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서 집어든 두 권의 책...'책이 내 마음을 읽더라'

[지혜의 숲을 찾아②- 오동숲속도서관편]

2025-08-09     김희연 기업전략 컨설턴트

1주전 동료 고규영 작가가 오동숲속도서관에서 AI 시대 인간의 길을 성찰했다면, 나는 그 곳에서 전혀 다른 것을 발견했다. 같은 숲을 바라봐도 사람마다 다른 나무를 보게 되고, 같은 책장을 둘러봐도 각자 다른 책에 손이 간다. 같은 곳을 다녀와서 각자의 글을 따로 올리는 것도  그 다름 자체가 또 다른 배움을 만드는 지혜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AI가 모든 지식을 품고 있다는 세상에서, AI에게 묻고, 인터넷을 검색하고, 전자책을 읽을 수도 있다. 그런데 굳이 걷고 헤매면서 발품을 팔아 도서관과 독특한 책방을 찾아 다녀보기로 했다. 그 곳은 도서관도, 책방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일 수도 있다. 어디든 좋다. 발품이 손품보다 어떤 마음을 주는지, 몸과 함께 투자한 그 시간이 시간 낭비나 비효율이 아니라 어떤 진한 교훈과 경험을 주는지, 아니면 흔한 기억의 하나가 될지. 우리는 걸으며 책을 찾기로 했다.

첫 장소는 오동숲속도서관이었다. 후보지가 여러 곳 있었지만, 일전에 다녀온 일본 마츠야마의 도고온천(‘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그 온천의 실제 모델)과 꼭 닮은 사진 속 자태가 나를 이끌었다. 뭔가 사연이 있을 듯한, 숲속에 있어 더욱 신비한 느낌의, 닮은 듯 다른 그 귀한 모습에 마음이 갔다. 가는 길에 상상했다. ‘오동나무로 지은 도서관일까?’ ‘오동나무 숲속에 있는 걸까?’ 동백나무는 익숙한데, 오동나무는 어떤 나무였더라.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품고 걸었다. 하지만 도착해서 알게 된 건, 오동나무와는 무관하고 ‘다섯 동네가 접한 곳’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란다. 어긋난 예상이 오히려 반가웠다. 무지를 깨닫는 일은 지혜로 이어지는 문이 되기도 하니까.

도서관이라는 이름에 숨은 철학

도서관에 들어와 젖은 몸을 식히며 커피 한 잔을 하며 문득 생각했다. ‘도서관’이란 한자는 어떤 의미일까? 왜 ‘책관’이 아니라 ‘도서관’일까?

圖書館(도서관)을 찬찬히 뜯어보니 이렇다. 圖(도)는 사유의 지도, 지식의 윤곽과 핵심 구조를 그리는 행위다. 書(서)는 붓으로 남긴 인간의 기억이다. 館(관)은 함께 지혜의 양식을 나누는 공공의 집이란 의미다. 그러니 도서관이란, 사유의 지도를 그리며 빛 아래 기록된 이야기를 나누는 지혜의 밥상인 셈이다.

영어 라이브러리(Library)는 ’나무껍질(bark)’에서 시작되었다. 책은 나무에서 왔고, 도서관은 결국 지혜의 숲이다. 중국어로는 고어에 ‘藏書樓(장서루·책을 감춘 누각)라 하니, 마치 숨겨둔 보물창고처럼 귀중한 것이리라. 스페인어 Biblioteca는 ‘책을 담는 그릇’에서 왔고, 일본어 'としょかん'도 한국과 뜻이 같다.

도서관은 언어마다 다르게 불리지만, 모두 지혜의 숲이자 기억의 창고이며 마음의 양식이라는 본질은 같다. 책은 종이에 쓰여 있지만, 그 이전엔 팔만대장경처럼 나무에도 새겼듯이 기록에 대한 인간의 집념, 지식을 보존하려는 간절한 의지가 책을 만들고 도서관을 만들었을 것 같다.

내가 고른 책들이 건네는 질문

수 많은 책 중에서 무심히 두 권의 책을 골랐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와 강명관의 <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종묘편을 먼저 펼쳤다. 그런데 읽다보니 이 책들은 무심코가 아니라 내 무의식이 골라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마 지난해 퇴임 후 지난 30년간 어떤 나만의 유산을 남겼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유산을 만들어야 할까 하는 고민을 포함해서. 그런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도 모르는 생각을 내 마음이 드러낸 것 같다. 거대한 유산이 아닌, 내 인생의 족적 같은 무언가를 찾고 싶다는. 그래서 여러 편 중에서도 유독 종묘편을 골라 읽었나 보다. 조선의 왕들은 종묘를 바라보며 자신들만의 유산을 고민했겠지? 그런 고민이 꼭 왕들만의 것일까? 나에게도 같은 질문이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서양에서 들어온 문물 중 하나가 안경이다. 그것으로 눈이 트이고 희미한 것을 다시 보게 해주는 것. 아마 나는 앞으로 펼쳐질 나의 인생 2막에 있어서 내 눈을 밝게 해줄 무언가를 찾고 싶은 것이었으리라. 내가 선택한 책들과 꽂힌 단어들 속에 아마도 그런 의미들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내가 고른 책 두 권이 무의식중에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심지어 나도 몰랐던 내 생각을 책 제목들이 드러나게 해주었다. 왜 내가 이걸 골랐을까 생각하는 사이에 나는 또 다른 나를 만났다. 나를 알아가는 이 과정, 이렇게 한 발 내딛어가는 이 과정. 이 과정이 지식이 아니라 지혜의 길이 아니고 또 무엇이랴. 

드디어 AI가 할 수 없는 것 하나를 찾았다. 내 눈에 보이는 이 수많은 활자들이 나에게 꽂혀 나에게 새로운 의미를 주는 경험. 책을 읽지 않고도, 도서관에 와서 내가 나를 알아가는 이 경험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도서관은 그 자체로도 내게 의미가 있었다.

예전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남자 주인공 주원이 여주인공 길라임을 생각하며 책장 속 시집을 무심히 보고 있는 장면이 있었다. 꽂힌 시집들의 제목이 말을 하는 것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 “가슴 속을 누가 걸어가고 있다”,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너는 잘못 날아왔다”

‘너는 잘못 날아왔다.’ 마지막 시집의 제목 한줄이 남자 주인공이 그녀에게 얼마나 빠졌는지 드러났던 그 장면이 참 인상적이었다. 꼭 책을 다 읽어야만 의미가 있을까? 나도 드라마 주인공처럼 표지만으로도 내 마음을 알아채는 그런 우연을 맞이했다.

지식은 검색으로 얻을 수 있지만, 지혜는 발품을 팔고 시간을 보내며 나를 만나고 마음을 열어야 만날 수 있다. 오동숲속도서관에서 보낸 몇 시간이 그랬다. 길을 잃고, 생각에 잠기고, 우연히 마음을 읽어주는 책과 마주치는 일. 그 모든 과정이 지혜의 숲을 거니는 일이었다. 비효율적이라 여겨질 수 있는 이 모든 과정이, 사실은 가장 인간다운 배움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나는 생각사(思)란 한자를 좋아한다. 생각은 田(밭전)과 心(마음심)으로 되어 있다. 오늘 내 마음의 밭에 오동숲속도서관이 씨를 하나 뿌렸다. 발품을 팔아서 얻는 우연의 지혜라는 것 말이다. 앞으로 손품으로 파는 지식을 넘어, 발품으로 온몸을 얻는 지혜를 얻어보고자 한다. 이 생각이 얼마나 무럭무럭 커서 내 마음의 밭에서 자랄지 모르겠다. 기대된다.

김희연은 기업전략 컨설턴트다. 씨티은행에서 출발,  현대·굿모닝·신한·노무라 증권의 IT애널리스트를거쳐 2008년 LG디스플레이로 자리를 옮겼다. 금융·증권· IT·제조 분야 폭넓은 경험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LG디스플레이에선 여성 최초로 사업개발·전략·IR·투자 및 신사업을 총괄하는 최고전략책임자(CSO)에 올랐다. 지난해 퇴임뒤엔 AI 콘텐츠 융합 및 AI 시대 기업 전략 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뉴스버스에 AI관련 글을 연재하고 있다. AI시대 기업과 직장인이 갖추어야 할 '필수 역량'을 담은  저서 <공감지능시대: 차가운 AI보다 따뜻한 당신이 이긴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