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트니즘(Manhattanism)'을 해체하다- 김호봉 작가
김호봉(Hobong Kim·63) 작가는 1993년 모교인 선화예고 교사를 그만두고 미국 유학을 떠났다. 뉴욕대 대학원(스튜디오아트) 졸업 이후 비디오 아티스트의 꿈을 꾸며 활동하였다.
1997년말 한국은 외환위기로 휘청거렸다. 현지에 완전히 정착하지도 못했고, 귀국해도 자리잡기 힘들 듯 한 이중고에 빠졌다. 직업으로서 예술이 사치에 가깝다는 현실 인식에 맞닥뜨렸다. 모니터·기계·소프트웨어·디스플레이 등의 장비가 필수인 비디오아트를 2000년 뉴욕한국문화원 전시를 끝으로 놓았다.
이후 10여년 이상 작품 활동을 하지 못했다. 뉴욕 맨해튼의 ‘이스트 빌리지(동촌)’를 떠나 뉴저지 버겐 카운티의 포트리(Fort Lee), 팰리사이드팍(PALISADES PARK)을 거쳐 테너플라이(Tenafly)에 자리 잡고서야 화업(畫業)의 출발이었던 평면 작업으로 돌아갔다. 포트리와 테너플라이는 맨해튼 관문인 포트오소리티 버스 터미널(Port authority BT)까지 30분이면 도달하는 뉴욕권역에 속한다.
김호봉은 2015년부터 작품의 방향을 서정적이면서 초현실주의 지향의 동화적 요소를 대입하였다. 주변부 도시에서 느끼는 중심지와의 격차를, 일상을 구성하는 거리와 상점 등 배경을 수채화와 아크릴 중간의 탈색된 낡은 듯한 정취를 표현하고자 했다. 이를 이도 저도 아닌 중간 지대에서 살아가는 모습이라 보았다.
군중 시리즈 작품 상단의 6/7이 여백이다. 공기처럼 떠다니는 숫자들은 사람들이 쫓는 물질적 욕망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가 허무주의자로도 보일 수 있는 삶의 공허함을 드러냈다. 화면 속 군중들은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 무미건조한 일상에 떠 다니는 생존 자체가 삶의 방향이 되어버린 이들이다.
그는 작가연하지 않는다. 뉴욕과 인근에 사는 대부분 한인 작가들이 뉴욕 미술계에 편입되지 못하고 있다. 스스로, 뉴저지에서 KCC한인 동포회관과 개인 스튜디오인 아트컴센터(artcomcenter)에서 성인들과 미술 대학 입시생들을 가르치며 대관 갤러리(ACC)를 운영한다.
2018년 전시 ‘기억의 재구성’, 2020년 전시 ‘결핍’에는 블랙과 화이트를 주조색으로 뉴욕의 일상을 그린 작품들을 내놨다. 화폭에 종종 보이는 나비는 고단한 이민자들 삶에 희망 또는 이룰 수 없는 신기루를 상징하는듯 보인다.
작가의 눈에 들어 온 공간과 대상은 그 자체로 상황이나 심리에 따른 내러티브 (narrative·이야기)를 지닌다. ‘잃어버린 시간(lost time1, 2020)’은 뉴욕에 도착한 첫 해, 서른 한 살 유학생 눈에 비친 소호의 모습이다. 롱코트를 걸친 여인, 중절모의 신사, 힘 없이 계단에 걸터앉은 노숙자를 한 화면에 그렸다.
김호봉은 화면에서 실제 장소성을 지니면서도 시간을 초월하는 공간을 선택한다. 작품 속 뉴욕은 질 들뢰즈(Gilles Deleuze·1925~1995)가 말한 ‘눈으로 만지는 공간’이며 시간의 맥락과는 단절된 듯한 장소성이 엿보인다.
작가에게 평면 작업의 매력은, 온갖 생각과 기억이 손을 통해 ‘그려지고 만져진’ 것과 마주한다는 점이다. 김호봉에게 작업은 시간의 켜를 인식하고, 기억의 파편을 더듬으며, 사라지는 것들을 애도하는 행위이며, 자신과 가족(부인, 고양이·그림 속 아톰)이 함께한 시간의 로쿠스(locus·궤적) 찾기이다.
미국 철학자 케이시(Edward S. Casey·1939~ )의 관점에서 장소는 몸을 중심으로 지각되는 영역이다. 작품의 모티브가 되는 거리, 가게, 자신의 작업실, 전시기획자의 역할을 요구하는 갤러리는 각각 경계의 영역을 지니면서도 공간이나 시간에 종속되지 않는다. 화폭에 펼쳐지는 장소는 자신의 일상과 겹쳐지기에 숱한 이야기를 은닉하고 있다.
'뉴욕 랩소디(New York Rhapsody)'는 2022~2023년 뉴욕과 서울에서 가진 개인전 전시 타이틀이다. 페인팅 작업을 디지털화한 작업과 목탄을 사용하여 카본 박스 표면에 드로잉으로 뉴욕커들을 표현하였다. ‘랩소디(rhapsody)’는 ‘자유로운 기악곡’을 뜻한다. 작품의 오브제이자 프레임인 박스 안에서 단색의 흐릿한 모습의 뉴욕커들은 기차를 기다리고, 무표정하게 앉아 있거나 서 있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또는 어디론가 바삐 걸어간다.
글로벌 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의 박스 포장재는 아마존 생태계에 의존하는 미국 소비자본주의를 상징하는 기호(signage)이며, 인간이 거주하는 터전(shelter)이 있어야 하듯 상품 담는 용기(container)라는 복합성을 지닌다.
한 장의 종이가 상자가 되고, 상자는 작은 방이 된다.
그 안에는 물건이 아닌 얼굴이 놓여 있다.(…)
이 상자는 더 이상 소비의 그릇이 아니다.
그 안에는 스쳐간 만남의 온기, 잊혀져가는 이름,
그리고 내가 잠시 머무른 시간을 대신 담고 있다.(2025년 8월 25일 김호봉 페이스북)
건축가 렘 쿨하스(Rem Koolhaas·1944~ )는 자신의 저서 '정신나간 뉴욕(Delirious New York·1978)'에서 뉴욕 맨해튼의 건축적 장치가 엘리베이터·에스컬레이터·에어컨의 기술이라고 역설하며 유럽의 모더니즘과 구별해 '맨해트니즘(Manhattanism)'이라 불렀다.
해체주의는 새로운 형태와 공간(form and space)은 설계 과정의 해체(deconstruction)를 통해 다시 건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피터 아이젠먼(Peter Eisenman·1932년~ )의 카드보드(cardboard·판지) 건축이 대표적이다.
2024년 전시 ‘낯선 시간, 낯선 공간, Unfamiliar Time, Unfamiliar Space’에선, 사람들은 카페에서 사람을 만나고 커피를 마시며, 무심히 횡단보도를 건너며, 가게 안을 들여다 본다. 평범한 뉴욕 거리 일상의 풍경을 옅은 파스텔톤 페인팅으로 드러냈다.
작품 속에 숨은듯 낯선 존재를 발견 할 수 있다. 어린 소년 모습의 작은 로봇, 작가는 1960년대와 1970년대생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우주소년 아톰을 30여년전 뉴욕에 당도한 자신으로 의인화하였다. 유학 생활의 출발이자 관건인 영어 습득이 마음만큼 진전되지 않아 사람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해 혼자 놀았던 경험을 담았다. 그림 속 아톰은 늘 혼자이고 누구하고도 대화하지 않는다.
아톰의 유일한 친구는 로미오뿐이다. 로미오는 작가 부부와 동거하는 반려묘이다. 작가는 아톰에게 자신을 이입하며, 악을 물리치는 캐릭터와 버무려 복합적인 페르소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김호봉은 30여년전 한국에서는 추상, 미국에서는 풍경화를 거쳐 그리드(Grid)로 상징되는 뉴욕의 문명과 문화패권주의, 신이 통제하는듯한 자본에서 소외된 인간을 대비해 그렸다.
거대한 유통제국의 상징인 아마존 카본 판지에 인간 상실을 그려넣은 것은, 영국 작가 뱅크시(Banksy)가 전장 한가운데 뛰어들어 파괴된 담벼락에 스텐실(모양을 오려낸 구멍에 물감으로 찍어내는 표현)로 평화를 기원한 벽화 작업과 다를바 없다.
김호봉 작가는 아트씨(Artsy), 사치(Saatchi), 싱굴아트(Singulart) 같은 온라인 마켓플레이스·플랫폼에 작품이 등록되며 판매·전시 정보를 통해 컬렉터 및 관객들에게 노출되는 경로가 활발하다. 2026년 4월 서울 인사동 무우수 갤러리에서 개인전이 예정되어 있다.
심정택은 2009년 상업 갤러리(화랑) 경영을 시작한 뒤 지금까지 국내외 45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했다. 그 이전 13년여간 삼성자동차 등에 근무하였고 9년여간 홍보대행사를 경영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기사, 2019년 4월부터 작가 및 작품론 중심의 미술 칼럼 270여편, 2019년~ 2023년, 건축 칼럼(필명: 효효) 160여편을 기고했다. 뉴스버스에는 2021년 창간부터 주1회 미술작가 평론을 게재해왔다. <이건희전, 2016년> 등 3권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