⑮ 삼성, 전두환의 특혜로 성장 토대 마련
11월 2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망했다. 그의 육사 동기이자 1979년 12.12 궁정쿠데타를 주도한 같은 하나회 멤버로 자신의 후임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가 사망(10. 26)한지 불과 한달여 만이다. 미국 출장중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전두환 빈소에 근조 화환을 보냈다. 노태우 빈소에는 이재용이 직접 조문했고, 며칠 앞선 전두환 동생 전경환 빈소에는 이부진 신라호텔 사장이 조문했다. 삼성가와 전두환가와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전두환은 삼성의 성장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삼성종합기술원 원장을 지낸 손욱의 회고를 보자.
"1979년 12·12 쿠데타로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다. 얼마 후(1980. 5. 31)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만들어졌는데, 그야말로 엄청난 힘을 가진 조직이었다. 당시 국보위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바로 전자 산업을 살리는 일이었다.
김재익 경제수석이 전자 산업 5개년 계획을 만들었고, 국보위 안에 전담 팀을 따로 뒀다. 상공부 안에 전자국장을 두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진흥회 등에서 10여 명 정도를 모아 만든 팀이다. 이곳에 차출돼 6개월 가까이 함께 작업했다. 마침 삼성전자 10년 비전 덕분에 전 세계 자료를 다 모아 분석해 놓은 터라 핵심이 되는 자료는 우리가 다 갖고 있었다.
서슬 퍼런 시절이었지만 일 자체는 정말 재미있었다. 그 과정에서 컬러 TV도 방영됐고 반도체 사업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때 청와대 경제비서관이 오명 전 장관이다. (……)
삼성전자의 10년 비전, 국보위 전담 팀 결성 등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그 덕분에 정부 정책 결정 과정에도 늘 참석할 수 있었다. 1980년 말에 이뤄진 컬러 TV 방영도 이런 배경 덕분에 가능했다. 일본의 소비자금융(할부 금융) 도입과 컬러 TV 방영을 동시에 터뜨리자 그 시너지 효과가 엄청났다." <한경비즈니스. 2011년 8월 17일자 ‘손욱의 혁신경영 이야기’>
1988년 2월 중순, 퇴임 직전의 전두환 대통령은 삼성, LG, 현대 등 반도체 3사의 경영진, 기술진, 국책연구 책임자 등을 청와대로 초청, 4M D램 개발 성공을 축하하는 자리를 가졌다. 이 자리에는 삼성 이건희 회장, 현대 정주영 회장, LG 구자경 회장, 삼성에서 4M D램 개발을 주도한 진대제도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전 대통령은, “반도체가 잘 되면 제가 커미션 좀 받아도 될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라고 농을 할 정도로 자신의 재임 기간 중 반도체 사업 지원에 최선을 다했음을 강조했다. 전두환은 삼성이 반도체 장비를 수입할 때 수입 관세를 면제해 주었고, 수도권에 공장을 세우도록 토지 매입을 허가해 주었다.
반도체 사업 초기, 삼성은 인력이 달렸다. 국책 연구소의 연구원까지 지원받았어야 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선발업체인 아남산업으로부터도 많은 인력을 스카우트했다.
김광호 전 삼성전자 부회장은 당시 대통령 전두환의 역할에 대해 월간중앙(2011년 10월호) 와이드 인터뷰에서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먼저 그는 “대통령 재임 중에 반도체 업계에 두 가지 선물을 줬습니다. 첫째 선물은 (……) 아마 1980년대 중반이었을 겁니다. 전 대통령이 부천공장을 방문했을 때 ‘애로사항이 있으면 얘기하시오’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반도체 회사에서는 대부분의 설비를 외국에서 수입해야 되는데, 이 중 일본에서 수입하는 프로젝션 얼라이너(Projection Aligner : 회로패턴이 담긴 마스크에 빛을 통과시켜 웨이퍼에 회로를 그려 넣는 노광 공정 장비)의 관세가 50퍼센트나 돼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라고 전한다.
그러면서 “저는 ‘사실 대일무역 적자 때문에 이런 관세가 붙었습니다. 대일무역 적자를 해소하려면 우리가 사업을 잘해서 일본에 수출을 많이 해야 되는데, 이런 관세 부담 때문에 반도체 사업에서 이익을 내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이러면 도저히 일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라며 자세한 설명을 보탰습니다. 그러자 전두환 전 대통령이 '그래? 그러면 안 되지. 일본을 이겨야지. 내가 없애주겠소'라고 했고, 그로부터 한 달 후 프로젝션 얼라이너에 붙던 관세가 사라졌다"고 밝혔다.
전두환의 두 번째 선물은 1988년 2월 퇴임하기 두 달 전에 이뤄졌다.
김광호의 회고다. “언제나 그렇듯 전 대통령은 애로사항부터 묻더군요. 저는 업계의 현안이던 ‘외화대부(外貨貸付)를 완화해달라’고 전두환에게 요구 사항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공일 장관은 외화 대부 완화에 반대하고 있었어요. 그는 ‘각하, 대일 무역적자가 심각한 수준입니다.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려고 외화 대출을 허용해주면 다른 업계에서 반발하고, 대일 무역적자 감축도 불가능합니다’라고 답변합니다. 그러나 전 대통령은 고집을 꺾지 않으며 '시끄러워. 해줘. 당신, 내가 두어 달 후면 퇴임한다고 우물쭈물하면서 미루다가는 가만두지 않겠어. 무조건 일주일 안에 해줘'라고 말했어요."
김광호는 이어 “날짜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거의 일주일 안에 전 대통령의 지시가 이행된 것은 분명해요. 그 덕분에 삼성은 물론이고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반도체)와 금성사(현 LG전자)가 한결 수월하게 반도체 장비를 수입해 생산 규모를 늘릴 수 있었어요.”라고 전했다. 엄청난 특혜였다.
전두환은 심지어 경쟁사로 전직한 삼성의 기술자들을 삼성에 직접 돌려보내기도 했다. 이와 관련 김광호는 해당 인터뷰에서 “이천공장에서 일한 지 2주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저녁 무렵, 형(김명호 당시 은행감독원 부원장)에게서 전화를 받았어요. 다급한 목소리로 다짜고짜 집으로 오라는 거예요. (……) 형이 ‘오늘 청와대에서 난리가 났다’고 하더군요. 원장(이원조 은행감독원장)이 국무회의에 참석했는데 대통령이 너 때문에 화가 잔뜩 나 있더라는 겁니다. (……) ‘현대가 무슨 돈이 그리 많아서 삼성 출신을 스카우트했느냐’며 노발대발했다는 거였어요. 전두환 대통령은 ‘당장 정주영이 청와대로 들어오라고 해. 김광호하고 삼성에서 현대로 간 24명은 대한민국에서 밥 먹을 생각하지 말라고 해. 그리고 이 원장, 당신 밑에 있는 부원장이 김광호 형이라며? 당장 쫓아내’라며 화를 냈다고 합니다.”라고 말한다.
기자가 “전 대통령이 그렇게 화를 낸 이유는 뭐였습니까?”라고 묻자, 김광호는 “반도체 사업은 국가 기간산업으로 핵심 기술자와 중역의 신상은 해당 기업의 일만은 아니었어요. 더욱이 이병철 회장께서 전 대통령을 만나 ‘정주영 회장이 김광호와 삼성의 핵심 기술자들을 돈으로 다 빼간다’고 하소연하셨지요. 회장님이 반도체 사업에 뒤늦게 뛰어든 정주영 회장을 견제하신 셈이죠.”라고 말했다.
당시 분위기로는 삼성과 현대 그룹의 경쟁은 사생결단의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병철이 직접 대통령의 힘을 이용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또한 폐암 말기에 이른 자신이 셋째아들 이건희로의 경영승계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대통령과의 직접적인 교감이 필요하기도 했다.
이렇듯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삼성의 반도체 사업을 지원했지만, 사업적인 성과는 1988년에야 볼 수 있었다.
현대그룹의 정주영은 1980년대 후반부터 ‘현대전자’를 중심으로 사업구조 다각화를 시도한다. 기존의 건설, 자동차, 조선, 화학 등 중화학공업 위주의 사업구조에서 반도체·통신·금융업 등 고부가가치 사업 분야로 영역을 확대하는 데 주력했다. 창업 2세인 이건희는 부친 이병철과 경쟁자였던 정주영의 이런 직접적인 공세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1992년 2월, 정주영이 대통령 출마 선언과 함께 통일국민당을 창당하면서 사실상 무대를 재계에서 정치권으로 옮겨버리는 바람에 현대그룹과의 피 말리는 경쟁구도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것 또한 이건희가 경쟁사를 의식하여 경영 실적에 연연하지 않고 신경영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이건희 체제의 결정적 기여자는 5공 핵심 신현확과 권익현
전두환 외 이건희 체제를 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두 명의 TK출신 5공 정치인이 있다. 먼저 신현확(1920~2007년)전 국무총리는 홍진기 전 법무부장관(1917~1986년)과 함께 이병철이 기업가로서 대성하기까지 주요한 역할을 한다.
신현확은 이병철의 처가 친족으로 처남뻘이 되는 박준규(1925~2014) 전 국회의장과는 대구고보(현 경북중고교) 선후배 간으로 절친한 사이인 데다 맏사위 조운해(전 고려병원장), 이병철 장남 이맹희와도 선후배 학연으로 얽혀 있다.
신현확은 경북 칠곡 출신으로 대구고보-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TK(대구·경북)의 대부’로 불리며 정·관·재계의 막후에서 상당한 실력을 행사해왔다. 이승만 정권 때 39세에 부흥부(지금의 기획재정부)장관을 지낸 신현확은 당시 이병철이 제일제당·제일모직을 설립할 때 적극 도왔다.
신현확의 아들 신철식은 월간조선(2009년 1월호) 인터뷰에서 “이승만 정권 말기 장관을 지낸 신현확은 부정선거에 책임을 지고 수감되기 전, 이병철에게 전화를 걸어 100만환(현재 가치 1억 원 이상)을 빌려 부인이 혜화동에서 탁구장을 운영한다. 이 돈은 추후 신현확이 기업체 사장으로 있으면서 갚았다.”라고 하는데, 신현확과 이병철의 관계를 짐작케 한다.
신현확은 삼성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홍진기, 송인상 등과도 친분을 맺는데, 이승만 정권에서 장관을 지낸 이들과 같은 교도소에 투옥되면서 친해졌기 때문이다. 신현확은 1979년 신군부의 ‘12·12 쿠데타’ 직전부터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직전까지 국무총리로서 최규하 당시 대통령을 앞세워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김종필의 자전 연재물 ‘소이부답’을 보면, “아마도 신현확은 절대 권력이 사라진 정치 공간에서 최 대통령을 앞세워 행정부가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 여당과 행정부가 따로 굴러가면서 정치 주도력은 헝클어졌다. 그 사이 전두환을 리더로 한 신군부가 권력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군사반란 12·12가 태동하고 있었다. 79년 말 대한민국은 정부와 집권당, 군부가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달리던 혼돈의 시절이었다.”라는 대목이 있다. 즉 김종필은 신현확이 신군부 정권이 등장하게 된 원인 제공자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전 국회의원 이종찬이 동아일보에 연재한 회고록(2014년 10월 25일자)을 보면, “JP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 후보 출마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공화당 의원 총회 직전, 신현확 부총리가 이만섭 의원을 찾았다. “이 의원, 절대로 김종필 씨가 출마하지 않도록 얘기 좀 하시오. 지금 군에서 심하게 반대하고 있소.”라는 부분이 있다. 신현확은 김종필을 견제할 정도의 힘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대로 김종필은 육사 후배들인 신군부 세력으로부터 신망을 받지 못했다.
신현확은 퇴임 직전 자신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의결한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는 광주 민주화운동의 단초를 제공했고, 신군부가 정권을 잡는 데 명분을 제공한 셈이다. 신현확과 신군부 세력의 이러한 관련성 때문에 이후 삼성가 장남인 이맹희의 친구들인 또 다른 신군부 세력이 삼성의 경영권 승계에 관여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신현확은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삼성물산 회장, 삼성문화재단 이사장 등을 지냈다. 그에 대한 이병철의 신임은 이 회장이 유언을 구두로 남길 때,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 중 유일하게 신현확이 집안 식구가 아니었다는 것으로 증명이 된다. 이병철이 사망한 당일, 이사회를 겸한 원로회의 수장을 맡고 있던 신현확은 사장단 회의를 소집, “고인이 생전에 결정한 유훈에 따른다”며 이건희 체제를 공식화했다. 이병철이 삼성의 차기 경영자로 이건희를 최초 발언한 1976년 9월 이후 11년 만이었다.
삼성 이건희 체제 구축의 또 다른 공신은 권익현이다. 1979~1980년, 삼성그룹에는 신군부 주축인 육사 11기, 대구(능인고 졸업) 출신의 권익현이 삼성정밀 전무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육사 동기인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과 함께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의 핵심 멤버였다. 권익현은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구속, 군사재판에서 명령 불복종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변호사도 없이 직접 항소이유서를 작성해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아낸 후 예편했다.
권익현은 친인척이 경영하는 연합철강에도 근무했고, 사업도 했다. 5공 출범에 즈음해 전두환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한 권익현은 1981년 11대 총선에서 경남 산청·함양·거창 지역구에서 당선되면서 정치권에 발을 디뎠다. 그 후 불과 2년여 만에 민정당 경남도지부장, 사무총장을 지낸 후 1984년 당 대표에 취임한다. 그는 취임 후 당권 분립의 개념을 도입하는 등 정권의 실력자로서 자리 잡았다.
권익현의 삼성과의 인연은 19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권익현은 1977년 재직 중이던 연합철강이 국제그룹으로 넘어간 뒤 집에서 쉬고 있는데 이건희 부회장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삼성정밀의 상무로 입사한다. 이건희는 며칠 후 권익현을 호암에게 소개한다.
이병철은 권익현에게 카메라 사업인 ‘삼성 미놀타’ 프로젝트를 맡긴다. 권익현에게 카메라를 맡긴 이유는 반도체 때문이다. 즉 1천 분의 1밀리미터 기술을 요구하는 게 반도체인데, 100분의 1밀리미터 기술을 요구하는 카메라도 못 만드는 삼성을 해외에서 신뢰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후 권익현은 삼성과 정권을 잇는 실세가 된다. 권익현이 월간조선(2015년 12월호)과 가진 인터뷰에 따르면, 1980년 이병철은 일본 정재계의 실력자 세지마 류조(瀨島龍三)를 권익현에게 소개, 전두환과의 회동을 성사시킨다. 세지마는 권익현에게 나까소네 의원을 소개한다. 나까소네는 이후 수상이 되어 방한, 전두환과 정상회담을 갖는다. 이병철로서는 정권의 실력자를 삼성맨으로 거느린 행운을 잡았던 셈이다.
여하튼 경영권 승계를 둘러싸고 경쟁 관계에 있던 이맹희와 가까울 수 있는 육사 11기 권익현을 이건희 부회장이 직접 스카웃한 결정은 5공화국에서 삼성이 견딜 수 있게 된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권익현은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노태우를 대통령에 당선시킨다. 권익현의 사위는 이후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임태희이다.
심정택은 쌍용자동차, 삼성자동차 등 자동차회사 기획 부서에서 근무했고 홍보 대행사를 경영했다. 이후 상업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50여회의 초대전, 국내외 30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한 13년차 미술 현장 전문가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칼럼을 써왔고, 최근에는 미술 및 건축 칼럼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저서로는 '삼성의몰락', '현대자동차를 말한다', '이건희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