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행 길에 나를 멈춰 세운 곳: 김근태 기념도서관
희망과 민주주의를 묻는 도서관
도봉산에 간다면 꼭 들러야 할 곳. 하늘이 보이는 중정과 고무신 조형물, 그리고 희망에 관한 질문이 기다리는 도서관이 있다.
예상치 못한 발견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 남짓 달려 도봉산역에 내렸다. 굴다리 아래에는 할머니들이 과일과 나물을 늘어놓고 있다. 막 따온 듯 싱싱한 고사리, 붉은 대추, 손끝이 까맣게 물든 미소들... 한 줌 사고 싶었지만 짐이 무거워질까 아쉬움을 뒤로한다. 길을 건너자 좁은 골목 양편으로 포장마차들이 옹기종기 늘어서 있다. 전주집 홍어젓볶음, 나영이네 낙지볶음, 해물파전, 매운탕, '국가대표 포장마차'라는 자신만만한 간판까지. 진동하는 음식 냄새가 발걸음을 붙든다. 그 향을 뒤로하고 골목을 빠져나와 모퉁이를 도는 순간, 예상치 못한 풍경이 펼쳐진다. 먹거리 골목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베이지 화이트 계열 건물. 도봉산 절벽을 병풍처럼 등에 두고 선 이 건물은 미술관처럼 모던하고 단정한 선으로 나를 멈춰 세웠다. '김근태기념도서관'이다.
미술관 같은 김근태 기념도서관
희망과 민주주의를 말하는 도서관
궁금함에 이끌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공간은 세 부문으로 나뉜다. '생각곳'이라는 이름의 하얀색 열람실이 있다. 책장마다 "정직은 미래를 낳는다"는 문구가 있다. 나무색 서가가 계단을 타고 3층까지 이어지는 공간,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것은 가운데를 텅 비워둔 중정이다. 중정은 천장을 걷어내 하늘을 도서관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곳에는 '근태 서재'라는 제목의 원형 조형물을 검정 고무신들이 둘러싸고 있다. 고무신은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다 먼저 떠난 이들의 걸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고무신 속에 피어난 풀과 이끼를 보니 갑자기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들의 아픈 삶을 딛고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2층에 올라가니 '바람이 분다. 시를 읽어야겠다'는 안내판과 추천 시집이 전시되어 있다. 마음에 드는 시를 골라 필사해보라는 제안. 필사 시로 이문재 시인의 '지금 여기가 맨앞'이 걸려있다.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 막다른 길도 누군가에게는 끝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시작의 문이 된다는 의미의 시를 웅얼이며 1층으로 내려와 외부를 둘러본다. 담벼락에 김근태의 '희망'에 관한 생각이 새겨져 있다.
희망을 의심할 줄 아는 진지함
희망의 근거를 찾아내려는 성실함
대안이 없음을 고백하는 용기
추상적인 도덕이 아닌
현실적 차선을 선택해가는 긴장 속에서
우리는 다시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김근태. 그는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었다. 1985년 남영동에서 혹독한 고문을 겪었고, 이후 정치인으로서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늘 "희망은 힘이 세다"고 말했지만, 그가 말한 희망은 밝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진지함·성실함·용기·긴장으로 만들어지는, 미래를 향한 현실적이고 진지한 태도였다.
유네스코의 '공공도서관 선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도서관은 주체적인 인간을 길러내고, 사회를 외면하지 않는 민주주의의 공간이다." 김근태 기념 도서관은 그 문장을 건축과 전시로 조용히 실천하고 있는 듯 하다. 그의 삶과 기록을 읽으며 어느 새 희망과 민주주의의 의미를 다시 묻게 되니 말이다.
이 건물이 들어선 땅은 원래 '삐뚤고 불완전한 필지'였다고 한다. 건축가는 그 결함을 지우지 않는 대신 위에 그리드와 질서를 새롭게 그려 넣었다. 불완전함 위에 만들어진 질서. 다름 위에서 세워지는 조화. 그 구조는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 같다. 민주주의는 완벽한 조건에서 시작되는 제도가 아니라, 갈등과 모순, 비틀린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함께 살기 위한 질서를 조금씩 세워가는 과정이 아닐까.
별이 바람에 스치는 오후에
도봉산행을 마치고 어스름 무렵 다시 도서관을 찾았다. 불빛과 가을 바람이 섞이는 시간대의 도서관은 오전과는 다른 온기를 품고 있었다. 그때 문득 윤동주의 시가 떠올랐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가을 날, 가을 저녁의 도서관이 내게 다시 묻는 듯했다.
희망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나는 어떤 마음으로 내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찾아가는 길
도봉산역 1번 출구에서 도보 5분. 등산 전후로 들르기 좋다. 입장료 무료. 월요일 휴관.
김희연은 기업전략 컨설턴트다. 씨티은행에서 출발, 유수 증권사의 IT애널리스트를 거쳐 2009년 LG디스플레이로 자리를 옮겼다. 금융·증권·IT·제조 분야를 아우르는 경험을 바탕으로 LG디스플레이 최고전략책임자(CSO)에 올라 전략·신사업 발굴·IR을 총괄했다. 퇴임 후엔 AI를 통해 현자·석학들과 대화하며 전략·리더십 해법을 탐색하는 <AI스토밍(AI-Storming) 방식> 을 창안했고, 관련 저작권도 갖고 있다. 현재는 이 독창적 방법론을 기반으로 기업과 기관에 <전략 컨설팅> 및 <AI활용 강의> 등을 하고, 뉴스버스에 'AI리터러시'를 연재하고 있다. ‘AI 시대 공감이 경쟁력’이라는 주제로 쓴 <공감지능시대>라는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