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의 약탈적 ‘힘의 정치’와 한국 생존 외교의 길
10월말 경주 APEC,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 무대로 활용해야
10월7일로 만 2년을 맞는 중동 가자지구 전쟁 현장은 참혹하다. BBC 등을 통해 중계되는 가자지구의 장면은 이스라엘군의 끝없는 공습과 지상군 투입으로 인해 거대한 폐허로 아수라장이 된 모습이다. 경악스럽다. 도시 전체가 온통 잿더미가 변했다. 한 중년여인이 “아들도 죽고, 가족들 모두 죽었고, 먹을 것도 아무런 희망이 없다”며 폐허더미에 앉아 통곡하는 장면은 지옥을 연상시켰다. 어느 나라가 무슨 권리로 타국의 시민을 이렇게 죽이는 것일까?
최악의 위기를 겪는 가자 사태는 일본제국주의 군대에 의해 침탈당했던 일제 식민지시대 우리의 과거 모습을 연상시킨다. 과거 같으면 이에 맞서 국제사회 곳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이어지겠지만, 지금은 조용하다. 이를 이용해 노벨평화상을 노리는 트럼프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국을 압박하고, 이스라엘의 잔인한 폭격은 쉼없이 이어지고 있다. 비극적인 죽음의 연속이다. 가자지구 당국에 따르면 민간인을 포함한 현지 팔레스타인인 사망자는 6만6,000명을 넘어섰다. 최소한의 인도주의마저 외면한 채, 자국의 승리와 국익만을 추구하는 지구촌의 한 단면이다.
21세기 지구촌의 국제정치 속성이 약육강식과 자국우선주의로 대표되는 ‘정글 정치’로 탈바꿈하고 있다. 강대국에 의한 경제적 약탈과 힘의 횡포가 공론장과 제도 바깥을 막론하고 지구촌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특히 미국과 중국, 두 강대국의 패권다툼은 경쟁을 넘어 상대국을 압박하며 무역·기술·안보 장벽을 재구축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에 의해 관세, 수출 통제, 연합외교 등을 무기화하는 새로운 형태의 ‘강대국 중심의 권력정치’가 심화하고 있다. 중국 역시 마찬가지 모습이다.
이같은 강대국 사이의 경쟁은 자유주의적 규범과 제도를 약화시키고, 대다수 국가들의 외교 선택지를 좁히며, 지역과 국제질서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로 태풍의 눈에 들어간 상황이다. 트럼프와 시진핑 중심의 미중 갈등과 폭풍같은 지구촌의 배타적인 지정학적 상황 속에서 대한민국은 어떤 외교적 선택을 해야할까?
강대국 간 ‘경합의 장’, ‘무차별적 국익 추구’ 지구촌 혼란 심화
지구촌 전반의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 서양 중심의 국제사회는 민족국가 체제 형성 과정에서 강대국들이 각축전을 벌였고, 무질서한 혼돈과 약육강식의 속성을 보이며 ‘총력전’으로 불리는 거대한 전쟁을 겪어야 했다. 국제정치는 ‘리얼리즘’으로 불리는 현실주의, ‘리버럴리즘’으로 명명되는 자유주의, 배타적인 국가중심적 사고를 벗어난 구성주의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특히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국제사회는 현실주의를 통해 강대국 간의 안정적인 힘의 균형을 추구했고, 자유주의를 통해 합법적인 규범과 제도적 장치들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는 국가 행위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국제사회의 안정성을 찾으려는 노력이었다. 냉전 시기에 수립한 유엔 체제, 탈냉전 이후 형성된 미국의 자유주의 패권 질서가 대표적이다. 최근 가장 두드러진 모습이 격렬한 경제전쟁과 함께 진행되는 관세 및 수출 통제의 재등장이다.
트럼프 1기가 출범한 2018년 이후 시작된 미·중 무역분쟁은 갈수록 격화하고 있다. 관세 부과는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의 전략적 도구로 상시화했고, 2024~2025년 이후 재차 강화된 관세·비관세 조치와 더불어 반도체·AI 관련 수출통제까지 펼쳐지고 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예외가 없는 상황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무차별적인 경제무기화는 글로벌 가치사슬을 재편하고, 교역·투자 흐름에 구조적 비용을 높이며 국제질서의 혼란을 부채질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규범으로 작동해온 자유주의 국제질서도 취약해지고 있다. ‘규칙 기반 질서’에 대한 담론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점차 실효성이 상실되고 있다.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제도를 회피하거나 기만하고, 힘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때 국제적 규범과 다자제도는 신뢰를 잃는다. 이 같은 현상이 반복되고 제도적 공조가 약화하면, 분쟁의 평화적·예측가능한 해결 능력이 떨어지고, 변칙적·일방적 대응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굴욕 강요와 계속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팔레스타인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된 가자 문제 처리, 파나마나 그린란드 및 캐나다에 대한 합병 주장과 같은 트럼프의 공세적 외교가 단적인 예이다. 미국은 자유주의 패권 질서의 상징이었던 유엔, 세계무역기구, 국제형사재판소 등을 탈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실제 파리기후협정과 유네스코 등을 탈퇴했다. 미국이 전통적인 동맹이나, 규범과 도덕성의 제약들을 무시함에 따라, 국제사회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미증유의 상황에 맞닥뜨리고 있다.
완충지대 역할을 해온 유럽의 상대적 약화와 지역적 불균형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유럽은 경제·외교적 영향력, 방위능력, 전략적 자율성이 다 함께 취약해지고 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을 받은 나토·유럽 국가들이 국방 투자를 약속하고 있는 가운데, 역내 군사력·공급망·전략적 조정도 실제 추진되고 있다. 유럽은 과거와 달리 ‘세계적 규범 수호자’로서의 역할 수행에 제약을 받고 있고, 결과적으로 지구촌 전체의 위기 대응과 질서 재건에 힘을 싣기 어려운 상황이다.
최근 미국과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부각되면서, 아시아·아프리카 등 제3지대의 취약성도 증대하고 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은 무역·투자 위축, 공급망 분절, 채무리스크 등 외부의 충격에 취약한 특성을 갖고 있다.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 확대는 인프라 투자·대출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고, 그에 따른 정치적 의존성, 자원 접근을 둘러싼 경쟁은 지역적 불안정을 심화시키고 있다. 이에 따라 약소국들은 강대국 간 ‘경합의 장’으로 전락하고 있으며, 극대화된 미국과 중국의 세력권 사이에서 공포에 떨며 좌충우돌하고 있다.
전략적 선택 강요 ‘리스크 심화’, 실천 가능한 국익 중심 전략 필요
한국은 대외 의존성이 높은 경제구조 때문에 수출이 중국과 미국 시장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두 시장에서 동시에 압박을 받으면 충격을 흡수하는 능력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기술과 공급망이 타격을 입고 있다. 반도체와 첨단부품은 미중 사이에서 지정학적 목표물이 되었고, 관세를 동원한 수출 통제와 제재는 산업 생태계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안보 딜레마도 부각중이다. 미국과의 안보동맹은 한국의 방위에 필수적이지만, 동맹 강화로 인해 중국 관계에서 갈등이 초래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안보 동맹’과 ‘경제적 실리’ 사이에서 전략적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같은 냉혹한 국제지정학적 상황에서 한국이 할 일은 무엇인가? 실천 가능한 국익 중심 전략 수립이 필수적이다. 미중 갈등 속에서 동맹의 억지력 강화와 동시에 비용을 줄이는 외교력이 필수적이다. 미국과의 군사 및 전략 공조는 지속해야 하며, 한미동맹은 ‘방어 능력’의 확충과 동시에 외교적 채널을 통한 위험 관리를 병행해야 할 것이다. 중국과의 경제적 협력 역시 계속 유지하되, 전략기술·민감 품목에 대해서는 동맹과 조율된 공조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동시에 기후·보건·해양 같은 글로벌 공공재 분야에서는 미국뿐 아니라, 중국과 협력의 문을 열어두는 선택적 협력과 분리 전략을 지속할 필요가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경제 포트폴리오를 재구성하는 교역·투자 대상의 다변화 전략을 유지해야 한다. 아세안(ASEAN)·인도·유럽·중남미 등으로 시장 다각화와 무역협정 확대, 기업 차원의 해외생산 거점 장려, 해외 투자 리스크 보험·지원체계 강화 등이 필요하다. 반도체 이하 밸류 체인의 상류인 소재·장비 부문과 인공지능·양자 등 미래 핵심기술에 대한 중장기 투자 및 인력양성과, 규제·세제·공공조달을 통한 민간의 장기투자를 유인하는 것 또한 절실하다. 동시에 한국은 중견국으로서 중도적·중재적 역할을 통해 규범·제도의 복원에 기여하는 외교의 지평 확대에 나서야 할 것이다. 한국 주도의 다자 플랫폼인 경제안보포럼, 공급망 협의체 등을 만들어 투명성과 책임성을 갖춘 실질적 대안규범을 제시하고 만들어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어느 한 나라에 무조건 편을 드는 급격한 ‘선택’을 회피해야 한다. 경제적 기회를 포기하거나 군사적 위험을 자초해서는 안되며, 과도한 보호무역과 자국 우선주의에 골몰해 장기적 경쟁력을 훼손해선 안될 것이다. 국내적으로는 국민 설득과 이해, 정책 연속성의 확보가 필요하며, 대외적으로는 국내 정치의 단기 변동에 의해 흔들리지 않도록 외교·안보 전략을 탄탄하게 세워야 할 것이다.
전략적 실용주의-협력적 다자주의 추구해야
국제정치의 현실은 갈수록 냉정하고 험악해지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강대국의 약탈적 행태까지 나타나는 ‘힘의 정치’와 관세 및 수출 통제의 재등장은 이상적으로 믿어온 규범만으로는 대응할 수 없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힘에 의한 횡포가 국제사회의 규범을 완전히 대체하는 경향이 방치되지 않도록 외교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후 G-7, 유엔 등 다자외교 무대와 한미, 한일 정상회담 등을 통해 성공적인 외교행보를 펼쳐왔다. 특히 10월말 열리는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트럼프-시진핑이 함께 하는 대형 외교무대라는 점에서,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 무대로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다. 주최국인 한국에서 한·중 정상회담과 함께 트럼프 2기 첫 미·중 정상회담이 성사된다면 전 세계의 이목이 한국에 집중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이를 외교 공간을 넓히는 기회로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다. 특히 한반도 평화와 북핵 문제를 다자 협력의 테이블에 올리고, 기후변화·에너지 전환·디지털 무역 규범과 같은 글로벌 현안에서도 선도적 제안국으로 나서는 등 구체적 의제를 주도해야 할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이 과정에서 최근의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인 국제정치의 현실을 고려해 외교의 유연성과 회복 탄력성을 가진 구체적인 전략과 실행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익은 억지와 회복력을 갖춘 ‘현실주의적 전략’과 중견국 연대와 규칙 재창조로 대표되는 ‘규범·제도의 복원’을 병행할 때 지킬 수 있다. 이를 통해 공존을 위한 상식과 합리성을 추구해나가야 할 것이다. 또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협력과 협상을 주도적으로 진행하면서, 민주주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정치세력이 국내외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해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같은 전략적 실용주의와 협력적 다자주의를 통해 가자 사태 등 국제사회의 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지구촌의 중견 주도국가로서의 입지를 다져야 할 것이다. 쉽지 않지만, 전략적 명확성과 정치적 결단, 사회적 연대가 결합될 때 가능하며, 이재명 대통령의 국민주권정부가 반드시 가야할 길이다.
김홍국은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 지도자의 국정운영과 리더십, 협상력과 조정력, 국가보훈 등을 연구하고 현실정치에서 실천해왔다. 이재명 대통령의 경기도지사 시절 경기도 대변인을 지냈다. 언론인으로 청와대를 비롯 주요 영역을 취재했고, 대학에서는 국제정치학 박사로서, 정치학, 언론학, 정치커뮤니케이션과 스피치 등을 강의해왔다. <리더의 말하기> <넬슨 만델라 위대한 조정자>, <오바마 2.0>, <미국의 거장들> 등의 저서와 <대통령의 국정어젠다와 對 국회 협상에 관한 연구>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