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서 천국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다- 문혜정 작가
문혜정(71) 작가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5년이 지난 1985년 타이틀 '붓놀림'으로 첫 개인전을 가졌다. 직전 1982년부터 2년간 일본 도쿄(東京) 판화연구소에서 공부하였다. 그림으로서의 서예는 아름다웠다. 2000년대 서체적이며 선묘 중심의 연꽃 시리즈의 출발이기도 했다.
독일로 유학을 떠난 1989년부터 내면에서 창작 욕구가 꿈틀거렸으나 처음 1년동안 작품이 풀리지 않아 귀국할 생각으로 보따리를 싼 적이 있다. 짐들을 묶은 캔버스천(광목)을 말아 만든 끈이나 포장이 회화적 영감을 불러 일으켰다. 짐을 다시 풀었다. 캔버스천과 포장끈을 이용한 오브제 작업을 시작했다. 1991년 슈트트가르트 국립조형예술대 대학원을 졸업한 해 바덴뷔르템베르크(Baden-Württemberg)주 국회 전시(청년작가 공모 당선), 독일 KODAK 사진 공모전에서 수상했으며, 1992년 주정부 예술기금을 받았다.
1994년과 1995년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정부 예술재단과 슈투트가르트 시, 프리드리히스하펜(Friedrichshafen) 미술협회가 각각 주관한 쿤스트하우스 샬러(Kunsthaus Schaller)에서 전시를 이어 나갔다.
문혜정은 기획자로서도 활동했다. 1990년대~ 2000년대 중반 독일과 한국을 왕래하며 주립 미술관, 시립미술관 등에서 한·독 교류전 성격의 전시를 네 차례 기획했다.
1996년 “Aus Seoul - 서울로부터”(슈튜트가르트 시립미술관), 1998년 “독일 현대 미술의 움직임”(워커힐미술관, 슈튜트가르트 시립과 공동), 1999년 “두 세계를 이으며”(주한독일대사관, 아르코미술관 공동)를 기획했다. 1998·1999년 전시에는 각 작가로도 참여했다. 오브제와 사진은 일상에서의 제의(祭儀), 자기 자신을 위한 기복적인 제사를 지낸다는 생각으로 드러낸 작업이었다.
2001년~2002년 1월 바덴뷔르템베르크 예술협회에서 가진 <루나파크 - 한국의 현대미술, Lunapark – Zeitgenössische Kunst aus Korea > 전시 및 동명 제목의 출판물 간행을 기획했다. 루나파크(Lunapark)는 ‘비일상적 공간’이라는 의미이다. 전시는 자신을 포함 최정화, 서도호 등 소장 작가가 참가한 한국 동시대 미술의 조명이었다.
문혜정의 작품 ‘인삼밭Ginseng Field’은 2001년 슈튜트가르트 미술 협회 전시 공간에서 펼쳐졌다.
독일에서 이방인이었던 작가에게 인삼은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아프거나 지칠 때, 한국에서 가져온 말린 인삼 든 곽에서 두어 뿌리를 꺼내 탕기에 물을 넣어 달여 먹었다. 컨디션을 찾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작가에게 대나무, 종이 발, 종이 노끈, 솜 등 흰색 주조의 오브제는 ‘다시 시작하고,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를 담는다고 한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흰’ 책이었다. 그 책의 시작은 내 어머니가 낳은 첫 아기의 기억이어야 할 거라고, 그렇게 걷던 어느 날 생각했다”(한강 소설 ‘흰’ 174쪽)
한강이 말한 ‘내 어머니가 낳은 첫 아기’는 많은 생명들이 그렇듯 배냇 옷도 입히지 못한 채 천국으로 이르는 길을 떠나지 않았나.
문혜정의 종이, 천, 노끈, 솜 등의 오브제는 인삼을 생육하게 구성하는 뿌리, 줄기, 이파리 등을 상징하지 않을까?
한국은 1945년 일제식민 강점기에서 벗어난 직후 3년간의 미군정, 남북 분단 으로인한 경제 피폐, 곧 이어진 국제전 성격의 한국전쟁으로 경제 발전을 위한 자본 축적에 실패하였다. 한반도의 특산품인 인삼(홈삼)은 작은 규모 단위 국제 교역에서 국제 통화 가치를 대신한 근대화의 상징이기도 했다.
2004년 국립 고양 미술스튜디오 1기로 입주하였으며 2005년 독일 외무성 예술가 장학금을 받았다. 2005년 고양스튜디오에서 ‘인삼밭’을 소재 또는 주제로 설치 작품을 선보였다.
문혜정은 2007년 한국과 독일의 가톨릭 수도원 피정을 다니며 주변 전원 풍경을 사진으로 찍었다. 수도원 초입의 맨땅, 길섶, 신록의 숲길, 멀리 보이는 낮은 산등성이 등의 사진을 영상으로 만들었다. 이 때 작업 모티브들은 2007년 ‘그 길을 따라 1’, 2010년 ‘그 길을 따라 2’, 2018년 ‘그 길을 따라 3’ 전시로 이어진다.
2008년 처음으로 한지에 먹으로 인삼 밭을 그렸다. 설치 할 수 없는 전시 조건을 고려한 실험적인 작업이었다. 먹과 익숙해지는데 상당한 노력이 들었다., 인삼 밭 드로잉은 2010년 독일 전시에서 선보였다.
2010년부터 3년여 경기도 양평군 문호리 전원 생활 경험이 모티브가 된 풍경 작업은 2012년 전시 “線 선/Line”, 2015년 전시 “흐르는 강물처럼”으로 이어진다.
2018년 전시 ‘그 길을 따라 3’에 나온 작품들 화면에는 돌만 남겼다.
“화면에서 군더더기를 모두 빼다 보니 돌만 남았다.
그것은 그동안 내가 무심코 지나간 크고 작은 표지석들이 아니었을까?
그 표지석들을 바라보며
원래의 나, 내면에 있는 참 나를 만나러
그 길을 따라가고 있다.” (작가노트 - 2018)
작가는, “표지석은 자신이 걸어 온 길, 앞으로 나아갈 길을 뜻한다”고 한다.
가수 양희은이 부른 ‘들길 따라서(1974년)’에 “나는 한 마리 파랑새 되어 저 푸른 하늘로 날아가고파~” 가사처럼 작가는 상상 속의 새, 하늘을 나는 파랑새의 시점으로 어떠한 격류에도 휩쓸리지 않은 참 자아를 작품으로 녹여낸 듯 보인다.
2018년 또 다른 전시 ‘기억의 방’은 독일 체류 시절, 재활용쓰레기 버리는 날 작업에 쓸만한 나무토막이나 상자, 등나무 바구니, 의자 같은 물건들을 대상으로 종이에 연필로 그린 작품들이었다.
2022년 ‘생명력’, 2024년 ‘대지의 생명력’ 타이틀로 이어온 전시에 나온 작품들, 유기적인 리듬을 타고 나오는 선(線)들은 자연과의 교감 속에서 연필, 유화, 먹물, 때로는 손으로 직접 화면에 그리거나 오브제 작업에도 드러난다.
문혜정 작가는 2025년 9월 10일부터 6주간 서울 중구 정동 스페이스 소포라에서 23번째 개인전을 갖는다.
심정택은 2009년 상업 갤러리(화랑) 경영을 시작한 뒤 지금까지 국내외 45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했다. 그 이전 13년여간 삼성자동차 등에 근무하였고 9년여간 홍보대행사를 경영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기사, 2019년 4월부터 작가 및 작품론 중심의 미술 칼럼 270여편, 2019년~ 2023년, 건축 칼럼(필명: 효효) 160여편을 기고했다. 뉴스버스에는 2021년 창간부터 주1회 미술작가 평론을 게재해왔다. <이건희전, 2016년> 등 3권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