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예술을 품은 조개속 작은 진주, 서울공예박물관 도서관

서울을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하나의 장소

2025-11-21     고규영 객원기자

처음 서울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어디를 제일 먼저 보는 게 좋을까'를 물어온다면, 나는 단연코 광화문 광장을 추천할 것이다. 

광화문 광장의 끝에 서면 경복궁을 중심으로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이 병풍처럼 둘러선 모습을 볼 수 있다. 세계 어떤 도심의 중심에서도 볼 수 없는 자연과 역사가 현대 도심에서 여전히 숨 쉬고 있는 풍경이다.

오랜 해외 주재원 생활과 여의도에서만 평생 직장 생활을 해오던 내가 광화문에서 인생 후반전 새로운 직장 경험을 하게 된 것은 참으로 축복이었다. 출퇴근하며 북촌, 서촌, 삼청동 거리를 걷고, 오며 가며 갤러리에 들어가 그림을 보고, 인왕산과 북악산이 보이는 2층 카페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의 최애 산책 코스는 덕성여중과 덕성여고 사이의 감로당길이었다. 

서울공예박물관과 광장. (사진=고규영)


감로당길에서 마주친 시간의 층위

그 길 초입에 서면 넓은 광장 대각선 방향으로 아름다운 아이보리와 흰색의 두 건물이 유리 건물과 연결되어 서 있다. 단아하고 우아하고 품격이 느껴지는 이 건축물이 서울공예박물관이다.

2009년 해외에서 귀국 후 가끔 이 동네를 걸어보던 내게 이 건물은 낯설었다. 이곳엔 분명히 학교가 있었다. 2022년 하반기부터 광화문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마주한 이 건물을 보며 내 머릿속 지도와 현실이 매치되지 않는 혼란스러움이 있었다.

그 혼란은 2017년 이 곳에 있던 풍문여고가 강남으로 이전하고 기존 건물 5채를 리모델링하여 2021년 7월 서울공예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는 스토리를 확인한 뒤에야 해소됐다.

이 터는 세종의 아들 영응대군의 집, 순종의 가례를 위한 안국동별궁 등 왕가의 저택으로 사용되었고, 수공예품을 제작하여 관에 납품하던 조선의 장인 '경공장'들이 있었던 종로구의 중심 지역이었다. 박물관 광장 바닥 중 일부는 안국동별궁터 기둥이 있던 자리를 다른 색 석재로 표시하고 있다.

현대적 감각으로 리모델링하면서도 터전을 최대한 보존하고, 감로당길과 윤보선길도 조선시대 원형에 가깝게 보존하려 노력한 건축가들과 행정가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내가 박물관을 찾은 그날 오전, 아이보리와 흰색 건물 위로 펼쳐진 진한 코발트블루의 가을 하늘은 광장과 광장에 드리운 건물 그림자와 어우러져 그림 같은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서울공예박물관 전신, 풍문여고. (출처= 박물관내 전시 사진)


조개 속의 작은 진주 같은 도서관

제일 가까운 1동으로 들어서면 입구 왼쪽에 도서관이 자리 잡고 있다. 박물관이라는 선입관으로 지나칠 수도 있는 공간이다.

도서관으로 들어서면 환한 햇살과 따뜻한 조명이 분위기 좋은 북 카페 같은 느낌을 준다. 특히 내 눈을 끈 것은 책장 사이 큰 통창 유리를 품고 있는 소파 공간이다. 통창 너머로는 박물관 다른 동의 건물과 정원, 그 너머 송현 열린 광장과 인왕산의 모습이 들어온다.

이곳엔 공예박물관답게 예술과 문화 관련 도서가 비치되어 있다. 규모는 작지만 예술, 문화, 역사를 다룬 책 중심으로 구비되어 있어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이들에겐 작지만 알찬 전문 도서관이다.

한두 분야 전문 서적을 다루는 독립서점들이 대형 서점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독특한 향취가 느껴지듯, 이곳을 예술·문화 전문 독립서점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큰 규모의 서점이라 할 수 있다.

도서관 내부의 공간은 입구 쪽 오픈 책상의 공동 독서공간, 안쪽 책장 사이 숲속 쉼터 같은 편안한 공간, 넓은 광장이 내다보이는 창가 쪽 작업 공간까지 오밀조밀하면서도 아늑하게 구성되어 있다.

특히 광장이 내다보이는 창가 쪽 자리는 내가 생각을 정리하는 글을 쓸 때면 가끔 찾아오는 공간이다. 이곳에 앉으면 오롯이 나만의 세계가 열린다. 창밖으로 마음을 틔워주는 넓은 광장과 대로변 맞은편 인사동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파워코드와 독서 등까지 구비된 나만의 일등석 공간이다.

"책을 읽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밖을 볼 수 있는 창가이다"라는 버지니아 울프의 글이 떠오르는 공간이다.

서울공예박물관 내부


집에서 준비해온 핸드드립 커피가 든 텀블러와 글을 작성할 태블릿, 읽을 책 한 권과 필기도구를 올려놓으면 오늘 하루 나만의 힐링 작업 공간이 열린다.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바닷가를 거닐다 주운 조개 속에서 작은 진주를 발견한 것 같은 나만의 내밀한 공간이다.

책을 넘나드는 전시, 시간의 깊이


이 도서관에 오면 누릴 수 있는 진짜 보물은 박물관 전시공간과 예술품들이다. 도서관 책 속에서 보았던 우리 역사의 보물들을 실물로 볼 수 있으니 책의 현장 학습이라 할까.

가방을 막 내려놓는데 문화해설사의 전시 해설이 있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로비로 나가니 문화해설사 한 분이 계셨고, 오늘 이 시간 참여자는 나 혼자였다. 당황하지 않는 문화해설사님과 함께 오직 나 한 사람만을 위한 VVIP 급 해설을 들으며 2층 전시 공간으로 이동했다.

2층 전시실은 "자연에서 공예로"라는 테마로 고대부터 고려 시대의 예술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이번 전시의 특징은 예술작품과 함께 그 재료와 제작 과정까지 전시에 담고 있다는 것이다.

고려청자에 새겨진 학 문양은 그려 넣은 것이 아니라 흙을 파내어 학의 모양을 만들고, 그 파인 곳에 흰 흙으로 학의 몸체를, 검붉은 흙으로 부리와 다리를 채워 넣고 유약을 발라 구워 낸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흙으로 빚은 도자기 표면에 붓으로 학의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의 무식이 처절하게 깨어지는 소리가 마음속에서 들려왔다.


그 옆 전시공간에는 화려하면서도 신비한 빛을 발하고 있는 자그마한 나전칠기함이 있었다. 이 조그마한 함의 제작에 2년이 걸렸다는 기본 설명에 이어 장인으로부터 2년의 시간이 아닌 바다에서의 전복의 시간, 산에서의 옻나무와 황동의 시간 등 수십 년 수백 년의 시간을 품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는 해설사의 설명에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영국의 환경 예술가 앤디 골즈워시가 "시간은 모든 예술의 원재료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완성된 작품만이 아니라 그 안에 쌓인 모든 시간의 과정이 예술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서울공예박물관내 나전칠기함 전시. (사진=고규영)


장소를 이동하니 또 하나의 전시물이 내 눈을 번쩍이게 한다. '경혜인빈 상시호 죽책', 대나무로 엮은 책이다. 영조가 후궁의 아들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자신의 6대조 할머니 인빈 김씨에게 시호를 올리며 제작한 왕실 의례 공예품이다. 50명의 장인이 동원되었고, 대나무 글자체에는 금가루를 채워 넣었다고 한다.

경탄스러웠지만 책 본연의 자리에서 벗어난 정치적 목적의 전유물이란 생각에 씁쓸함도 느껴졌다.

경해인빈 상시호 죽책(서울공예박물관 전시). (사진=고규영)


시간이 쌓인 공간에서 수천 년의 시간 여행을 하고 다시 도서관의 내 자리로 돌아왔다. 글을 쓰고 책을 보는 사이 차츰 어두워지는 광장을 보며 커피를 마시고 눈과 마음을 쉬어 갔다.

구름이 몰려오는 하늘 아래 광장으로 발길을 옮기며 수천 년 지혜와 예술이 흐르며 시간과 공간을 이어온 이곳에서의 시간 여행을 마무리한다.

바닷가를 거닐다 주워 주머니에 넣어 오던 제주 바닷가의 소라 껍데기와 현무암 돌멩이 같은 작지만 아름다운 이곳, 서울공예 박물관과 그 안의 작은 보석 같은 도서관으로 당신의 시간 여행을 떠나 보지 않겠는가?

고규영은 글로벌 마케팅전략 컨설턴트다. LG전자, LG필립스-디스플레이, LG디스플레이에서 마케팅 임원으로 일했다. 지난 30년간 B2B와 B2C 시장을 아우르며 시장, 고객, 회사의 마케팅 전략 수립과, 글로벌 영화사, 유명아티스트, 메가인플루언서, 글로벌 유통 등과의 마케팅 협업을 해왔다. 기업 퇴임후엔 전문직 공무원으로 봉직하며 기업 홍보경험을 정부기관에 접목하는 시도를 했다. 현재는 기업 및 공공기관 대상으로 마케팅과 AI 관련 강의를 하며, 뉴스버스 객원기자로도 활동 하고 있다. 공저로 <인생후반전, AI와 동행>  <AI와 함께한 두 번째 인생노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