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왕조와 백성을 지켰을까

2021-11-06     황현탁 여행작가

한양도성(사적 제10호)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쌓았다. 평균 높이 5~8m, 전체 길이 18.6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태조5년(1396)에 백악산․낙산․남산․인왕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된 이후 몇 차례 개축되었다. 한양도성은 일제강점기와 도시화 과정에서 파괴되기도 하였는데, 일부구간은 복원하여 현재는 13.7km의 성곽이 보존되고 있다.  

도성을 쌓으면서 전체 성곽을 180m씩 97개 구간으로 나누어 관리하였는데, 각 구간을 천자문 순서대로 번호를 매겼으며 북악산 정상에서 천(天)자로 시작하였다. 이런 내용을 성돌에 새겨 함께 쌓았는데, 이 돌을 각자성석(刻字城石)이라 한다. 이후 개축할 때에는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기거나(15세기), 당당 관리나 석수(石手)의 이름을 새긴(18세기 이후) 돌이 280개 이상 발견되었다. 

초가을 연휴 낮 더위에 땀을 흘려가며 한양도성 탐방에 나섰다. 남산구간은 광희문에서 숭례문까지 5.4Km이나 광희문에서 장충체육관까지는 도시화로 성곽이 사라져 장충체육관에서 시작하여 숭례문까지 걸었다. 이 구간에도 반얀트리클럽(구 타워호텔) 경내, 남산정상부 타워구간, 남산도서관 뒤편 남산공원 구간, 숭례문인근 지역은 사유지이거나 도시화로 복원하지 못해 성곽의 실제길이는 훨씬 짧다. 

한양도성 탐방객들 통행로로 만들어놓은 순성길. (사진=황현탁)

이 길을 ‘한양도성 순성길’로 이름 붙였는데, 병사들이 경계목적으로 순찰하는 순성(巡城)길이 아닌, 탐방객들을 위해 새로 만들어 놓은 통행로이다. 장충동에서 반얀트리클럽 경계까지 구간은 성곽 안팎으로 순성길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구간은 도성 안쪽 순성길, 남산 남측순환로부터는 성곽 바깥쪽 순성길, 남산정상에서 남산도서관 뒤편까지는 성곽안쪽 남산등정 ‘중앙계단길’, 백범광장부터는 바깥쪽 순성길을 이용하였다.  

2013년까지 순성길 가까운 약수동에 10년 이상 살아 성곽길을 수없이 다녔다. 장충동부터 시작되는 도성안쪽 순성길은 사유지(신라호텔, 자유총연맹, 반얀트리클럽)여서 2010년 경 완성되었다. 탐방로에 사유지경계 방책이 설치되기 전에는 볼 것이 있는 신라호텔 경내를 들어가 팔각정, 많은 조각 작품, 고 이병철 동상 등을 살펴볼 수 있었다. 호텔부지가 끝나는 지점에는 성곽에 암문이 있어 드나들 수 있다. 장충동에서 반얀트리클럽 경계까지 순성길은 벚꽃 피는 시기와 단풍이 지는 시기가 탐방의 최적기로,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과 떨어지고 굴러다니는 낙엽을 맞닥뜨리면 환상적이다. 

반얀트리클럽 경내를 통과하여 국립극장 입구로 들어서 남산 남측순환로와 북측순환로 경계지점을 지나면 도로 때문에 성곽이 단절된 곳을 만난다. 그곳이 바로 중구와 용산구의 경계지점으로 보행자 도로 바닥에 표지석을 박아놓았다. 거기서부터 성곽바깥에 순성길을 만들어 놓았는데, 전부가 계단으로 되어 있어 ‘계단길’로 부른다. 탐방객들이 전부 몇 계단인지 세는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서인지 누군가 계단에 흰색 유성 펜으로 숫자를 적어 놓았다. 군부대로 인해 순성길을 만들 수 없어 성곽을 타넘는 탐방로를 조성하였는데, 그곳까지 659계단이란다. 

659계단 위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시가지. (사진=황현탁)

남측순환로 합류지점에서 군부대 입구까지 내려가 보니 성곽주변도 많이 정비해 놓았다. 구절초를 심어 산들바람에 활짝 핀 구절초가 일렁인다. 구절초, 성곽, 남산서울타워가 어울린 멋진 풍광이다. 도로를 따라 남산 정상부까지 오르니 연휴여서 많은 사람들이 쉬거나 경관을 즐기고 있다. 남산타워 전망데크는 11시 전이어서 줄을 쳐놓아 들어가지 못했다. 팔각정, 국사당 표지석, 봉수대를 둘러보고 ‘중앙계단길’을 이용하여 잠두봉 쪽으로 내려 왔다. 봉수대의 담쟁이는 새빨갛게 단풍이 들었으나, 남산 숲은 한 달은 더 지나야 단풍이 절정에 이를 것 같다.

한양도성 성곽. (사진=황현탁)

1925년 일제는 남산의 성곽 일부를 해체하고 그 자리에 조선신궁을 건립하여 참배토록 하였다. 또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조선에 1만개의 방공호를 구축한다는 계획에 따라 남산에도 방공호를 파놓았다. 광복이후 신궁터에는 이승만대통령 동상이 들어섰다가 4.19 혁명으로 철거되었다. 1968년에는 식물원과 분수대를 설치하였다가 2006년 식물원은 철거되었다. 몇 번 아이들과 함께 식물원을 구경했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2013~2014년간에는 남산도서관 뒤편 지역을 발굴하여, 도성 축성의 역사, 일제강점기의 수난, 해방 이후의 도시화, 발굴 및 정비 과정을 볼 수 있도록 전시시설을 설치하여 2020년 말부터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땅속에 묻혔던 성곽의 기단부가 드러나도록 발굴하고 축성흔적을 알아 볼 수 있도록 일부는 새 돌을 쌓아 전시하고 있다. 발굴하지 않은 구간은 성곽이 위치하였던 곳을 알 수 있도록 백범광장을 가로질러 표시해 놓았다.

전시시설 설명판에는 나무기둥을 세우고 줄에 묶인 돌을 위아래에서 줄을 당겨가면서 성을 쌓는 모습을 그림으로 표시해 놓았다. 14세기 말 전국 각지에서 20만 명을 동원한 ‘인해전술’(人海戰術)로, 특별한 기계․기구 없이 맨몸으로, 수많은 돌을 다듬어 가며 쌓은 방위시설이다. 노고(勞苦)의 흔적을 보니,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왕국을 보전하려는 통치자들의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한편으론 그런 시설이 ‘전쟁의 승리나 왕조를 지키는데 얼마나 유용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한양도성 발굴 및 축성 과정을 볼 수 있는 전시시설. (사진=황현탁)

임진왜란 때 한양도성은 있었다. 그럼에도 선조는 그 성곽에서 왜군과 대치하면서 제대로 전투 한 번 치루지 않거나 못하고 개성을 거쳐 신의주까지 피난을 가야만 했다. 왕은 전쟁에 이겨서가 아니라 적장의 죽음으로 퇴각하자 환도하였다. 20세기 일본에 의한 조선의 강점도 도성을 위요한 전투의 결과는 아니다. 또 병자호란 때 인조 역시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군에 대항해 공방전을 펼쳤으나, 40여일 만에 항복하고 말았다. 성곽은 개별 전투에서 필요하고 효과적일 수 있겠지만, 나라의 존망이 달린 전쟁의 승패에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지 못함을 우리 역사는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스로마신화에 등장하는 트로이성은 견고하고 대비가 철저하여, 아카이아 연합군이 공방전을 벌였음에도 함락시키지 못한다. 아카이아군은 꾀를 내어 목마 속에 정예군을 숨겨 전쟁에서 승리한다. 이처럼 전쟁의 승패는 성벽의 견고함이나 병사들의 응전태세 보다는 군수물자 반입차단이나 요새의 봉쇄, 위장술 등 전략전술이나 국력에 달렸음을 웅변하고 있지 않은가! 

장충동 성곽 바깥쪽은 인기드라마였던 <겨울연가>의 촬영지여서, 2000년대에는 일본관광객들이 많이 찾기도 하였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양국관계도 예전 같지 않아서인지 촬영지 표지판은 사라지고 없었다. 한양도성 성곽은 600여년의 성상을 버텨오면서 자연스런 현상으로 중화, 배부름, 균열현상이 발생하여 안전진단과 계측을 하고자 성벽에 계측장비들을 부착해 놓았음을 알리고 있다. 

숭례문. (사진=황현탁)

불탄 후 복원된 숭례문(남대문)은 개천절연휴 대규모집회시위가 예정되어 있어 굳게 문을 닫아 놓았다. 경내에 들어가진 못하고 방책 밖에서 사진에 담는 것으로 구경을 대신했다. 도시화로 끊어진 성곽을 전 구간 복원하긴 어렵겠지만, 왕실과 백성을 보위하려 했던 의지는 이어져야 한다. 나라와 국민의 안전을 보호해야하는 국가와 정부의 능력은 강고하고 한 치의 빈틈도 없어야 함을 위정자는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황현탁은 미국, 일본, 영국, 파키스탄에서 문화홍보담당 외교관으로 15년간 근무했다. 각지에서 체험을 밑천 삼아 이곳 저곳을 누비며 여행작가로 인생2막을 펼쳐가고 있다. 『세상을 걷고 추억을 쓰다』, 『어디로든 가고 싶다』 등 여행 관련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