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혁의 별의 순간은 보수세력의 '다키스트 아워'
이회창의 대구행과 장동혁의 대구행
“대구 부산엔 추석이 없다.”
지금부터 정확히 사반세기 전인 2000년 9월 9일, 동아일보는 한국 언론사에 두고두고 부끄러운 흑역사로 남을 위와 같은 기사 제목을 태연하게 선보였다. 언뜻 읽으면 김영삼 정부 말기에 발생한 외환위기 사태의 충격에서 여전히 헤어나지 못한 민생경제의 어려움을 걱정하는 듯한 보도였다. 그렇지만 해당 기사의 실제 노림수는 언론개혁에 나선 김대중 정부에 대항해 영남 주민들의 지역감정을 노골적으로 자극하는 데 있었음은 물론이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국가 부도 직전 단계까지 내몰린 탓에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아래 놓여 있던 대한민국 경제를 미증유의 빠른 속도로 회복시키고 있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은 1999년에는 11.6%, 이듬해인 2000년에는 9.2%의 성장률을 각각 기록했다. 만약 동아일보가 신속한 회복세의 그늘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소외된 동네들을 진심으로 조명하길 바랐다면 굳이 대구와 부산을 콕 집어 찾을 필요는 없었다. 명절 경기가 사라진 서민들은 그즈음 서울 시내를 비롯한 전국 곳곳에 골고루 분포한 까닭에서였다.
수구 언론과 보수 야당에게 사실과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좌파 정권 때문에 영남이 억울하게 핍박당하고 있다”는 선동적 프레임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만들어 퍼뜨릴 수만 있다면 충분한 터였다.
기득권 종이신문과 거대 야당은 손발이 척척 맞아들어가는 분위기였다. 대구와 부산에는 추석이 없다는 식의 악의적 보도가 나간 지 딱 20일 만인 2000년 9월 29일에 한나라당이 이회창 총재 주도로 대구에서 대규모 장외집회를 개최했기 때문이다. 그해 9월에 들어서만 벌써 네 번째 여는 장외집회였다.
이 총재는 김 대통령이 여야 영수회담에 응하지 않는다는 점을 한나라당이 여의도 국회를 상습적으로 뛰쳐나가는 구실로 삼았다. 그런데 그는 대구에서 실력 행사를 벌였던 속내의 절반만 얘기했을 따름이다. 이 무렵 이회창은 두 번째 대통령 선거 출마를 부지런히 준비하고 있었다. 이회창의 대구행에는 당내의 잠재적 대선 경쟁자인 박근혜 의원의 텃밭에 일찌감치 알박기를 하려는 의도가 역력했다. 입으로는 김대중 정부를 규탄하면서 몸으로는 박근혜의 도전을 일찌감치 원천봉쇄하려는 전형적인 성동격서 전략이었던 셈이다.
이회창의 알박기 시도에 기분이 크게 상했던 모양인지 박근혜는 다음 해인 2002년 2월에 당내 민주주의가 실종됐다는 이유로 한나라당 탈당을 선언하고 말았다. 그는 같은 해 5월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가 11월에는 당을 해산하고 한나라당으로 복당해 이회창 후보 캠프의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 이후로 최고의 보수 정치인으로 평가돼온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장외 투쟁기를 잠깐 복기해봤다. 이회창의 장외 투쟁과 비교하니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의 장외 정치가 더더욱 초라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이회창은 DJ와의 만남이 여의치 않다는 핑계로 국회를 등지고 장외를 맴돌았다. 반면, 장동혁은 이재명 대통령이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장 대표와의 화해를 거의 강권하다시피 하며 여야 지도부의 오찬 자리를 선제적으로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버렸다. 여야 사이의 대화의 문을 야당이 먼저 꽁꽁 걸어 잠근 격이었다.
이회창의 장외 투쟁의 판은 조중동으로 불리는 기성 언론매체(Legacy Media)가 깔아줬다. 조중동은 선정적 기사는 남발했으되 돈벌이 목적에, 특히 당장의 현금 장사에 혈안이 되지는 않았다. 장동혁이 밀어붙인 장외집회의 몰이꾼 역할은 동영상 화면에 큼지막하게 자신의 계좌 번호를 걸어놓은 극우 유튜버들이 담당하고 있다.
조중동은 한나라당의 집권 가능성을 높이는 일에 나름 진지하게 열의를 기울였다. 극우 유튜버들은 국민의힘이 정권을 탈환하든 말든 여기에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저들에게는 이른바 슈킹, 곧 슈퍼챗이 최우선적 관심사이다. 선거 승리에는 흥미가 없는 자들을 정치적 동반자로 삼으면 그 말로가 얼마나 비참해지는지는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가 이미 생생하게 증명했다.
대구에서 장외집회를 열었으면 다음에는 부산으로 향하는 게 한국 유력 보수 정당의 전통적이고 통상적인 보법이었다. ‘윤 어게인’을 외치면서 윤석열 석방을 주장하고, ‘스탑 더 스틸(Stop The Steal)’을 소리치며 부정선거론을 신봉하는 현재의 국민의힘 주류는 동대구역 광장에서 외통수에 걸려든 형국이다. 부산으로 가자니 여론의 호응과 열기가 예전과 견주어 시원찮을 것 같고, 서울로 그냥 돌아오자니 영락없이 노잣돈 떨어진 초라한 한량 신세다. 명분도, 동력도 터무니없이 부족한 장외집회에 그저 극우 유튜버들 하나 믿고 덜커덕 뛰어든 자업자득의 후과일 테다.
이 전 총재는 아무리 급할지언정 청중 동원을 보수 기독교에 드러내놓고 의존하지는 않았다. 이회창 시절의 한나라당은 언론과는 유착했어도 특정 종교와 공공연히 결탁하지는 않았다. 1990년의 3당 합당 이래 보수의 아성으로 굳건히 버텨온 부산·경남 지역의 민심은 윤석열의 12·3 친위군사쿠데타를 계기로 확연히 변화하는 추세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밝혀지는 김건희의 파렴치한 국정농단과 매관매직 행각은 PK의 탈보수 흐름에 가속도를 붙였다.
장동혁과 그를 당대표로 옹립한 친윤 세력은 PK에서 잃은 것을 종교에서 만회하기로 단단히 결심한 성싶다. 동대구역 앞에 황급히 세워진 연단 위에 선 장동혁은 제도권 정당의 당수인지, 보수 개신교단의 선교사인지 헷갈릴 정도로 정치와 종교의 경계선을 무너뜨렸다. 윤석열이 정치에 군을 무도하게 개입시켰다면, 내란수괴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장동혁은 현실 정치의 공간에 종교를 무책임하게 끌어들이는 중이다.
이회창이 무리한 장외 투쟁을 고집하지 않았다면 그는 두 번째 대선에서 다른 결과를 얻었을지 모른다. 이 전 총재는 정권을 잡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으로 장외 투쟁 노선을 선택했다. 친윤들도, 극우 유튜버들도, 보수적 기독교인들도, 구치소 안의 윤석열과 김건희도 정권을 다시 잡겠다는 생각은 진즉에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각자 엇갈리는 욕망으로 장동혁에게 장외에서 몽니를 부릴 것을 요구해 마침내 관철시켰다.
대구로 내려간 장동혁은 그럼에도 마냥 행복한 표정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장동혁의 '별의 순간'인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동혁은 알지도 못하거니와 알고 싶지도 않으리라. 장동혁 개인의 별의 순간이 보수 전체에게는 바로 흑암의 시간(Darkest Hour)임을.
공희준은 “산업의 쌀이 반도체라면, 모든 콘텐츠의 쌀은 글”이라고 믿으며 정치평론과 인물비평을 중심으로 PC통신 시절부터 SNS 시대인 지금까지 글쓰기에 전념해왔다. '강남좌파', 먹고사니즘' 같은 21세기 한국사회의 시대상이 담긴 촌철살인의 신조어를 만들어낸 진짜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수만 평전> <지금은 강남시대> <보수의 종말> <퇴진하라> 등의 책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