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서촌을 거닐며 만난 지혜의 곳간, 보안책방(보안여관)
[지혜의 숲을 찾아서⑨]
당신은 호텔식 뷔페를 좋아하는가? 아니면 어느 뒷골목 노포 식당의 설렁탕이나 손칼국수 한 그릇을 애정하는가?
저마다의 음식 취향은 다를 것이다.
TV의 다양한 맛집 기행 프로그램이 늘어나는 영향인지 모르겠으나 최근에는 MZ 세대들조차 을지로 뒷골목의 노포 식당이나 시장 골목의 맛집들을 찾아다닌다고 한다.
육해공의 산해진미가 그득한 뷔페식당에 들어서면 항상 망설인다. 무엇을 먹어야 할 것인지? 나름대로 전략을 세워 샐러드, 해산물로 시작하여 육류와 중식을 거쳐 한식으로 마무리를 한다. 하지만 뷔페식당을 나오면서는 내가 무엇을 먹었는지, 무엇이 맛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단순히 배가 부르다는 것 외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음식이 없다. 일반화하긴 그렇지만 대체로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책이나 예술 작품을 대할 때도 비슷하다. 교보문고 등 대형 서점에 들어가면 뷔페식당의 각종 산해진미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과 유사하게, 신간과 베스트셀러 서가의 책들로 가득한 서점 내부의 아우라에 아찔해진다. 책 속을 거닐며 이리저리 책을 뒤적이지만, 사려고 정한 책이 없을 때에는 책 한 권을 고르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이고도 정작 제대로 고르지 못해 헤매다 나오기도 한다.
우리나라 성인의 연간 종합 독서량은 3.9권이고 2023년 기준 성인 10명 중 6명은 1년에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고 하는 문체부의 통계를 보았다. 연령별로 보면 예상과 달리 20대의 독서율이 가장 높았고,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독서율은 떨어져 60대 이상은 20대 독서율 대비 1/4 수준이었다.
OECD 국가 중 한국의 독서율은 12위로 16위의 일본보다 높은 중위권에 속한다는 통계도 '북러버'의 한 사람인 내게는 크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 OECD 국가 중 '탑5'의 독서율 순위는 모두 북유럽 국가들이 차지한 걸 보면서 밤이 길고 추운 나라의 특성이 독서로 연결되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우리나라도 추워지고 밤이 길어지면 독서인구가 늘어날 것인가, 아니면 알코올 소비량과 동영상 서비스 시청이 늘어날까를 떠올려보면서 혼자 웃어봤다.
책을 점점 덜 읽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서점 수도 감소하고 있다. 전국 기준 2003년 3,589개의 서점이 2023년 2,484개로 20년 사이 30% 감소하였다고 한다(출처: 2024 한국서점편람). 독서인구도 서점도 줄고 있는 암울한 상황에서 한 가지 반가운 사실은 이곳저곳에 저마다의 특성을 지닌 독립서점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찌는 듯한 더위가 가고, 아침, 저녁 제법 서늘해지는 가을의 문턱에서 자연도 있고 예술도 있고 사람 냄새나는 독립서점이 있는 공간을 거닐고 싶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곳이 한 군데 있었다. 서울에서 책과 예술, 그리고 자연을 만날 수 있는 곳 중 하나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꼽을 수 있는 곳, 서촌이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와 경복궁 담벼락을 끼고 청와대 방향으로 걷다 보면, 경복궁 담벼락 맞은편 길가에 카페와 전시공간들이 늘어서 있다. 그곳 길가엔 '보안여관'이란 낡고 허름한 간판이 있는 오래된 건물이 있었는데, 갤러리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지 실제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그 오래된 보안여관 옆으로 보안서점과 카페가 같이 들어섰다는 얘기를 듣고 그곳으로 우선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도 그곳에 서 있는 보안여관엔 "1936년에 세워진 목조 여관이고 문학 동인지 <시인부락>이 만들어진 곳으로 한국 근대문학의 발상지이며, 2004년까지 실제 여관으로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머물렀던 생활문화유적"이란 안내글이 적혀 있다. 실제 서정주, 김동리, 김달진 등 문인들이 보안여관에 기거하며 동인지를 만들며 교류하던 사랑방 같은 공간이었음을 카페 1층에 전시된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그 옆으로 연하여 새로 세워진 신관은 4층 건물로, 1층 카페에는 도자기와 소품류를 전시하는 공간과 특정 주제 관련 책을 전시해놓고 있다. 이번 달의 주제가 제주도인지, 제주도 작가의 아트 오브제와 제주 관련 도서가 카페 한쪽의 전시 공간에 놓여 있었다.
카페 내부엔 경복궁 담벼락을 마주 보며 커피를 마시고 책을 보며 쉬어갈 수 있는 널찍한 데스크와 창가 쪽 개인 의자가 놓여 있었다. 역사적 공간을 새롭게 해석한 이 서점을 겸한 카페에서 옛 왕궁의 담벼락과 가로수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책을 볼 수 있는 서점을 겸한 카페 내부와 신관 건물과 오래된 보안여관 사이에 자리 잡은 카페의 외부 테라스는 사람과 사람을,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4차원의 공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독특한 시공간 속으로 잠시 빨려 들어온 것 같았다.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면 온전히 책이 전시되어 있는 독립서점이 나타난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경복궁 담벼락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는 두 개의 큰 통창이다. 이 통창을 통해 한 눈에 들어오는 경복궁 담벼락과 나무 가로수들, 그리고 파란 하늘이 나만의 비밀정원처럼 다가온다. 1층에서 보았던 세상과는 또 다른 3차원의 공간으로 들어온 느낌이다.
2층 서점 공간에는 '내가 사는 피부(The Skin I Love On)'란 전시를 알리는 대형 포스터의 주제와 연결된 책들이 공간 한편에 독립적으로 기획 전시되고 있었다. 이 서점만의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느낄 수 있는 전시 주제였고, 수준 높은 기획의 북 큐레이션이었다.
이 전시는 보안여관의 하반기 기획전시로, 전시 안내 브로셔를 통해 기획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의 표면인 '흙'을 중심으로 동시대 사회와의 상호작용을 살피며 흙을 생명과 시간의 층위가 축적된 지구의 '피부'로 바라보며 우리가 딛고 살아가는 그 피부에 어떤 감각과 태도로 응답해왔는지 살펴본다. 이번 전시는 방치하거나 훼손된 지구의 피부가 다시 인간에게 어떤 영향으로 되돌아오는지 다층적 관점에서 확인하고자 한다" (전시기획 안내-박승연: 보안1942 큐레이터)
전시 주제와 함께 독립 전시된 서가에서 <재난의 불평등>, <발밑의 혁명>, <기후위기 시대에 춤을 추어라> 등 평소 접하기 힘든 책들을 살펴보았다. 다소 무거운 주제의 책들과 함께 식물과 정원 관련 책등 부드럽게 접근할 수 있는 책들을 볼 수 있도록 전시됐다. 한 가지 주제하에 다양한 책들을 접할 수 있도록 하는 훌륭한 북 큐레이션이라 생각됐다.
2층 서점의 신관과 구 보안여관을 연결하는 '브리지'를 지나면 기획 전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 나타난다. 90년 가까이 된 구 보안여관의 목조 뼈대가 그대로 드러난 옛 공간이 전시 작품과 어우러져 힙하면서도 강렬한 느낌을 준다. 특히 오래된 목조 뼈대가 앙상히 드러난 전시공간은 전시 주제인 <내가 사는 피부>에서 드러내고자 했던 인간의 욕망과 그로 인해 지구의 피부인 땅의 황폐화를 현실감 있게 드러내고 있는 듯 했다.
이 주제의 전시는 지하 1층과 2층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넓은 지하공간에 배치된 아트 오브제와 영상을 통해 지하 2층에서 2층까지 전시회의 주제가 하나로 연결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1층 카페 공간에 마련된 제주도 땅과 제주도 삶 관련 책 전시 역시도 결국은 제주도라는 토속적이고 독특한 한국 땅과 연결돼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독립서점과 전시공간을 함께 아우르고 있는 보안서점과 보안여관만이 생성할 수 있는 주제의 전시와 책을 연결한 훌륭한 큐레이션의 완결을 본 듯했다. 3층과 4층은 보안여관 본래의 정체성을 담은 '보안스테이'로 운영되고 있었다.
보안여관이 가진 문학 유산과 쉼의 공간이라는 본래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치열한 주제의식과 세련된 감각이 어우러져 있었다. 현대화한 대규모 복합문화공간은 흉내 낼 수 없는 귀한 지혜의 곳간을 서촌 나들이를 통해 알게 된 건 이 가을의 선물처럼 느껴졌다.
서촌으로 발걸음을 내디뎌 경복궁 담벼락 길을 걷고 보안서점에 들러 책을 한 권 사서 경복궁 담벼락이 다가오듯 보이는 2층 서점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 가을을 우아하게 맞이해 보지 않겠는가?
고규영은 글로벌 마케팅전략 컨설턴트다. LG전자, LG필립스-디스플레이, LG디스플레이에서 마케팅 임원으로 일했다. 지난 30년간 B2B와 B2C 시장을 아우르며 시장, 고객, 회사의 마케팅 전략 수립과, 글로벌 영화사, 유명아티스트, 메가인플루언서, 글로벌 유통 등과의 마케팅 협업을 해왔다. 기업 퇴임후엔 전문직 공무원으로 봉직하며 기업 홍보경험을 정부기관에 접목하는 시도를 했다. 현재는 기업 및 공공기관 대상으로 마케팅과 AI 관련 강의를 하며, 뉴스버스 객원기자로도 활동 하고 있다. 공저로 <인생후반전, AI와 동행> <AI와 함께한 두 번째 인생노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