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人類世)라는 새로운 지질시대?
제6의 대멸종과 인류가 지구환경에 미치는 영향
오랜 지구의 역사는 여러 지질시대로 구분이 되는데, 현재는 신생대 제4기 홀로세(Holocene Epoch)에 해당한다. 그런데 환경오염 및 기후위기 등이 고조되면서, 최근 학계에서는 인간이 지구환경에 극적인 변화와 영향을 미치게 된 새로운 지질시대로서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논쟁이 진행되었다.
인류세라는 용어는 1980년대에 미국의 한 생물학자가 처음 사용하였고, 네덜란드의 대기화학자인 파울 크뤼첸(Paul Jozef Crutzen)이 2000년에 학회에 제안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크뤼첸은 오존층 파괴의 원인을 밝히는 연구로 1995년도 노벨화학상을 받았고, 성층권에 에어로졸을 뿌려 지구의 온도를 낮추자는 태양지구공학적 방법을 제시하여 주목을 받았던 저명 과학자이다.
새로운 지질시대의 도입 여부는 국제지질학연합(International Union of Geological Sciences) 산하의 국제층서위원회(ICS)가 결정할 사안인데, 이 위원회는 2009년부터 여러 나라의 지질학자가 참여한 관련 워킹그룹(AWG)을 구성하여 연구와 논의를 진행해왔다. 워킹그룹의 실무단은 인류세의 특성을 확인하기 위한 대상 후보지인 이른바 황금 못(Golden Spike)으로서 남극의 빙핵 얼음, 일본의 해양 퇴적층 등 여러 곳을 검토한 끝에, 캐나다의 크로퍼드 호수를 선정한 바 있다.
인류세가 학계와 대중의 상당한 공감을 얻게 된 것은, 예전의 지질시대와 달리 인간 활동의 결과가 지구의 환경과 지층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산업혁명 이후 화석연료의 과다 사용으로 대기 중 온실가스가 급속히 증가해왔다.
또한 19세기 말부터 플라스틱 등이 발명, 대량 사용되면서 과거에는 없었던 새로운 물질들이 잘 썩지도 않고 지구 곳곳에 쌓이며 환경을 심각하게 오염시켜왔다. 더구나 1945년 이후 핵폭탄이 개발되어 실전 투하되고 핵실험이 반복되면서, 인공 방사성 물질이 지층에도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생물의 대량 멸종사태 또한 인류세 도입의 근거가 되고 있다. 과거 지구상에는 다섯 차례의 대멸종이 있었는데, 중생대 말인 6,500년 전 소행성 충돌에 의해 공룡을 비롯한 숱한 생물이 멸종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밖에도 바다 생물의 95% 이상이 사라진 고생대 페름기 말의 대멸종 사태 등도 있다.
그런데 지금 진행되는 제6의 대멸종은 인간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과거의 대멸종사태와는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인도양의 모리셔스 제도에는 도도새(Dodo bird)가 있었는데, 천적이 없어 하늘을 날 필요 없이 오랜 세월 동안 평화롭게 살아왔다. 그러나 이 새는 16세기 대항해 시대 이후 인류와 마주친 후에 200년도 안 되어 멸종하고 말았다. 고기 맛이 좋았던 스텔러 바다소(Steller's sea cow)는 18세기 중반에 인간에 알려진 후 불과 27년 말에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와 비슷한 인간에 의한 생물의 멸종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고, 20세기 이후에도 멸종은 계속되고 있다. 북아메리카에 서식하면서 30~50억 마리에 이를 정도로 흔한 새였던 여행비둘기(Passenger pigeon)는 인간의 무분별한 사냥 등에 의해 급속히 수가 줄어들면서, 결국 1914년에 멸종하고 말았다. 이 새는 동물원에서 보호되던 마지막 개체가 죽으면서 멸종의 정확한 일시까지 기록된 사례가 되었다.
그러나 인류세 신설에 대해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아서 논란이 되어 왔다. 무엇보다도 기간이 너무 짧다는 것인데, 현재까지 가장 마지막 지질시대인 홀로세가 시작된 지 고작 1만 2천 년도 지나지 않았을 뿐이다. 바로 앞인 제4기 플라이스토세(Pleistocene Epoch)는 약 180만년 정도이고, 신생대 제3기의 다른 세(世; Epoch)들은 최소 수백 만년에서 1천만 년 정도의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또한 인류세를 도입한다면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지도 의견이 분분한데, 산업혁명이 시작된 18세기부터라는 얘기가 있었는가 하면, 핵실험으로 인공 방사성 물질들이 배출된 1950년대부터가 옳다는 주장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시기 이후에 형성된 해양퇴적층의 두께는 1mm 정도로서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결국 작년인 2024년 3월, 국제지질학연합 산하 제4기소위원회(SQS)는 국제층서위원회((ICS)의 결정에 앞서 인류세 도입을 투표로 부결시켰다. 당초 예상과 달리 인류세 신설이 불발된 것은, 엄밀한 학문적 검토보다는 너무 정치적, 시사적 이슈에 떠밀려 성급히 결정되는 것 아니냐는 일부 지질학자들의 우려도 컸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인류세에 찬성한 학자들은 도리어 반대한 이들야말로 ‘이데올로기적’ 결정을 내리면서 지나치게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했다고 비판하였다. 비록 작년에는 거부되었지만, 결국 인류세 도입은 피할 수 없는 일로서 차기 회의에서는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되기도 한다.
물론 인류세를 신설한다고 해서 기후위기를 비롯한 온갖 전 지구적 문제가 순조롭게 해결될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 해결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면서 문제를 방관한다면, 수많은 생물의 멸종을 가속시켜 온 인류의 업보가 부메랑이 되어, 결국은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 자체가 ‘멸종 위기종’이 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