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숲 속에서 만난 오아시스, 강동숲속도서관

[지혜의 숲을 찾아 ③]

2025-08-15     고규영 마케팅전략 컨설턴트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곳을 직접 내발로 걸어 볼 수 있을까? 비행기, 기차, 자동차로 빠르게 멀리 갈 수 있지만 멀리 빨리 간다고 모두 여행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15일간 서유럽 7개국 일주'.  가끔 광고로 올라오는 패키지여행 상품을 볼 때면 정신이 아찔해진다. 15일간 7개국 일주라면 이틀에 하나의 국가를 여행한다는 것인데, 나에겐 불가능한 얘기다.

얼마 전 치앙마이의 올드시티라는 곳에서 일주일간 매일 걸으며 골목길을 다녔다. 그러고도 그 올드시티 한 동네의 반도 못 본 것 같다. 언어, 시간, 나이 등 여러 가지 제약으로 불가피하게 짧은 시간 많은 곳을 돌아보아야 하는 경우를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나 '무엇을 봤다'의 관광이 아닌 '무엇을 느꼈는가'의 여행, 내 발로 그 땅을 밟는 그 여행을 나는 '여행'이라 이름한다.

서울에서 나서 자라고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였지만 서울도 내 발로 걸어 보지 못한 곳이 너무나 많다.

해외에서 오랜 기간 주재원 생활을 할 때는 그 곳의 여기저기를 참 많이도 걸어 다녔다. 아직도 그곳 골목골목마다의 기억과 추억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어느 언덕길의 커피집에서 진한 레드 컬러의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던 기억, 시장 골목 안 허름한 식당에서 먹던 국수의 맛, 하이킹을 하며 산의 양옆으로 펼쳐진 바다의 모습 등등 내 발로 걸어 본 곳에 대한 진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강동숲속도서관. (출처=강동숲속도서관 홈페이지)

해외 주재후 한국에 돌아와 다른 곳은 고사하고 내가 자란 서울도 알지 못한다는 반성을 하였다. 북한산 둘레길을 시작으로 서울 땅 밟기가 시작됐다. 내가 몰랐던 서울의 보석 같은 숲속 길을 걸으며 서울의 아름다움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어떤 날은 집 앞의 아무 버스나 타고 그 버스의 종점에 내려 그 길을 걸어 보기도 했다. 그런 서울 땅 밟기를 하면서 숲속이나 처음 걷는 곳의 동네를 거닐다 보물 같은 도서관을 만나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인왕산을 머리에 이고 있는 청운문학도서관이었고 인왕산 숲속쉼터 도서관이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나만의 보물을 찾고 수집해 나갔다.

새로운 사냥감을 찾아 나서는 짐승처럼 새로운 공간, 특히 도서관과 갤러리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편이다. 지난주 새로운 사냥감으로 점찍어 두고 사냥할 기회만 엿보던 한 곳으로 사냥을 나섰다. '강동숲속도서관'이다.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강동구로 향했다. 강동구는 서울이 고향인 내게도 낯선 곳이다. 그곳에 가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강원도나 경기도 양평등을 다녀오다 도로에서 보며 지나는 동네 중 하나였을 뿐인 곳이다. 9호선 종착역인 중앙보훈병원역에서 내려 도서관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버스 정류장에 섰다.

버스 정류장 뒤로도 숲이 있었고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많은 숲으로 둘러싸인 강동지역을 돌아볼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도보 5분도 안되는 거리에 강동숲속도서관이 눈에 들어왔다. 아파트 단지 옆에 바로 붙어있어 아파트 커뮤니티 시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도서관에 들어섰다.

1층의 우주 태양계가 천장에 달려 있고 우주선 방등 아이들이 좋아 할 공간을 지나 계단을 타고 2층 종합자료실을 지나 3층으로 올라갔다. 그린의 잔디와 같은 카펫이 깔려 있고 기대하지 못했던 높은 천장과 2~3층 높이의 한쪽 벽 전체를 다양한 책표지와 책등이 조화를 이룬 거대한 책장이 시선을 압도했다.

강동숲속도서관 내부. (사진=고규영)

규모와 스케일, 그리고 통유리로 둘러선 유려한 내부 공간 디자인은 한국에서 보기 드문 도서관의 모습이다.

도서관 안쪽으로 들어서자 종류별로 책들이 큐레이션 되어 있는 책상이 놓여 있고 그 옆으로 여러 사람이 공용으로 쓰는 책상 등이 놓여 있었다. 디지털 열람실이 아닌데도 책상마다 충전할 수 있는 충전시설도 갖춰져 있었다.

1층의 어린아이와 유아를 위한 책과 놀이 공간, 2층의 종합자료실과 어린이 영어자료실, 3층의 성인용 책과 힐링을 위한 다양한 공간, 청소년 전용 공간 등 대상과 목적에 맞는 공간의 배치와 구성으로 다양한 연령층이 와서도 각자의 공간에서 머물고 누릴 수 있는 스마트한 공간 설계가 돋보인다.

3층 정중앙의 공간 안으로 들어오면 창가 쪽으로 기막힌 힐링의 공간이 펼쳐진다.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는 통창으로 숲의 전경이 눈으로 마음으로 들어온다. 그 창가 쪽에는 유리창을 통해 숲이 보이는 방향으로 몸을 비스듬히 기댈 수 있는 의자들이 놓여 있다.

'얼마나 빨리 오기에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하는 부러움의 시선으로 그 의자의 뒤편에 서서 유리 통창을 통해 숲을 바라봤다. 

때마침 도서관의 신이 도서관을 보석처럼 여기는 도서관 수도자가 온 줄 아는 양 내가 서서 바라보고 있는 앞의 의자에서 어른 한 분이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신다. 'Thanks God!'

서서 보는 경치와 느긋이 앉아서 숲을 바라보는 경치는 하늘과 땅 차이의 정도는 아니지만 기대하지도 않은 어떤 경품에 당첨된 기분이랄까. 유리 통창을 통하여 바람에 일렁이는 나무들이 움직이는 숲이 들어온다. 숲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옆으로 뒤돌아 보는 도서관 공간은 아트 갤러리 같다. 과하지 않으면서, 세련되고 절제되어 있는 디자인의 따듯한 공간이 숲과 더불어 이 도서관의 격을 얘기하는 듯했다.

강동숲속도서관. (사진=고규영)

작년 말 전남 광주의 아시아문화전당을 방문하고 그곳 건축 디자인과 공간, 전시, 도서관을 둘러보며 그곳 근처에 숙소를 구해서 몇 달간 살아보고 싶은 충동이 있었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 대한 어떤 평론가의 "그 깊은 상처의 아가리를 감히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아 소설을 끝내 다 읽지 못했다"라는 고백의 말처럼 광주는 내게 5.18의 진한 아픔의 공간으로 만 기억됐다. 그런데 아시아 문화전당이라는 공공 문화공간은 '여기 광주에 살고 싶다'고 느끼게 할 만큼의 내게 힐링과 매력의 공간으로 다가왔다.

이 강동 숲속 도서관에 와서 비슷한 생각을 하였다. 건축과 공간과 그 안의 콘텐츠가 주는 매력의 힘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건축가 유현준 교수는  <어디서 살 것인가>에서 건축과 삶의 관계에 대한 통찰을 얘기한다. “건축물의 진정한 의미는 건축물이 사람과 맺는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 건축물과 그 안의 공간은 단순히 물리적 구조가 아니라, 그 안에 머무는 사람들의 삶·감정·관계와 얽혀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는 깨달음을 준다고 했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얘기다.

어린 시절 서울에서 자랐지만 내가 자란 서울의 집은 마당이 있는 집이었다. 정원이 있는 고급 주택이 아닌 진짜 시골 마당과 같은 공간이었다. 집에서 모시고 살던 할머니의 부지런함으로 우리 집 마당에는 봄과 가을에 꽃이 지천으로 피었고, 사루비아 꽃에서 꿀을 빨아먹을 수도 있는 '서울 촌놈[같이 자랐다. 집 문 앞에도 흙으로 된 마당이 있어서 동네 아이들과 비석치기, 구슬놀이, 딱지치기 놀이를 하던 유년의 추억이 가득하다.

그 집의 공간은 추석이나 설 명절에는 일주일 내내 친척들이 오가며 숙식을 해결하는 시골 먼 고향과 같은 역할을 했다. 사람들과의 만남과 놀이의 공간, 고향과 같은 역할을 하던 그곳은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런 공간을 많이 잃어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공공건축과 공간이 주는 의미는 크다고 생각한다.

집이 더 이상 사람들과의 만남의 공간으로서 역할을 상실한 상황에서 도서관, 박물관, 갤러리 등 공공건축과 공간들은 그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할 것이다. 사람들이 만나고 교류하고 소통하는 장터의 공간이자 힐링의 공간으로서의 과거 집의 역할을 대체할 뿐만 아니라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덴마크의 도시 설계학자인 얀겔(Jan Gehl)은 좋은 공간의 의미를 사람들과의 만남, 연결로 설명한다. “문화와 기후는 전 세계적으로 다르지만, 사람은 같다.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좋은 공간만 있다면, 그곳에 모일 것이다.” 겔은 물리적 환경이 사람들을 연결하는 핵심임을 강조하며, 좋은 공공장소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공동체 형성이 가능하다는 통찰을 전하고 있다. 비전문가인 나의 생각과 겔의 생각은 일맥상통한다.

어느 공간 하나만으로도, 그곳이 빛나고 그곳에 살고 싶어지는 공간과 건축물. 그런 곳 중 하나가 이 “강동숲속도서관”이라 할 수 있다. 깊은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고도 버스에 내려 쉽게 다가갈 수 있고, 아파트 마당을 가로질러 갈 수 있는 콘크리트 도심 속의 오아시스. 그곳이 “강동숲속도서관”이 아닌가 한다.

아직 끝나지 않은 여름의 끝자락에서 아트 갤러리 같은 공간과 그 안의 보석 같은 책이 주는 힐링과 쉼이 있는 오아시스로의 땅밟기를 떠나 보는 건 어떨까?
 

고규영은 글로벌 마케팅전략 컨설턴트다. LG전자, LG필립스-디스플레이, LG디스플레이에서 마케팅 임원으로 일했다. 지난 30년간 B2B와 B2C 시장을 아우르며 시장, 고객, 회사의 마케팅 전략 수립과, 글로벌 영화사, 유명아티스트, 메가인플루언서, 글로벌 유통 등과의 마케팅 협업을 해왔다. 기업 퇴임후엔 전문직 공무원으로 봉직하며 기업 홍보경험을 정부기관에 접목하는 시도를 했다. 현재는 기업 및 공공기관 대상으로 마케팅과 AI 관련 강의를 하며, 뉴스버스 객원기자로도 활동 하고 있다. 공저로 <인생후반전, AI와 동행>  <AI와 함께한 두 번째 인생노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