이 출세를 하여 부귀자가 된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조선후기 노론의 권력이 일제강점기 친일파로, 해방 이후 친미파로 변신하며 오늘 이 시대에 국회의원이 되고, 재벌이 되고, 검찰이 되고 판사가 되어
서학도 포용하는 저항의 사대부 “새로운 지식은 이서(異書)에서 얻는다” 주자(朱子)의 학문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이야기하지 않으면 죽음에까지 이르는 시대가 바로 18세기 조선이었다. 이 시대에 감히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 절대 읽어서는 안된다는 서학(西學)의 서적인 ‘이서(異書)’를 읽어야 한다고 했으니, 이 말을 한 사람은 목숨이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인 모양이다. 이 엄청난 말을 한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바로 조선후기 실학의 창시자라 불리는 성호(星湖) 이익(李瀷)이다. 우리는 흔히 성호 이익이 반계 유형원의 뒤를 이어 실
허난설헌의 ‘삼한(三恨)’의 삶 자신의 불우한 삶을 ‘삼한(三恨)’이라고 한 여인이 있다. 하나는 작은 나라에 태어난 것, 둘째는 남자가 아닌 여자로 태어난 것, 셋째는 능력과 인품을 제대로 갖춘 남편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작은 나라인 조선에서 태어난 것이 한이고, 여성이라서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그저 한 가정의 아내요, 며느리요, 어머니로서의 역할 밖에 할 수 없는 여인으로 태어난 것이 한이고, 아내를 사랑하지도 존중하지도 않고 오로지 다른 여인과 바람만 피는 무능한 남편을 둔 한이
조선의 압록강을 건넌 명(明)나라 군대 명은 일본군으로부터 조선을 지켜주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요동에 있는 명나라 군대의 일부를 조선으로 보냈다. 그러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일본군이 조선과 짜고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 땅으로 진주한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명의 조정은 일본군이 명나라 영토까지 들어와 황제가 있는 북경까지 점령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일본군이 만약 압록강을 넘어 온다면 ‘조일전쟁(朝日戰爭)’이 아니라 ‘명일전쟁(明日戰爭)’이 되는 것이기에, 명나라는 일본과의 전쟁은 조선 땅에서만 해야 한다고
조선 후기에 백성들의 안위와 국가의 미래 보다는 자신들의 재물 축적과 권력 장악에 더 의지를 가진 노론 벽파의 기득권은 언제부터 이 땅에 뿌리 박히게 되었을까. 이 시작은 언제였고, 노론 기득권에 항거하여 참된 백성들의 나라를 만들려고 한 세력들은 존재하였는지, 그들의 항거는 성공하였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항거가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서투르게 추진했다가 실패하여 오히려 기득권에게 더 큰 권력의 명분을 주는 잘못된 결과가 나타난 것인지에 대하여 깊은 고민이 들었다. 역사에서 항거와 혁명은 잘못하면 진보보다 역으로 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