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여름 수도, 잘츠부르크
모차르트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여름 궁전
명망 있는 유럽의 왕가는 그들이 거주하고 정사를 보는 왕궁 이외에 별도의 궁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정도는 돼야 왕가의 위신이 선다고 생각했는지 강국의 역사를 지닌 왕정 국가들은 그렇게 정궁 이외에 별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수도 안 정궁도 화려했고 수도 밖 별궁도 그에 못지않게 화려했습니다. 이러한 별궁은 통상 여름궁전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더운 여름을 피해 휴가 가듯이 가는 저 멀리 북쪽에 위치한 시원한 궁전은 아니었습니다. 마차를 통해 이동했던 시기였기에 거리의 한계가 있어서 그랬습니다. 휴식을 곁들인 별장이라는 개념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당시 정궁을 떠나 여름 궁전으로 이동하는 행렬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가장 화려한 왕의 마차를 따라 수백 대의 마차들이 줄지어 이동했을 테니까요. 왕의 가족들과 시종들, 그리고 만조백관들.. 때론 거의 수도가 이전하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화려한 궁전의 대명사인 베르사유 궁전은 프랑스 왕가의 여름 궁전으로 지어졌습니다. 파리의 정궁은 오늘날 박물관이 된 루브르 궁전과 튈르리 궁전이었습니다. 그리고 퐁텐블로 궁전도 여름 궁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독일은 동독 시절 공산주의자들에게 구시대의 유물로 찍혀 허물었다가 복원한 베를린성이 과거 왕이나 황제의 정궁이었습니다. 포츠담에 있는 상수시 궁전은 여름 궁전이었습니다. 영국 왕가의 현재 정궁은 런던의 버킹검 궁전입니다. 윈저성은 본래 여름 궁전이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위세를 떨친 오스트리아의 정궁은 비엔나에 있는 호프부르크 궁전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쇤부른 궁전도 시작은 여름 궁전이었습니다.
위의 여름 궁전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수도 근교에 있다는 것입니다. 마차로 이동해도 국정 처리와 신체 피로도에 크게 문제가 없는 거리입니다. 물론 지금은 교통의 발달로 아직도 왕가가 살아있는 영국의 경우 여름 궁전은 에든버러의 홀리루드 궁전이나 밸모럴성이 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과거 영국이 통일되기 전엔 스코틀랜드의 정궁과 여름 궁전이었던 곳들입니다. 19세기 대영제국 시절 윈저성에 거의 살다시피 했던 빅토리아 여왕은 산업혁명으로 말이 아닌 기차를 타고 그곳까지 이동했습니다. 윈저성은 지금은 영국 왕가의 주말 거주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세계 음악의 수도 비엔나
정궁이 위치한 수도는 한 나라의 중심지로 그 나라에서 가장 시선이 집중되는 곳입니다. 가장 앞서가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도 많이 살고 있고 외부인도 많이 몰리는 곳입니다. 이제 이 글의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동쪽에 있는 땅이라는 뜻의 오스트리아의 수도는 빈(Wien), 영어로는 비엔나(Vienna)입니다. 그 도시는 1200년대부터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700여년간 전 유럽을 호령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안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사라진 지금도 비엔나는 여전히 빛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합스부르크의 영화가 희미해져가는 어느 시점 칼과 창이 아닌 새로운 무기를 들고 나타난 사람들이 도시를 새롭게 리포지셔닝했기 때문입니다. 음악을 들고 나타난 음악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비엔나는 오스트리아를 넘어서 세계 음악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비엔나에 가면 1년 내내 음악회가 열립니다. 새해의 첫날부터 그 도시는 음악의 주도권을 쥐고 시작합니다. 매년 1월 1일 정오, 그 도시의 이름을 지닌 필하모닉은 전 세계에 새해를 여는 팡파르를 울립니다. 다른 도시들에서도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들이 신년음악회를 열지만 파괴력은 빈필에 못 미칩니다. 신년음악회의 대명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음악회는 그곳에 가지 않아도 전 세계인에게 전달됩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말입니다. 과거엔 녹화로 조금 늦게 공중파 TV를 통해서만 전달되었는데 미디어의 발달로 몇 년 전부터는 그들이 연주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메이저 영화관인 메가박스가 빈필의 신년음악회를 동시에 극장에서 상영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제가 관람한 빈필의 신년음악회는 메가박스 중 상영관이 가장 많은 서울 삼성동 코엑스의 8개관이 그 음악회를 상영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비엔나에서 시내나 관광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음악회 티켓을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전통 궁정 음악가의 복장에 가발을 쓴 판매상들이 눈에 잘 띄는 관광지는 물론 도심의 거리나 호텔, 상점에서 티켓을 팔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날 밤 도시 어딘가에서는 반드시 음악회가 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비엔나는 음악에 대한 접근성이 뛰어난 도시입니다. 제가 사원 시절인 1995년 배낭여행으로 갔던 비엔나에서의 그런 모습은 정확히 30년 후인 지난 7월 말에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차이점은 그땐 쇤부른 궁전 앞에서 즉석 구매한 티켓으로 음악회를 관람했지만 이번엔 티켓을 미리 구매해서 갔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최고 영웅 모차르트
비엔나를 세계 음악의 수도로 만든 1등 공신은 누가 뭐래도 그 이름도 찬란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일 것입니다. 비록 그의 생애가 35년에 그쳤지만 그는 비엔나뿐만이 아닌 오스트리아를 빛낸 최고의 영웅이라고 생각됩니다. 700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사람들보다 그 1인의 역할이 더 컸다는 것입니다. 음악의 성인이라고까지 불리는 베토벤이 옮겨 와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죽었고, 하이든, 슈베르트, 브람스, 브루크너, 말러, 요한 슈트라우스 부자 등 많은 음악가들이 그들 조국의 수도인 비엔나에서 활동하며 숱한 이야기를 남겼지만 모차르트엔 못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모차르트가 음악적으로 많은 일을 이루기도 했지만 음악을 떠나서도 인간적으로 당기는 스타성이 있어서 그럴 그럴 것입니다. 유쾌함과 짠함이 공존하는 그의 매력입니다.
35년의 생애, 단명한 모차르트였지만 그는 3세 때부터 쳄발로를 연주하고, 5세 때부터 작곡을 하고, 6세 때부터 전 유럽을 무대로 연주 여행을 떠났습니다. 업력으로 보면 30년을 넘으니 그의 음악 인생이 그렇게 짧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아주 어린 아이돌이 성인 무대까지 성공을 이어간 것입니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서 간 그 여행엔 위의 쇤부른 궁전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앞에서 한 연주도 포함됩니다.
어린 모차르트가 훗날 비운의 왕녀가 된 마리 앙투와네트를 만난 날입니다. 모차르트는 오페라와 교향곡을 비롯해 각종 장르에서 600곡이 넘는 곡을 작곡했습니다. 달래 음악의 신동이고 천재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유명세엔 최근 리마스터링하여 재개봉한 영화 <아마데우스>도 한몫하고 있을 것입니다. 베토벤을 소재로 한 영화로는 <불멸의 연인>과 <카핑 베토벤>이 유명하지만 두 영화를 합쳐도 <아마데우스>의 인기도를 넘지는 못할 것입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2025
그렇게 비엔나를 띄운 모차르트였지만 모차르트 하면 먼저 떠오르는 도시는 잘츠부르크입니다. 잘츠부르크(Salzburg)는 과거 로마시대 때 귀중한 자원이었던 소금에서 유래된 도시이지만 소금이 흔해진 요즘 그 도시는 엄연한 모차르트의 도시로 바뀌었습니다. 그가 태어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잘츠부르크는 한여름인 지금 축제가 한창입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1920년도에 시작되었으니 무려 100년이 넘는 축제입니다. 매년 오스트리아의 극작가인 호프만 스탈의 연극 <예더만(Jedermann)>이 개막작으로 축제의 시작을 알리지만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누가 뭐래도 '음악 축제'입니다. 거기에 한 단어를 더 보태면 '여름 음악 축제'입니다. 또 거기에 두 단어를 더 보태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지구촌 최대의 여름 음악 축제'입니다.
올해 2025년은 7월 19일부터 8월 31일까지 44일 동안 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 기간 거의 매일 낮밤, 아침점심저녁으로 오페라와 심포니를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음악회가 잘츠부르크의 음악당들을 밝힙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온 관객들은 그곳 좌석들을 빼곡히 채우고 있습니다. 15만명이 사는 도시에 25만명의 외지인이 몰려오니 잘츠부르크가 누리는 경제효과는 대단합니다. 축제 기간만 2억 유로 가까운 수입을 올리고 있다고 하니까요. 잘츠부르크시가 연간 방문 관광객을 900만명 정도로 발표하는 것을 보면 이 숫자는 일반 관광객을 제외한 순수 음악제 관련 통계로 보입니다. 티켓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대단한 열기이고 인기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8월 초 방문했던 잘츠부르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한여름 피서지가 아님에도 도시를 가로지르는 잘자흐강을 사이에 두고 전 세계에서 온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어딜 가든 붐볐습니다. 그 전날까지 제가 머물렀던 수도 비엔나보다 훨씬 높은 인구 밀집도였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축제의 시기에 맞춰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습니다. 아름답고 유서 깊은 중세 도시 잘츠부르크에 잘 어울리는 복장입니다. 그렇게 한껏 멋을 낸 아름답고 멋진 레이디스 앤 젠틀맨, 그들은 그날 저녁 열리는 축제의 메인 프로그램인 오페라나 심포니를 관람할 것입니다.
모차르트의 고향 후배 카라얀
모차르트 효과입니다. 만약 잘츠부르크가 모차르트의 고향이 아니었다면 이곳 음악 축제가 이렇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요? 유서 깊은 그 도시엔 나름대로의 역사가 있고, 불멸의 명작인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 된 미라벨 정원도 있으며, 20세기 최고의 마에스트로인 베를린 필하모닉의 카라얀 생가도 있지만 방문객들은 그것들 보다는 도시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모차르트를 보러 올 것입니다. 특히 그가 태어난 게트라이데 거리 노란 건물의 2층에 위치한 생가는 제가 처음 갔던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줄을 서고 그룹별로 끊어서 입장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습니다. 1층엔 과거 초콜릿 가게가 있었는데 지금은 편의점으로 바뀌었습니다. 초콜릿 가게가 더 어울려 보입니다.
그래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세계 정상의 음악 축제로 만든 데엔 모차르트 다음으로 그의 고향 음악 후배인 카라얀의 공이 크다고 할 것입니다. 그는 분신과도 같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대권을 잡은 1954년부터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예술감독으로 관여하며 그 축제를 키웠습니다. 카라얀의 생가는 잘자흐강을 사이에 두고 모차르트의 생가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35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니 도보로 5분이면 도달하는 거리입니다. 그리고 현재 모차르트 박물관이 된 훗날 모차르트가 돌아와 살았던 집은 더 가까워 불과 15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 집은 카라얀이 강을 건널 필요도 없던 곳입니다. 그렇게 카라얀은 생전에 모차르트의 두 집을 숱하게 통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음악에 대한 꿈을 키웠을 것입니다. 그는 미라벨 정원에 붙어있는 모차르테움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치며 수학했습니다. 그렇게 모차르트의 키즈였던 카라얀은 어른이 되어 금의환향하여 모차르트 이후 잘츠부르크를 빛낸 최고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잘츠부르크에 온 슈베르트
8월 1일 저녁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메인디쉬는 스페인 출신인 조르디 사발이 지휘하는 슈베르트의 교향곡이었습니다. 그는 <미완성>과 <그레이트> 교향곡을 지휘했는데 공연 전 펼쳐 본 프로그램 북엔 <미완성>은 7번으로, <그레이트>는 8번으로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우리에겐 통상 8번과 9번으로 알려진 곡들인데 하나씩 넘버가 앞당겨진 것입니다. 음악에 문외한인 저는 사실 그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미완성> 교향곡의 경우 7번과 8번으로 혼용해서 부르는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연주된 장소가 원작자인 슈베르트의 조국이니 그 표기엔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지팡이를 짚고 무대에 입장하고, 느릿하게 걸어서 포디엄에 올라선 1941년생의 조르디 사발은 과연 그의 업력에 맞게 유장하고도 노련하게 그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나갔습니다. 백발이 성성해 학춤처럼 보이기도 한 그의 지휘는 마치 그를 그리스 신화 속의 인물처럼 보이게도 했습니다. 숙성된 마에스트로의 아우라일 것입니다. 어쩌면 그가 이끄는 악단인 르 콘세르 드 나시옹(Le Concert des Nations)이 현대 악기가 아닌 바로크 시대의 원전악기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이기에 더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악기들이 내는 소리는 현재의 오케스트라 악기와 전혀 차이점을 못 느끼게 했습니다. 이 또한 제가 음악의 문외한이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조르디 사발과 그의 악단은 국내에도 여러 번 방한을 했습니다.
인터미션을 사이에 두고 연주된 두 개의 교향곡, 연주가 끝나고 음악당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열렬하게 박수와 환호를 보냈습니다. 만약 슈베르트가 살아서 그날 밤 잘츠부르크의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는 매우 기뻐하고 감읍했을 것입니다. 1822년 작곡한 <미완성> 교향곡은 그가 죽고 43년 후인 1865년에나 초연이 되었으니까요. 비엔나 뒷골목을 헤매며 모차르트보다도 4년이나 짧은 31세에 죽은 슈베르트는 미술의 고흐만큼이나 어렵고 불행하게 살다 간 음악가였습니다. 헝클어진 머리에 나쁜 시력, 피아노 살 돈도 없어서 기타로 오페라를 작곡할 정도로 그의 삶은 엉망이었습니다. 그의 사망 7년 후 낭만주의의 대가 슈만은 사람들이 슈베르트의 이름조차 모르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그의 천재성에 대한 많은 아티클들이 나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럴 날이 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슈베르트는 그렇게 미완성인 채로 죽었고 훗날 완성이 되었습니다.
음악의 여름 수도 잘츠부르크
모차르트 음악당에서 펼쳐진 슈베르트의 음악회를 끝나고 나오니 붙어있는 대축제 음악당에서도 관객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들은 1시간 먼저 시작된 오페라를 보고 나온 관객들이었습니다. 그날 공연된 또 하나의 메인디쉬인 오페라는 도니제티의 <마리아 스투아르다>였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비운의 여왕인 스튜어트 왕가의 퀸 오브 메리를 소재로 한 오페라입니다. 그렇게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하룻밤은 저물어 갔습니다. 찬란한 밤이었습니다. 다음 날이 밝으면 또 새로운 레퍼토리의 음악들이 그날처럼 도시의 음악당들을 밝힐 것입니다. 저는 거쳐가는 객이기에 그 다음 날 새로운 도시를 향해 떠나야 했습니다.
만약에 각 나라에 여름 수도가 따로 있다면 오스트리아의 여름 수도는 잘츠부르크가 될 것입니다. 그보다 큰 도시인 그라츠와 인스부르크가 있지만 그들을 제치고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보듯이 지금 잘츠부르크는 이미 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7~8월 한여름 오스트리아는 물론 세계는 비엔나보다 잘츠부르크를 더 주목하니까요. 그리고 오스트리아 음악의 심장과도 같은 빈필도 그 축제에 단골로 참가를 하니까요. 겨울에 비엔나에서 신년음악회를 하듯이 여름엔 잘츠부르크에 와서 축제의 음악회를 여는 것입니다. 제가 잘츠부르크를 방문했던 날엔 빈필의 음악회가 편성되지 않아 못 본 것이었습니다. 모차르트는 그렇게 잘츠부르크에 큰 축복을 내리고 선물을 주었습니다. 다이아몬드보다도 더 빛나는 최고의 소금 모차르트입니다.
하광용은 대학 졸업 후 오리콤, 이노션 등에서 광고인 한 길로만 가다가 50세가 넘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세상사 이때 저때, 이곳 저곳, 이것 저것, 이사람 저사람에 대한 인문학적 관심이 많다. 박학다식한 사람은 깊이가 약하다는 편견에 저항한다. 그래서 그는 르네상스적 인간을 존경하고 지향한다. 박학과 광고는 어찌보면 ‘넓다’라는 측면에서 동일성을 지닌다. 뉴스버스 연재 에세이를 추려 이라는 인문교양 에세이집을 출간한 그는 태평양인문학교실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아래는 하 작가의 책 '테이크아웃 유럽예술문화', '테이크아웃 유럽역사문명', '테이크아웃 일본근대백년' 소개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