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tional Museum? 온양민속박물관
온양민속박물관과 구정아트센터
제가 학창 시절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가 어디인지를 묻는 사회 또는 국토지리 시험 문제의 정답은 대구였습니다. 인구 대비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순위가 바뀌어 제가 성장한 인천이 서울 부산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습니다. 자체적인 성장도 있지만 그보다는 기업으로 치면 M&A를 잘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1995년 인천시는 섬인 강화군과 도서지역인 옹진군을 시에 편입시켰습니다. 그래서 인구도 늘었지만 면적으로는 강화도는 물론 최북단 백령도까지 다 인천이니 가장 넓은 도시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 경상남도의 사천군은 삼천포시와 합쳐져 사천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충청남도의 아산군과 온양시도 합쳐져 아산시가 되었습니다. 그 후로는 도시간 가장 큰 합병이라 할 수 있는 경상남도의 창원시, 마산시, 진해시가 합쳐져 2010년 창원시가 되었습니다. 최근인 2023년엔 경상북도 군위군이 대구시로 편입되었습니다. 오래됐지만 강원도의 동해시는 1980년 북평읍과 묵호읍이 합쳐지면서 탄생했습니다. 이듬해인 1981년엔 황지읍과 장성읍이 합쳐져 태백시가 되었습니다.
그 시절 온양은 인천에서 초등학교 수학여행지로 꽤나 알려진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부터는 신혼여행지로도 각광을 받기도 했습니다. 교육용으로 좋은 이순신 장군의 유적지가 가깝고 휴양에 좋은 온천으로 유명한 도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온양시는 지금은 아산시가 되어 온양이란 이름은 동명(洞名)이었다가, 이제는 그것도 거리명 주소지가 개편되며 흘러간 행정지역명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수도권 전철의 장항선 구간엔 과거 지역명인 온양온천역이 있고 그곳이 현재 아산시의 중심지입니다. 과거 온양시의 중심지가 그대로 아산시의 중심지가 된 것입니다. 아무래도 군(郡)보다는 시(市)가 번화했을 테니까요. 온천을 역명에 내세우고는 있으나 온천은 과거보다 명성이 현저히 떨어진 상태입니다. 조선시대엔 임금들의 전용 온천 휴양지로 온궁이 지어졌을 정도로 유명한 온천지였는데 말입니다. 따뜻한 온양((溫陽)이란 지명도 아마 온천에서 유래했을 것입니다. 햇볕도 물도 모두 따뜻한 온양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아산시가 대표적으로 내세우는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서울에서 이사한 10대 이후에 계속해서 살았고, 죽어서도 그의 묘지와 사당이 있는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아산은 그의 외가가 있어 이사와 살았고, 결혼까지 해 처가도 있는 제2의 고향 이상이었습니다. 하지만 32세부터 관직에 나간 이후로는 함경도 북쪽 끝에서 전라도 남쪽 끝 바다를 오가며 근무했기에 실제 머문 기간은 단정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의 집이 수도인 한성에서 아산으로 이사 온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를 모신 현충사는 절(寺)이 아니고 사당(祠堂)입니다. 그런데 그의 묘지는 현충사에 있지 않습니다. 같은 아산엔 있지만 그곳에서 북쪽으로 8km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정작 현충사엔 이순신 장군의 장인, 장모와 아들 묘를 비롯해 다른 후손들의 묘가 바글바글한데 그곳의 주인인 그의 묘는 멀찍이 따로 떨어져 있기에 그렇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현충사 안에 이순신 장군의 묘지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현충사를 찾을 것입니다.
온양엔 온천과 이순신 장군만큼의 역사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1978년부터 지금까지 50년 가까이 그 지역을 대표하는 명소가 하나 또 있습니다. 바로 이 글의 주인공인 온양민속박물관입니다. 이름 그대로 과거 우리 선조들이 살았던 모습을 고증하고 그들이 사용했던 물품을 수집해서 전시해놓은 박물관입니다. 그런데 이 박물관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을 마치 새로 발견한 것마냥 글을 쓰고 있지만 그 박물관을 단 한 번이라도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저와 똑같은 생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아니, 아마도 이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도 그러한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 시절 위인전은 최고의 독서물이었습니다. 훌륭한 사람들의 일대기를 기록한 책이니 부모님과 선생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권했고, 어린이 입장에선 훌륭한 어른이 되기 위해선 반드시 읽어야 될 책으로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아도 재미가 있어서 읽곤 했습니다. 그래도 순위는 만화, 동화 다음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인터넷과 PC가 없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위인전은 과거 시대의 개인사를 다룬 책이지만 그 위인이 살던 시대의 역사책 역할도 했습니다. 국내 위인전은 국사책, 해외 위인전은 세계사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적극적으로 권할 수밖에 없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착한 어린이들은 재미를 느껴서도 알아서 열심히 읽었습니다. 책이 없으면 옹색했던 학교 도서관이나 친구에게서 빌려서 읽기도 했습니다. 그때 위인전의 최고봉은 계몽사에서 나오는 전집이었습니다. 국내외를 망라하고 계몽사의 위인전이 제 기억엔 최고로 재미있었고 책도 근사해 보였습니다.
이렇듯 계몽사는 이름에서도 어느 정도 유추되듯이 교육용 성격이 강한 출판사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 출판사는 어느 순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존재여부조차 불투명합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출현으로 20세기에 잘 나가던 출판사들이 공통적으로 겪은 현상입니다. 그런 시대의 아픔으로 계몽사의 설립자는 1998년 회사를 타인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백과사전 출판사였던 브리태니커조차 버티다가 2012년부터는 종이책 출판을 완전히 중지시켰으니까요. 현재 중고서적 몰엔 그 두꺼운 과전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보니 계몽사의 위인전집도 중고 서적으로 꽤나 많이 나와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상품력이 살아있기에 그럴 것입니다.
계몽사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온양민속박물관이 그 계몽사의 설립자가 세운 박물관이기에 그렇습니다. 구정(龜亭) 김원대 선생이 바로 그입니다. 그는 1970년대 중반 당시 출판으로 번 돈으로 출판이 아닌 분야에서 이전부터 구상해온 또 하나의 계몽물을 론칭했습니다. 사라져 가는 우리의 민속, 그 과거의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보여줌으로써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자신의 뿌리를 생각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가 설립 취지에서 밝힌 것처럼 온고지신(溫故知新) 정신을 일깨워주는 산 교육장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학술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역사란 것은 대개 스펙터클한 이벤트나 영웅이 출현하는 사건이나 인물만을 주목해서 기록하고 남기기에 그 기저에 뿌리 깊게 이어오는 백성들의 생활이나 양식은 가려져 있기에 그렇습니다. 온양민속박물관은 박물관 브랜드 마크인 MI(Museum Identity)에도 백성 민(民)을 넣었듯이 그런 우리 선조들의 라이프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박물관입니다. 그 백성은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혼자가 아닌 둘이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인 18일 오후 저와 일행은 박물관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의당 보여야 할 박물관 건물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박물관이 그만큼 넓어서 그렇습니다. 비슷한 크기의 유적지를 찾아보니 온양민속박물관(6만4,800제곱미터)의 면적은 덕수궁(6만7,048제곱미터)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설화문(雪華門)이라고 쓰여 있는 그 정문은 마치 덕수궁의 대한문(大漢門)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넓은 면적을 채우는 것은 전통 정원입니다. 삼성그룹의 호암미술관에 희원이라는 정원이 있듯이 온양민속박물관도 정원에 많은 면적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 50년에 걸쳐 자라고 다듬어진 그 정원 사이사이엔 민속품들이 야외 조각처럼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부속 건축물들도 있습니다.
정원을 걷다 보면 강원도 산골의 전통집인 너와집이 숲속에 나타납니다. 논농사를 짓지 않는 산골에서 짚 대신에 나무판자로 지붕을 얹은 집입니다. 온양민속박물관의 그 너와집은 그 터에 새집을 지은 것이 아니라 강원도 삼척에 있던 집을 통째로 옮겨온 헌집입니다. 그곳에 1878년 최초로 지어진 집입니다. 그래서 일일이 분해한 후 번호를 매긴 자재들을 기차로 싣고 와 다시 조립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오래된 집을 오래 동안 관리를 해왔는데 보수할 때마다 어려운 것이 너와집을 짓는 목수를 찾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초가집을 지을 줄 아는 사람도 수배하기 힘든 마당에 너와집은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민속 보존이 그만큼 어려운 이유입니다.
태극 문양의 굽어진 길을 따라 올라가면 백제의 무령왕릉 내부를 모티프로 건축한 박물관이 나타납니다. 위의 백성 민(民)이 문패처럼 달린 그 본관입니다. 2004년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김석철 건축가가 설계를 했습니다. 그는 1975년 건축주인 김원대 선생을 만나 3년간 많은 토론과 공방을 벌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완성된 박물관으로 저와 일행은 입장을 하였습니다. 박물관 학예실장의 안내로 우리네 옛날 사람들의 일생을 보여주는 전시실부터 돌아보았습니다. 특정 연대를 지명하기 힘든 그 옛사람들은 가까이는 우리 부모 세대나 조부모 세대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먹고, 입고, 거주하고, 사용하던 물품들이 빼곡하지만 보기에 편하게 질서 정연하게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농업, 어업과 각종 수공업 등의 직업별 사용했던 용품들과 놀이기구 등 우리 조상의 손을 거쳐간 모든 것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미국 LA에 있는 게티센터를 갔을 때 근대 유럽 상류층 집의 벽난로를 벽째로 뜯어와 전시해놓은 것을 보고 놀랐었는데 온양민속박물관에서 그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습니다. 벽면 하나가 아니라 방이든 작업장이든 통째로 전시되어 있으니까요. 현재 전시물들은 1978년 최초 전시되었을 때와 거의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전시물들도 마치 건축물의 한 부분처럼 긴 세월을 함께 해온 것입니다. 그렇게 교정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설립자의 노력과 열정이 최초 시점 깊고도 세심하게 반영되어 있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이 박물관 설립 훨씬 이전부터 이 많은 민속물들을 수집해왔을 것입니다. 하이엔드로는 인사동 골동품 상회를 들락거리고, 로우엔드로는 고물상이나 문명과 최대한 먼 전국 각지의 외진 시골들을 찾아 헤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아 온 옛것들을 저장하고 분류하는 일도 꽤나 지난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관내 부속 건물 중 의외의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설립자의 호를 딴 구정아트센터입니다. 민속박물관 내에 있지만 용도를 드러낸 이름에서부터 모던한 맛을 물씬 풍기는 멋진 건축물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정아트센터는 갤러리입니다. 설립자는 민속박물관이지만 지역민들을 위한 예술과 문화 센터까지 관내에 지은 것입니다. 그 센터는 재일 교포 건축가로 유명한 이타미 준의 작품입니다. 1982년 그는 이 작품으로 국내에 데뷔했습니다. 건축가의 유명세와 건축물의 예술성으로 매체에서도 많이 소개되고 있는 구정아트센터입니다.
이타미 준은 건축주의 취지인 온고지신(溫故知新)에 따라 고(故)만 있는 민속박물관에 신(新)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 신에도 고(故)를 포함시켰습니다. 근거와 이유가 있는 고(故)였습니다. 그가 찾은 고인(故人)은 그곳에 연고가 있는 이순신 장군이었고, 그를 건축물로 가시화시킴에 있어 가장 임팩트가 있는 고물(故物)은 거북선이었습니다. 거북선은 임진왜란이 시작된 1592년 사천해전부터 1597년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이 대패를 하기 전까지 우리 바다를 지키며 맹활약을 펼친 첨단 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원균이 그 세 척을 모두 말아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다음 "제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있습니다"라는 이순신 장군의 출사표로 유명한 명량해전의 12척 안에 거북선은 들어있지 못했습니다. 그런 거북선이 현대화되어 그의 고장에서 부활한 것입니다. 게다가 건축주인 김원대 선생의 호인 구정(龜停)에도 거북은 들어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방문했던 그날 구정아트센터에선 의미 있는 이벤트가 열렸습니다. 거북선 안에서 그것을 건조한 이타미 준을 주제로 강연회를 연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강연자는 이타미 준의 딸인 유이화 건축가였습니다. 이타미 준의 블러드와 DNA를 50프로 가지고 있는 그녀는 아버지이자 스승인 그의 건축과 철학에 대해 강의를 이어갔습니다. 국내에서 가장 먼저 작업한 그곳 구정아트센터를 비롯하여 제주도의 포도호텔과 방주교회 등 이타미 준의 다양한 포트폴리오가 소개되었습니다. 제가 그날 느낀 것은 이타미 준은 건축도 건축이지만 그의 철학을 나타낸 글이 참으로 유려하고 멋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건축가이자 화가이기도 했지만 제 눈엔 작가(writer)로도 보인 그였습니다. 유이화 건축가는 중간에 아버지를 회상하며 감정이 북받쳐서인가 눈물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천상 그의 딸이었습니다.
설립자가 작고한 2000년부터 온양민속박물관은 그의 딸인 김은경 관장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렇듯 온양민속박물관은 설립부터 지금까지 개인이 운영하는 사립입니다. 국내에 그런 유사한 사립으론 간송박물관 정도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가장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규모와 소장품이 개인의 선을 넘어 국가나 지자체가 운영하는 국립이나 도립, 시립처럼 보이는 이 온양민속박물관이 어떻게 운영되냐는 것입니다. 호암미술관처럼 대기업이 운영하는 것도 아니고, 게티센터처럼 대부호의 상속 재산으로 운영되는 것도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보이는 수입은 입장료나 대관이 거의 다로 보이는데 그것으로는 살림이 턱없이 부족해 보이기에 그렇습니다. 돈을 번다는 것은 진짜 언감생심일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선대의 뜻을 이어받은 후대의 노력과 희생이 없이는 절대로 운영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명감이 온양민속박물관이 지금까지 살아서 가고 있는 가장 큰 동력일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나 지자체의 협업이나 보조 유무를 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보다는 더 큰 관심과 지원이 있기를 희망합니다. 귀중한 우리의 역사 유산을 지키고 대대로 미래의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게다가 온양민속박물관은 지금 그 지역에서 지고 있는 온천을 대체할 문화예술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와서 봐도 온양민속박물관은 온양 지역의 민속만을 전시하는 로컬 박물관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전체 민속을 전시하는 대한민국민속박물관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날 마지막 일정인 이타미 준의 강의를 들으며 어느 한순간 저는 묘한 흐뭇함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퍼뜩 무엇인가가 제 머릿속에 중첩되며 떠오른 것입니다. 온양민속박물관이나 이타미 준의 건축 모두 아버지의 유업을 딸들이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딸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광용은 대학 졸업 후 오리콤, 이노션 등에서 광고인 한 길로만 가다가 50세가 넘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세상사 이때 저때, 이곳 저곳, 이것 저것, 이사람 저사람에 대한 인문학적 관심이 많다. 박학다식한 사람은 깊이가 약하다는 편견에 저항한다. 그래서 그는 르네상스적 인간을 존경하고 지향한다. 박학과 광고는 어찌보면 ‘넓다’라는 측면에서 동일성을 지닌다. 뉴스버스 연재 에세이를 추려 인문교양 에세이집을 출간한 그는 태평양인문학교실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아래는 하 작가의 책 '테이크아웃 유럽예술문화', '테이크아웃 유럽역사문명', '테이크아웃 일본근대백년' 소개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