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송파유세 가봤더니...'김문수' 외치면 '한동훈' 메아리
그들이 김문수 아닌 한동훈에 열광하는 까닭은? '내 인생도 엄마 인생'인 엄친아 둔 중장년의 복고적 기억 때문 한동훈이 尹 최대 정적으로 변신한 건 김건희와 불화 탓일 뿐
골을 넣어도 ‘박종환’을 외치던 그때를 아시나요
이태 전 타계한 박종환 전 국가대표팀 감독이 프로축구 일화 천마 구단(현재의 성남 FC)의 지도자로 왕성하게 활동할 무렵이니 꽤 오래전 일이다. 일화 선수들에게는 한 가지 불만스러운 사항이 있었다고 한다. 선수가 골을 넣어도, 경기가 승리로 마무리되어도 관중들이 ‘박종환’만 연호하는 현상이었다.
인기가 곧 돈인 프로스포츠 선수들에게는 이는 당연히 내심 매우 언짢은 상황이었다. 밖으로 차마 대놓고 내색하지 못할 그와 같은 불만을 가진 선수들 가운데는 심지어 당대 최고의 공격수로 평가되던 적토마 고정운도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박종환의 대중적 인기는 내로라하는 스타급 플레이어마저 일순간에 듣보잡으로 만들어버릴 만큼 그야말로 넘사벽이었다.
박종환 감독은 1983년 멕시코에서 개최된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 대회에서 한국팀을 4강으로 견인하는 기적을 이뤄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장 신화로 절정을 맞이하는 붉은 악마 신화의 서막이었다.
그는 정작 성인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후에는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박종환 특유의 혹독하고 권위주의적인 스파르타식 훈련법이 변화한 시대상과 머리 굵은 성인 선수들에게는 맞지 않은 탓이었다. 박 감독과 선수들 사이에 누적된 갈등은 1996년 이란과의 아시안컵 8강전에서 일부 선수들의 태업성 플레이로 결국 폭발했다. 한국은 이 경기에서 이란의 최전방 장신 스트라이커 알리 다에이에게 무려 네 골을 헌납하는 졸전을 거듭한 끝에 ‘2 대 6’으로 참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프로팀 감독으로서의 박종환은 청소년 대표팀을 이끌 때만큼이나 독보적이었고, 그가 사령탑으로 재임하는 동안 일화는 정규리그 3연패의 빛나는 위업을 달성했다.
팀이 아무리 잘나간다고 해도 관중들이 여간해서는 감독의 이름을 연호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박지성이 입단해 맹활약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웨인 루니 등의 막강한 초호화 공격진을 앞세워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를 평정했을 즈음 맨유 홈구장인 올드 트래포드 관중석에서 알레스 퍼거슨 감독의 이름이 울려 퍼졌다는 소식은 거의 전해지지 않았다. 박종환 감독과 퍼거슨 감독의 차이를 낳은 배경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원인이 박종환에게는 축구 이상의 의미와 서사가 부여된 데 있었다고 생각한다. 박종환 감독의 열성 팬들은 선수들에게 투지의 역할과 근성의 중요성을 유달리 강조하는 그의 모습에 “하면 된다”는 악바리 정신 하나로 무장해 공장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중동의 뜨거운 사막에서, 남태평양 망망대해의 원양어선 갑판에서 몸이 부서져라 일했던 자신들의 고단했던 삶의 기억을 투사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박종환의 승리는 나의 승리였고, 박종환의 패배는 나의 패배였다. 국민의 이목이 집중된 국제대회를 앞두고 “그라운드에서 쓰러지겠다는 각오로 뛰겠다”고 텔레비전 뉴스 카메라 앞에서 비장하게 다짐하던 선수들이 여전히 여러 종목에 걸쳐 허다하던 시절이었다. 문제는 크고 작은 부상을 달고서 그라운드에서 쓰러지겠다는 각오로 뛰었던 선수들의 상당수가 과도한 혹사와 무리한 출전의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선수 생명이 단축됐다는 점이다. 그들은 일찌감치 현역 생활을 마감해야만 했다.
정치칼럼에서 뜬금없이 축구, 그것도 논바닥인지 잔디인지 구분이 안 되는 열악한 운동장에서 힘들게 공 차던 지나간 옛이야기를 왜 하느냐고 필자를 타박할 독자들도 있으리라. 이유는 있다. 맥락에 상관없이 일단은 ‘한동훈’부터 조건반사적으로 연호하고 보는 국민의힘 대통령 선거 유세장의 기이하고 거북스러운 풍경이 박종환 감독이 명장으로 성가를 높이던 시기의 한국축구와 자연스레 겹쳐졌기 때문이다.
김문수 유세의 중심에서 한동훈을 외치다
5월 하순의 따가운 햇볕이 제법 초여름 분위기를 뭉근하게 발산하던 2025년 5월 25일 일요일 오후,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 지원 유세가 펼쳐질 예정인 잠실 석촌호수로 향했다. 유세 장소가 필자가 거주하는 다세대 주택에서 자전거로 출발해 천천히 달리면 20분도 채 소요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인 터라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서 입는 체육복 차림으로 갔다.
자전거를 호수 근처에 세워놓은 다음 연단으로 사용되는 유세차량 근처에 다가가니 김문수 후보가 최근 ‘미스 가락시장’으로 지칭한 배현진 의원이 한창 마이크를 잡고 있었다. 이곳 송파 을 지역구 국회의원이기도 한 배 의원은 조경태 의원을 위시한 친한동훈계 정치인들을 차례차례 소개했다. 단상에 오른 인물들은 빨간색 옷을 맞춰 입고 행사장에 모여든 청중을 향해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물음을 던졌다.
“이재명입니까? 김문수입니까?”
중장년 여성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청중은 그때마다 일제히 “한동훈!”이라고 대답했다. 득점을 해도 박종환을 연호하고, 우승을 해도 박종환을 연호하던 30여 년 전의 동대문 운동장이 이러했다고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입 사이로 엷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신학은 신을 연구하는 학문이고, 종교학은 신을 믿는 신도들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 나는 한동훈의 대국민 메시지를 면밀하게 분석하러 왔다가, 한동훈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얼떨결에 관찰하고 있었다.
잠시 후 이날의 주인공인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가 웅장하게 솟구쳐 오른 롯데월드타워가 코앞에 버티고 선 유세 현장에 도착했다. 그는 오늘도 선관위에 선거유세원으로 등록하지 않았는지 연단에서 마이크를 잡지 않았다. 대신 석촌호수 동호의 수변무대로 이동해 야외극장에서 공연되는 1인극의 배우처럼 육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무대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한 나는 한동훈의 정확한 연설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단지, 그가 목이 이미 쉬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한동훈 지지자들에게는 말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게 대수롭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한동훈 입에서 나오는 얘기를 듣는 것보다 자기 입으로 한동훈의 이름을 외치는 게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인 듯했다.
연설 중간에 어느 남성 노인이 “한동훈 배신자!”라고 야유하자, 한 중년 여성이 곧바로 큰소리로 대꾸를 시작됐다. 남성 노인은 한동훈을 배신자라 계속 욕했고, 중년 여성은 이 모든 사태가 윤석열과 김건희 때문이라며 지지 않고 쏘아붙였다. 대선에 출마한 당사자인 김문수 후보에 대한 관심과 응원은 두 사람 모두 애당초 뒷전이었다. 김문수는 이곳에서 오직 운동원들이 입은 야구복에 적힌 기호와 성명으로만 머물고 있었다. 김문수가 뭐 하는 인물인지 소상히 알려면 차라리 더불어민주당의 대선 유세를 구경해야만 할 지경이었다.
국민의힘은 이준석 개혁신당 대선 후보와의 단일화에 후보자인 김문수는 물론이고 신임 비상대책위원장인 김용태 의원까지 나선 데서 입증되듯이 당 전체가 목을 걸다시피 하고 있다. 그런데 한 곳을 틀어막으면 다른 한 곳에서 물이 줄줄 새는 것처럼, 이준석에게로 흘러나갈 표를 단속하려 하면, 한동훈 쪽에서 곧장 누수가 발생하는 형국이다. 이준석 후보를 끌어들이려는 진정한 동기가 이 후보의 손을 빌려 한동훈을 제거하겠다는 차도살인의 교활한 권모술수에 있음을 한동훈 지지층이 진즉에 환하게 눈치챈 탓이다.
윤석열 못잖게 평생 검사였던 한동훈이 정치를 하는 참다운 목적은 아직도 수수께끼이다. 그가 윤석열 정권의 황태자에서 내란수괴 피고인 윤석열의 최대 정적으로 변신한 극적인 반전은 한동훈의 통절한 자기반성과 뼈를 깎는 거듭남의 노력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았다. 한동훈과 윤석열의 배우자 김건희 간의 개인적 불화가 한동훈을 반윤석열 대오에 운 좋게 편입시켰다.
한동훈은 남들을 좌파로 공격하면서도, 본인 또한 좌파로 비난받고 있을 정도로 가치와 이념이 불분명하다. 그렇다고 그가 탈이념에 기반한 실용주의 노선을 걷는 것도 아니다. 한동훈 전 대표가 간간이 표방하는 경제정책은 윤석열의 시도 때도 없는 하이에크 숭배와 마찬가지로 한물간 신자유주의의 아류 냄새를 짙게 풍긴다.
반면, 한동훈 지지자들이 한동훈에 열광하는 까닭은 전모가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중장년 여성들이 중핵을 형성한다는 측면에서 한동훈 지지층은 유명 트로트 가수 임영웅의 팬덤과 유사하다. 한 꺼풀 더 벗겨보면 한동훈 지지층은 임영웅 팬덤과 견주어 한층 더 복고적이고 보수적이다. 그들은 말 잘 듣고 공부 잘한 자녀를 양육하던 젊은 날의 재미나고 보람찬 추억을 한동훈의 실물을 바라보며 소환하는 기색이다. 그들 마음속에서 한동훈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73년생이 아니다. 푸릇푸릇한 2003년생이나 앳된 2013년쯤 되는 위치를 심리적으로 점유하고 있다.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고 학업에만 충실한, 가정에서 착했던 자녀들이 나라와 사회에 궁극적으로 도움이 되는 존재들일까? 윤석열과 소위 충암고 라인의 12·3 내란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법조인 출신의 국민의힘 정치인들도, 윤석열이 위헌적이고 불법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하기 직전 엉터리로 진행한 국무회의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같이 무기력하게 앉아 있던 국무위원들도, 김건희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가 작금에 줄줄이 사표를 쓰고서 줄행랑을 치려고 하는 서울중앙지검의 정치검사들과 대선에 노골적으로 개입을 시도한 대법원 판사들도 과거에는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잘하는 모범생들이었다.
지금 한동훈은 “엄마 인생도 엄마 인생이고, 내 인생도 엄마 인생”인 엄친아와 엄친딸을 극성스럽게 키우던 좋았던 그 시절의 기억을 영구보존하길 꿈꾸는 열혈 지지층의 등에 업둥이처럼 업혀 있다. 그가 하루속히 청산돼야 마땅할 시대착오적 구질서에 옹골차게 반항할 수 있을지 나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빨간색 천지였던 청중과 석촌호수 위편의 푸른 하늘이 유난히도 선명하게 대비되는 날이었다.
공희준은 “산업의 쌀이 반도체라면, 모든 콘텐츠의 쌀은 글”이라고 믿으며 정치평론과 인물비평을 중심으로 PC통신 시절부터 SNS 시대인 지금까지 글쓰기에 전념해왔다. '강남좌파', 먹고사니즘' 같은 21세기 한국사회의 시대상이 담긴 촌철살인의 신조어를 만들어낸 진짜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수만 평전> <지금은 강남시대> <보수의 종말> <퇴진하라> 등의 책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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