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도리
중용의 덕을 쌓는 수행의 근본 이치
우주는 양(陽)과 음(陰)이 맞물려 만들어가는 세계다. 양을 대표하는 중천건(重天乾)이 생명 에너지를 발산하는 생명 활동의 도리를 담고 있다면, 음을 대표하는 중지곤(重地坤)은 그 에너지를 응축하고 생명의 관계를 형성하는 도리를 함축하고 있다. 지상의 여러 생명 요소를 하나로 융합하는 관계의 도리가 없다면, 어떤 생명 에너지도 결실을 볼 수 없다. 공자는 이 이치를 “건은 큰 시작을 주관하고, 곤은 만물을 이룬다(乾知大始, 坤作成物)”라고 풀이했다. 변화를 선도하는 양(陽)과 그 변화에 관계의 질서를 부여하는 음(陰)의 보상 관계가 세상의 상태를 결정한다.
음양의 상반된 작용이 조화를 이룰 때는, 세상은 조화로운 평화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 작용이 대립과 반목으로 치달으면, 삶은 고통의 가시밭길에 놓이게 된다. 중천건이 하늘이라면, 중지곤은 땅이다. 땅은 하늘의 변화에 맞게 생명의 관계망을 마련한다. 단사(彖辭)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지극하고 으뜸인 곤이여, 만물이 이에 의지해 살아가고, 하늘을 본받아 따른다. 대지는 만물을 빠짐없이 싣고, 그 덕은 끝이 없이 원만하고 광대하다(至哉坤元, 萬物資生, 乃順承天. 坤厚載物, 德合无疆, 含弘光大).” 중천건처럼 중지곤도 어떤 특정 현상에 관한 내용보다는 전체적 대의를 표현하고 있다.
중지곤의 핵심 도리는 “암말의 지조면 이롭다(利牝馬之貞)"라는 괘사에 함축되어 있다. 암말은 생명 관계의 도리를 따르는 순리(順理)를 뜻한다. 주역에서 음(陰)을 여성에 비유하고 양(陽)을 남성에 비유하고 있지만, 이러한 비유는 상대적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역할에 있다. 하늘의 순리는 천문의 흐름과 일치한다. 괘사 중에서 암호와 같은 구절인 “서남쪽으로 가면 친구를 얻으나, 동북쪽으로 가면 친구를 잃는다(西南得朋, 東北喪朋)”라는 말은 음양의 이치를 따르면 이롭다는 뜻이다. 서남(西南) 방향에서 달이 떠서 동북(東北) 쪽으로 지는 것처럼, 밝음에서 어둠으로 돌아가는 음양 순환과 생체리듬이 조화를 이룰 때 생명의 기운은 충만하게 된다.
중지곤의 상사(象辭)는 생명 관계의 도리를 다시 한번 짧게 정리하고 있다. “땅의 생명 에너지가 곤이고, 군자는 두터운 덕으로 만물을 가꾼다(地勢坤, 君子以厚德載物)." 덕을 베푸는 도리에 관해 공자는 문언전(文言傳)에서 “곤은 지극히 부드러운 기운이지만 그 움직임은 강하고, 지극히 고요한 모습이지만 그 덕은 곧게 사방에 미친다(坤至柔而動也剛, 至靜而德方)”라고 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덕을 펼치는 모습인 강유(剛柔)와 동정(動靜)의 조화가 생명의 질서를 부여한다.
중지곤은 관계의 망을 넓히는 도리를 담고 있다. 초육(初六)은 생명 관계의 1단계다. 여기서 육(六)은 음(陰)을 대표하는 숫자다. 중지곤은 절기상 입동(立冬)과 소설(小雪)이 있는 음력 10월에 해당한다. 중지곤의 가장 밑에 있는 초육(初六)은 이런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효사(爻辭)는 그 특성을 얼음이 응결되는 과정으로 표현하고 있다. 상사의 핵심은 “이러한 도리를 따라간다(馴致其道)”라는 말에 있다. 문언전에서 그 도리에 관해 “선(善)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뒤따른다(積善之家, 必有餘慶)”라고 자업자득의 이치로 풀이했다. 인류사회의 흥망성쇠에는 반드시 그만한 연고가 있기 마련이다. 여기에는 모든 것은 시작하는 대로 끝난다는 물리의 법칙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생명이 응결되는 1단계에서는 고요함을 전일하게 지켜 생명력을 키우는 것이 도리다.
육이(六二)는 생명 관계의 2단계다. 효사는 그 도리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곧게 사방으로 뻗으니 크고, 익히지 않아도 불리함이 없다(直方大, 不習无不利).” 여기서 핵심은 직(直)과 방(方) 그리고 불습(不習)의 의미다. 문언전에서 “직은 바른 것이고, 방은 의로운 것이다(直其正也, 方其義也)”라고 풀이하고 있다. 직방(直方)의 도리를 넓히는 2단계에서는 절제되고 지나침이 없는 언행을 닦는다. 불습에 관해서는, 바른 도리로 하는 “행위에 대해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는다(不疑其所行也)”라고 설명하고 있다. 바른 도리의 초발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지켜나가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깨달음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육삼(六三)은 생명 관계의 3단계다. 효사의 핵심은 “아름다운 빛을 머금고 있어 올곧을 수 있다(含章可貞)”라는 말에 있다. 함장(含章)은 아름다운 진리의 빛을 내포하고 있다는 뜻으로, 천문으로는 가장 밝은 보름달에 해당한다. 비록 육삼의 자리가 음효(陰爻)로서 양위(陽位)에 있어서 성과를 내기 힘들지만, 진선미(眞善美)의 덕성을 품고 있으므로 큰일에 종사할만하다. 겸양의 정신으로 기본기를 닦아나가면 끝내 형통하게 된다.
육사(六四)는 생명 관계의 4단계다. 효사의 핵심은 “자루를 단단히 동여맨다면, 허물이 없다(括囊, 无咎)”에 있다. 그 뜻을 상사는 “신중하면 피해가 없다(愼不害也)”라고 풀이하고 있다. 육사는 음효가 음위(陰位)에 바르게 있으나, 상괘의 가운데 자리는 아니다. 더욱이 최고 지도자를 보좌하는 위치에 있다. 따라서 매사에 신중하고 언행을 조심하는 것이 도리다.
육오(六五)는 생명 관계의 5단계다. 효사는 최고로 좋다. “황색 치마와 같은 상태로서 최고로 길하다(黃裳, 元吉).” 상사는 그 뜻을 “문화 속에 중용의 덕성이 있다(文在中也)”라고 풀이하고 있다. 중용은 양극적 모순 속에서 조화를 찾는 중도의 현상적 도리다. 육오는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양위에 있지만, 음효의 순덕(順德)을 지니고 있다. 이 단계의 핵심 도리를 문언전에서 “군자는 안팎에서 중용을 꿰뚫어 구현한다(君子黃中通理)”라고 설명한다. 황중통리(黃中通理)에서 황은 오행(五行)에서 중재 역할을 하는 토(土)의 색깔이다. 따라서 황중은 중용의 이치를 통달한 상태로, 지도자를 뜻하는 황상(黃裳)의 덕목이다. 지도자는 중용의 도리로 모든 사람과 협력하고 조율해야 형통하다는 가르침을 암시하고 있다.
상육(上六)은 생명 관계의 6단계다. 효사는 매우 불길하다. “용이 들에서 싸우는데, 그 피가 검붉은 황색이다(龍戰于野, 其血玄黃).” 상사는 이 뜻을 “그 도가 끝에 도달했다(其道窮也)"라고 풀이했다. 중천건 상구(上九)의 효사인 항룡유회(亢龍有悔)에 대응하는 말이다. 효사의 의미를 문언전에서 “음이 극에 이르러 양에 비기려 하면 반드시 싸움이 벌어진다(陰疑於陽必戰)”라고 풀이하고 있다.
상육의 효사와 상사는 마치 문명 전환기의 세상을 예견한 듯하다. 시대의 대전환에는 커다란 진통이 불가피하다. 지금 세상은 문명의 갈림길에서 세계전쟁의 대위기에 직면해 있다. 어떻게 하면 위기를 극복하고 평화를 회복할 수 있을까? 6효의 변효로 볼 수 있는 산지박(山地剝)과 택천쾌(澤天夬)에서 지혜를 얻을 수 있다. 극한 상황에서도 정신을 깨우고 바른 결단을 하면, 위기를 기회로 전환할 수 있다. 융합시대에 맞는 새로운 정신문화가 필요한 이유다.
중천건 용구(用九)처럼, 중지곤에도 다른 괘에 없는 용육(用六)이 있다. 용육은 관계를 맺는 도리를 함축한다. 주역은 그 도리를 한마디로 “영원히 올곧으면 이롭다(利永貞).”라고 단언하고 있다. 여기서 올곧음은 중정(中正)의 도리를 뜻한다. 그것은 변화와 관계의 도리가 조화를 이룬 이치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어둠을 밝히는 지혜》의 〈송구영신(送舊迎新)의 바른 마음가짐〉을 참조하기 바란다.
여기서는 그 핵심을 말하겠다. ‘영원히 올곧음(永貞)’은 수행의 핵심이고, 다른 모든 영역의 핵심 도리이기도 하다. 진실한 마음이 대동사회의 문을 여는 열쇠이고, 영원한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본질이다. 모든 성인(聖人)의 말씀은 이 점에서 한결같다. 구체적인 방법들은 상황에 따라 변하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결국 물리적 경계 안의 변화일 뿐이다. 물리적 해결책은 또 다른 문제를 계속해서 일으키기 마련이다. 근원적인 해결책은 마음의 근원을 찾는 일이다.
그러나 온갖 권모술수와 악의가 중첩된 현실에서 진실한 마음을 유지하기는 매우 힘들다. 더욱이 마음의 근원을 찾기란 극히 힘들다. 하지만 인간은 물리적 세계의 모순을 수용하고 초월해서, 영원한 정신의 세계를 지향해야 하는 숙명을 타고났다. 주역은 바로 이 숙명을 해결하는 구체적인 도리를 담고 있다. 주역의 지혜를 통해 위태로운 현상 속에서 안전하게 목숨을 지킬 수 있다. 또한, 주역은 현상을 역으로 이용해서 진리의 세계로 넘어가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주역을 생활 수행서(修行書)로서 그 의미를 음미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동석은 에머슨 전문가로, 그가 번역한 <자연>은 BTS RM이 읽어서 꾸준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한때 서남대학교 영문과에 재직했지만, 2007년 사회에 나와서 특별한 인연으로 수행(修行)을 연구했다. 현재 AI 시대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인간교육과 수행에 관한 집필, 연구개발을 주로 하고 있다. 수행의 원리를 다방면으로 해석, <주역 인생전략>을 비롯해 <경계를 넘어 통합을 보다>, <나를 찾을 결심>, <융합창의력과 인간교육>, <어둠을 밝히는 지혜>, <미국의 정신 에머슨> 등 15권의 관련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