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고통 너머를 찾아 나서다- 고영미 작가

2025-05-18     심정택 미술칼럼니스트

지난 6일, 전시 <빨강의 기억>이 열린 서울 서초구 한전아트센터에서 고영미(45) 작가와 인터뷰를 가졌다. 10일 끝난 전시는 전쟁과 여성의 신체적·정신적 실존을 상징하는 색 ‘빨강’을 주제로 내걸었다. 작가는 자신이 페미니즘을 대변한다고 보지 않지만 관람객의 다양한 해석을 수용하려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붉은 색이 작업의 주조색이 된 것은, 2004년 군 복무 중이던 동생이 녹슨 철조망제거 지시를 받고 작업하다 사고를 당한 이후이다. 국군수도병원에서 만난 동생이 감은 붕대 아래로 흐르는 피와 눈물을 보았다. 작가에게 국군수도병원은 50여년이 흐른 6.25전쟁의 후유증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고영미 작가. 왼편 '젖과 꿀이 흐르는 땅, 162×360cm, 2024'은  별이 반짝이는 검은 하늘에 회색 전투기들이 정면을 응시하며 날아오르는 모습이다. (사진= 심정택)

종교학자 엘리아데(Mircea Eliade·1907~1986)에 따르면, 예기치 않은 장소, 사물, 시간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어떤 것, 즉 비범하고 초월적인 새로운 현상을 맞닥뜨리는 것은 종교적(체험)이다.

2005년, 국회에서 국군부대의 이라크 파견 연장 동의안이 통과되었고, 한반도는 핵을 둘러싼 북한과 미국 네오콘 정권간 갈등으로 전쟁 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2 한지 위에 채색, 프라모델 오브제 180×120cm 2006

다음 해 고영미는 미사일과 폭탄이 날아드는 전투 장면을 표현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거대한 국가 권력 앞에서 ‘과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자조하며 그림으로 시대를 비판한 ‘전쟁 풍경화’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색채와 형식에 구애 받지 않는 민화의 자유분방한 양식을 차용해 한지에 채색으로 작업하였다. 선경(仙境)으로만 익숙한 전통 산수화 이미지에 전투기와 나체 여인이 등장하곤 한다.

고영미는 동양화가 갖는 막연한 전통에 대한 존엄, 정신성 중시, 테크닉의 정점 쌓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구성과 구도에서도 전통 회화와 차별을 꾀하였다.

군에서 한쪽 눈을 실명하고 국가 유공자로 처우받게 된 동생으로 인해 북한의 핵 위협 뿐 아니라 전쟁으로 치닫는 국제정치 문제로 관심을 확대하게 되었다.  중·일간 영토 분쟁 지역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열도)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진다는 것도 알았다. 2012년 일본 정부의 민간인 소유 열도 일부를 국유화하자 군사적 긴장은 극에 달했다. 본질은 미·중 전략 경쟁이었고 이 흐름이 세계 질서의 축이 되고 있다. 

꽃, 장지에 채색 72×100cm 2024

고영미 작법(作法)인 ‘잔혹 동화’ 형식에서 ‘동화’는 두 가지 의미이다. ‘동화’(童話·fairy tale)와 동화’(東畵·oriental painting)이다. 전자는 겉으로 보이는 인간 세계의 상징성을 말한다. 후자는 동양화적인 이상향과 형식의 그림을 일컫는다.

고영미는 만 3년을 넘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전황 보도 사진에서 충격과 공포를 부르는 경험을 한다. 거리에 방치된 시신들, 군인들이 자행한 죽은 여인의 알몸에 새긴 표식 등. 작가는 이러한 이미지와의 접촉을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1930~2002)의 ‘예술의 형식화’로 설명한다.

전쟁에서 흘린 피의 이미지는 빨강 색이다. 연한 색부터 검정에 가까운 색까지 빨강의 스펙트럼은 넓다. 분채가 장지에 스며들고 발색하며 만들어지는 색은 직설적이고 적나라한 표현을 어느 정도는 차감시키지만 그 대비 또한 극적이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1883~1924)의 소설 <변신>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 방 안에서 눈을 떴을 때, 자신이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소설은 잠자가 경제적 능력을 상실하자 가족들이 처하게 된 노동 상황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소설이 쓰인 당시 초기 자본주의 사회 독일에서의 노동자들은 악조건을 견디기 위해 좁은 방 안에서 온 식구가 몸을 구겨 살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전쟁 풍경화’라는 형용 모순적이며 낭만적이기 조차 한 표현은 자신의 신앙과 새로운 생명에 대한 갈구와 신념, 자신의 몸이라는 현실과 싸우면서 리얼리티가 뚝뚝 흐르는 표현 양식으로 바뀐다. 카프카가 자기 자신을 의인화한 주인공을 벌레로 만들어 버리는 파격을 가져오듯 말이다.

고영미는 여섯 번의 유산과 아홉 번의 수술을 경험하였다. 온전한 생명으로 자라지 못한 채 사라져간 존재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 끝에 건강한 아이 둘을 얻었다.왜 자신에게 유산이 반복해서 일어나는지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독성이 강한 화학적 재료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몸에 섭취되는 식품으로 관심이 갔다. 먹고 사는 일상이 전쟁터 아닌가. 바다에 떠 다니는 미세 플라스틱을 먹은 물고기, 유전자 조작으로 집단 재배된 곡물 등.

식탁 풍경, 우드 조각에 과슈 채색, 가변크기, 가변 설치 2021 

제법 격식을 갖춘 레스토랑에서 볼 법한 화려한 요리, 먹다 남은 흔적의 접시, 먹음직한 디저트와 음료, 잔들은 겉모양을 딴 우드 조각에 채색되어 입체(부조)로 제작되고 오브제가 되어 벽면에 설치되기도 한다. 작가는 일상에서 갑자기 다가왔던 사건의 경험들을 다이닝 테이블 위에 배열된 사물들로 빗대었다. 불안한 욕망을 딛고 사는 인간과 이익 사슬 구조로 엮인 사회의 이면을 암시한다. 고영미는 성경 공부 3년여 동안 말씀 묵상과 기도, 미사에 참례하면서 ‘성모칠고(聖母七苦)’를 생각하였다. ‘성모칠고’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서 겪은 일곱 가지 고통을 상징한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찔릴 것이라는 시메온의 예언을 들었고(루카 2, 34-35), 이집트로 피난했으며(마태 2,13-15), 소년 예수를 잃었다가 찾았고(루카 2, 44-50) 십자가 길에서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아들 예수와 만났으며(루카 23, 27 ) 예수님이 숨을 거두기 전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9, 20)라는 말을 들었으며, 예수님의 시신을 껴안았고(마르코 15, 40-41) 예수님을 장사 지냈다.(마태 27, 59-61) 

스페인 살라망카의 베라 크루스 교회(Iglesia de la Vera Cruz)에 모셔진 '7개의 칼이 꽂힌 성모상'은 '비르헨 데 로스 돌로레스(Virgen de los Dolores·슬픔의 성모)'로 알려져 있다. 자주색 튜닉과 파란 망토, 흰색 머리 덮개를 착용한 성모 마리아의 가슴에 일곱 개의 은제 칼이 꽂혀 있는 모습이다.

마더, 장지에 한지 콜라주와 채색 162×130cm 2024

고영미는 성모칠고를 고통으로만 표현하지 않고 승화의 의미를 더한다. 작품 <마더>는 7개의 칼에 찔린 성모마리아의 심장에서 칼의 수를 3개로 변형한 것이다. 

“칼은 상처와 보호를 동시에 상징한다.(…) 형상과 빨간 색채는 어머니가 느끼는 극도의 고통과 자기희생 그리고 이를 감내하고 보호하고자 하는 모성의 복합적인 의미이다.”(고영미)

결국 피는 죽음과 생명 둘 다를 상징한다. 예수의 피로 상징되는 성찬 의례를 가지듯이 작가에게 색 얼룩 생성을 위해 오브제를 태우고 붙이는 과정이 답답함과 불편함을 불식하는 카타르시스이다. 그 과정은 만지기-물들이기-오리기-태우기-붙이기-그리기의 6단계이다.

빨강과 함께 자주 쓰이는 금색의 후광은 빛을 의미한다. 작품에서 피의 고통이 거룩하고 숭고한 것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낸다. 작품 <빛의 무게>는 샹들리에 상단에 위치한 칼에 찔린 채 불타오르는 심장 뒤로 금색의 커다란 빛이 자리잡고 있다.

빛의 무게, 장지에 한지콜라주, 채색 152×124cm 2024

숙명과도 같은 화업(畵嶪)을 통해 무엇을 보여줄 것이며 무엇을 찾고 있느냐는 자문(自問)이 박사 논문 <전쟁에서 도출된 빨강의 색채 상징 및 표현 연구>를 쓰면서 정리가 되었다고 한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공부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는 경험을 하였다.

예술과 버무려지는 사회성찰적 작품은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한다. 고영미는 관객이 환호하는 대중적 그림보다는 화가로서 또는 신앙인으로서 이 시대의 메시지를 전하는 매개자의 길을 가려 한다.

심정택은 2009년 상업 갤러리(화랑) 경영을 시작한 뒤 지금까지 국내외 45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했다. 그 이전 13년여간 삼성자동차 등에 근무하였고 9년여간 홍보대행사를 경영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기사, 2019년 4월부터 작가 및 작품론 중심의 미술 칼럼 270여편,  2019년~ 2023년, 건축 칼럼(필명: 효효) 160여편을 기고했다. 뉴스버스에는 2021년 창간부터 주1회 미술작가 평론을 게재해왔다. <이건희전, 2016년> 등 3권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