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3세 경영⑩] ‘고래를 삼킨 새우’ SK의 비상…유공을 넘어 이동통신까지
중동 인맥 두터웠던 최종현의 승부수 '유공 인수' 이동통신 사업 참여로 정보통신 혁명의 선구역 자임 재벌3세 경영의 첫 주자 최태원, 반도체로 퀀텀 점프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주도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는 서슬 퍼런 칼날을 재계에 들이대며 중화학부문 투자 조정을 강요했다. 이런 와중에 선경그룹에 기회가 찾아왔다. 국영기업인 대한석유공사(유공)를 인수해 일약 재계 상위권으로 떠오른 것이다.
유공 인수와 3저 호황이 제2 도약의 발판
당시 유공은 매출액 1조원을 넘긴 국내 최대 기업이었다. 선경그룹 전체 매출액은 약 2,000억원으로 유공의 5분의 1에도 못 미쳤다. 새우가 고래를 잡아먹은 격이다. 더욱이 재계 1위 삼성을 제치고 선경이 유공을 전격 인수하면서 온갖 설이 난무했다. 분명한 것은 쿠테타로 집권한 최고 권력자 전두환이 든든한 뒷배였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설령 전두환 신군부와 유착이 있었더라도, 고 최종현 회장의 석유사업 계열화 의지와 노력이 없었다면 유공 인수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재계의 일반적인 진단이다. 선경은 화학섬유가 주력이다 보니 늘 원재료인 석유 확보에 신경을 써야 했다. 최 회장은 1973년 제1차 석유파동 때 안정적인 원유 수입에 크게 기여했다. 신군부도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다. 선경이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와의 밀접한 관계를 토대로 수입 다변화를 제시한 것이 유공 인수에 주효했을 것으로 관측된다.
선경의 친근했던 대국민 이미지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선경은 1970년대부터 ‘장학퀴즈’라는 공익적 TV 프로그램을 후원하는 등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에 앞장섰다. 그 결과 70년대 후반 선경은 삼성, 현대, 대우 등 재벌 3사에 비해 규모가 작았음에도 대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장으로 꼽혔다.
유공을 인수한 선경에게 80년대 후반기 3저 호황(저유가·저달러·저금리)은 제2 도약의 날개를 달아줬다. 한국 경제는 1986년부터 3년 동안 연 12%의 고도성장을 이뤘다. 사상 첫 경상수지 흑자도 이 무렵 달성했다. 우리 경제의 황금기였다. 고래를 삼킨 새우가 유례없는 호황을 만나 고래를 능가하는 슈퍼 새우로 발돋움한 셈이다.
한국이동통신 인수로 재벌 반열에 올라선 SK
1980년대 유공 인수로 폭풍 성장한 선경은 1994년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면서 3단계 ‘퀀텀 점프’에 성공한다. 70, 80년대가 석유화학의 시대였다면, 90년대는 정보통신의 시대였다. 정보화 혁명의 중심에 통신이 있었고, 인터넷 혁명의 매개는 이동통신이었다. 최종현 회장은 80년대 중반부터 착실히 정보통신사업 진출을 준비했다. 미국 방문 중 정보통신 분야의 성장잠재력이 크고 기존 업계와의 경쟁이 심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국내 정보통신 시대를 선도하던 국영기업의 민영화 종작치는 바로 선경이었다.
한국이동통신 인수는 선경그룹을 일거에 재벌 반열로 끌어올린 역사적인 사건이다. 세간의 평가대로 정경유착의 정점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선경 3세 최태원 회장과 노태우 전 대통령 딸 노소영의 결혼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선경의 한국이동통신 인수는 험난한 여정을 거쳐야 했다. 선경의 당초 목표는 제2이동통신 사업자 획득이었다. 선경은 1992년 사업자로 최종 선정됐으나 사돈인 노태우 대통령의 특혜 논란에 휩싸였다. 결국 최 회장은 제2이동통신 사업권 획득 일주일만에 사업 포기를 선언했다. 이후 선경은 1993년 공기업인 한국이동통신(제1이동통신) 인수전으로 방향을 틀었고, 23% 지분을 시가보다 훨씬 높은 가격인 주당 33만5,000원에 인수했다. 선경은 한국이동통신 인수에 성공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재벌 그룹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국내 3세 경영의 첫 출발, 최태원 회장의 도전과 좌절
최종현 회장이 1998년 폐암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뒤 최태원 회장이 SK그룹을 이어받았다. 최태원 회장의 SK 총수 등극은 사실상 국내 재벌3세 경영의 출발이었다. SK는 형제간 상속으로 2새 경영이 일찍 이뤄졌던 데다 최종현 회장이 불과 68세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비교적 빠른 3세 경영으로 이어진 것이다.
1960년생인 최태원 회장은 고려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명문 시카고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학업을 마치고 경영수업을 해오다 최종현 회장의 별세로 38세의 젊은 나이에 재벌 그룹 총수 자리에 올랐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이 막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최태원 회장의 경력사항>
• 1992년: ㈜선경 경영기획실 부장
• 1994년~1995년: ㈜선경 경영기획실 이사
• 1996년~1997년: SK㈜ 종합기획실장 부사장
• 1998년~2015년: SK 회장(재벌 3세 경영의 시작)
• 2016년~: SK주식회사 대표이사 회장
• 2022년~: SK텔레콤 회장
젊은 3세 회장의 앞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최 회장은 2003년 분식회계와 배임 등 혐의로 구속돼 3년의 실형을 살았다. 이 과정에서 위기가 찾아왔다. 최 회장 구속으로 SK㈜ 주가가 폭락한 틈을 타 영국계 펀드 소버린자산운용이 14.99%까지 지분을 확보했다. 당시 최태원 회장 지분은 불과 1.39%. 소버린은 이사선임안 개정 등을 통해 최 회장 측을 압박하고 경영권 분쟁을 주도하며 주가를 폭등시켰다.
이 경영권 다툼은 2005년 최 회장의 승리로 끝났지만, 소버린은 재벌 오너의 사법리스크를 이용해 9,437억원의 투자 이익을 챙겼다. 취약한 재벌 기업의 소유구조를 악용한 부실기업 사냥꾼의 공격에 속절없이 당한 총수의 민낯이기도 하다. 최 회장은 2013년에도 수백억원 횡령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SK 3세 경영은 불법 행위에 따른 두 번의 실형과 소버린 사태라는 암초에 휘청대면서도 석유화학과 이동통신이라는 양대 축을 굳건히 하며 재벌 기업의 위상을 공고히 했다. 최악의 사법리스크와 경영권 공격을 극복한 최태원 회장이 새롭게 도전한 미래 먹거리는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다. 최 회장의 하이닉스 반도체 인수는 선대의 도약을 뛰어넘는 멋진 승부수였다. SK그룹은 하이닉스 인수로 에너지∙화학, 정보통신에 이어 반도체까지 3대 축을 갖추게 됐고, 내수 중심에서 벗어나 수출형 기업이자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으로 우뚝 서게 됐다.
이인형은 가치공학(Value Engineering)분야 국제공인 CVS자격증을 보유한 프로젝트 컨설턴트다. 서울대 농학과를 거쳐 연세대 대학원 경제학과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한국신용정보에서 기업 평가·금융VAN업무를 맡았고, 서울대 농생대에서 창업보육 업무를 했다. 지금은 소비자 환경활동 보상 플랫폼을 구축 중이며, 개인신용정보 분산화 플랫폼도 준비중이다. 금융‧산업‧환경‧농업 등이 관심사다. 기후위기 대응 세계적 NGO인 푸른아시아 전문위원이면서, ESG코리아 경기네트워크 운영위원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