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 명단 공개] 한국 언론 '재량권' 가질 자격 있을까?

[미국서 본 이태원 참사 희생자 명단 공개 논란 3] 美 연방대법원 "뉴스가치 따라 개인 사생활도 공개 가능" 美, 언론 '재량권' 폭넓게 인정...한국에선 '꿈 같은 현실(?)' 한국 언론 신뢰도 꼴찌 수준..."언론 수준은 곧 사회 수준"

2022-12-08     애틀랜타=이상연 객원특파원

이태원 10.29 참사 희생자들의 명단 공개를 둘러싸고 찬반 논란이 크다. 뉴스버스는 '언론의 자유'와 '사생활 보호' 영역의 충돌 지점에서 발생한 것으로 본다. 이번 논란은 사회적 담론을 통해 자연스럽게 공론의 장에서 해결할 문제지, 국가가 이래라 저래라 개입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미국 법무부는 명백하게 '언론의 재량권'이라고 보고 있는데, 컬럼비아대 로스쿨을 나온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언론 매체의 명단 공개가 마치 큰 위법이라도 되는 것 처럼 "법적으로 큰 문제"라고 했다. 희생자 명단 공개 논란과 관련한 사회적 공론 형성의 촉매제가 될 것으로 보고 한미 양국의 사례 등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 편집인 주
① 한동훈 "법적으로 큰 문제"라는데, 미국선 '언론 재량'
② 희생자 명단이 공무상 기밀인가? 
③ 한국 언론 '재량권' 가질 자격 있을까?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이 11월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입장발표전에 희생자를 추모하는 묵념을 하고 있다. (사진=뉴스1) 

지난 195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 거주하는 제임스 힐의 가족은 집에 침입한 탈옥범 3명에게 19시간 동안 인질로 잡히게 된다. 탈옥범들은 뜻밖에도 가족들에게 별다른 위해를 가하지 않고 신사적으로 대했으며, 이 집을 떠난 뒤 곧바로 경찰에 체포된다. 

이 사건은 뉴스에 보도돼 전국적인 관심을 모았고 인질극의 기억을 잊고 싶었던 가족들은 코네티컷주로 이주해 평범한 삶을 살았다. 1년 후 이 사건을 모티브로 이용한 소설 '절망의 시간(Deperate Hours)'이 발표됐고 이 소설은 브로드웨이 연극은 물론 험프리 보가트가 주연을 맡은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라이프 매거진을 발행하는 타임사는 이 연극을 소개하면서 힐 가족의 펜실베이니아 집 사진을 사용하며 힐 가족의 실명과 함께 사건을 다시 조명했다. 이에 힐은 자신의 부인이 잡지 기사로 인해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쓰러졌다며 타임사를 상대로 3만달러의 사생활 침해 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제임스 힐의 타임사 상대 재판에서 당시 원고인 힐의 변론을 맡았던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 (사진 출처 Nixon Foundation)

연방 대법원은 이 사건에서 예상 밖으로 타임사의 손을 들어준다. 대법원은 판결문을 통해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공공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개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노출되는 것도 문명화된 공동체 삶의 한 부분이다. 이러한 노출의 위험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 1차적인 가치를 두는 사회에서 불가피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 판결은 개인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언론의 자유를 광범위하게 인정해준 기념비적인 결정으로 꼽힌다. 언론사가 뉴스가치(newsworthy)가 있다고 판단하면 공적인 영역은 물론 개인의 삶도 자율적인 결정으로 보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언론사는 허위사실을 알고 있었거나 진실을 무시했다는 증거만 없으면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이 판결 이후 미국 언론사들은 뉴스가치라는 기준에 따라 정부기관 등의 공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적인 문제도 자유롭게 보도하고 있다. 이후 파파라치와 선정적인 황색 언론을 양산하는 부작용을 낳기는 했지만, 미국 시민사회가 언론사의 재량권에 대해 신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판결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언론사의 재량권에 대해 어떠한 시각을 갖고 있을까?. 영국 로이터저널리즘 연구소가 실시한 '디지털 뉴스 리포트(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국민의 언론 신뢰도는 2019년과 2020년 조사 대상 46개국 가운데 꼴찌를 기록했다. 또한 지난해 11월 KBS 등이 코로나19 이후 신뢰도 변화 여부를 조사한 결과 언론은 종교기관에 이어 가장 신뢰가 깎인 기관 2위를 차지했다.

로이터의 '디지털 뉴스 리포트.' (Reuters 캡처)

또한 포털 사이트 위주로 기사 소비가 이뤄지면서 같은 내용의 기사 수십개가 쏟아져 나오는 '기사 공장'같은 언론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여기에 많은 언론사가 당파성에 따라 왜곡된 시각으로 현상을 전달한다는 인식까지 퍼지면서 '가짜뉴스' 징계와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 등 '언론개혁'을 외치는 목소리마저 나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언론이 "뉴스가치를 결정하고 공적인 문제는 물론 개인의 사생활 보호까지 판단하게 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유가족들의 목소리에서 확인할 수 있었듯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명단은 분명 공익과 관련한 뉴스가치가 있었지만 국민들은 언론사가 이러한 가치를 판단할 자격이 없다는 선고를 내린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실 한국 언론의 신뢰 추락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권력을 감시하고 사회의 공익을 보호해야 할 언론사들이 오히려 권력에 취하고 공익을 사익으로 바꿔 스스로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 대학원의 저널리즘 수업 첫 시간에 들은 말이다. "한 사회의 수준은 곧 그 안에 존재하는 언론의 수준이다." 언론이 신뢰를 회복하지 못하면 한국사회의 미래도 어두울 수 밖에 없다.

이상연은 1994년 서울 한국일보에 입사해 특별취재부 사회부 경제부 등에서 기자 생활을 했으며 2005년 미국 조지아대학교(UGA)에서 저널리즘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애틀랜타와 미주 한인 사회를 커버하는 애틀랜타 K 미디어 그룹을 설립해 현재 대표 기자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