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는 밈(Meme)이 진화의 주역이 될까?
유전자를 대신하는 새로운 복제자
약 1년 전, 세계적인 걸그룹을 보유한 연예기획사의 여성 대표가 경영권 분쟁을 겪던 와중에 자청했던 기자회견이 큰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거친 표현도 불사하는 회견의 내용 못지않게, 그녀가 착용했던 녹색 티셔츠와 모자가 큰 인기를 끌면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이와 비슷한 일들이 간혹 일어난 적이 있는데, 김영삼 정부 시절 무기 로비스트로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여성이 착용했던 선글라스가 역시 불티나게 팔려나간 적이 있다. 희대의 탈옥수로 이름을 날렸던 신창원이 체포 당시에 입었던 티셔츠 또한 그 직후 없어서 못 팔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남의 것을 모방하고자 하는 이런 현상은 이른바 ‘밈’이라는 용어로 설명되곤 한다.
세계적인 진화생물학자이자 과학저술가로도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1976년에 낸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라는 책은 오늘날까지도 과학 분야 베스트셀러로 꼽히며 널리 읽히고 있다. 도킨스는 이 책에서 ‘인간은 유전자 보존을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기계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주장하여 큰 관심과 논쟁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런데 이 책의 마지막 장에 새로운 복제자로서 밈(Meme)이라는 개념이 제시되었는데, 그리스어로 모방의 의미를 지닌 ’Mimeme‘에서 따와서 생물학적인 용어인 유전자 '진(Gene)' 에 빗대어 만들어 낸 용어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밈이란 ‘비유전적 방법, 특히 모방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으로 여겨지는 문화의 요소’라고 정의되어 있는데, 이제는 우리나라 대중들도 널리 사용하는 익숙한 단어가 되었다.
생명체가 자신의 형질을 후대에 물려주어 전파하는 방법으로는 유전자(Gene)에 의한 복제의 방식을 취한다. 밈도 스스로를 복제하고 널리 전파하면서 진화한다는 점에서 생물의 유전자와 닮은 점이 많다. 그러나 유전자에 의한 복제는 반드시 부모가 자식에게만 물려줄 수 있으므로 시간이 오래 걸리고 개체 수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반면에, 밈에 의한 복제는 모방을 통해서 이루어지므로 정확성은 다소 떨어지지만 이른 시간 내에 거의 무제한으로 퍼뜨릴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유전자가 다윈(Charles Darwin)의 자연도태설에 바탕을 둔 진화론을 따른다면, 밈은 획득형질의 유전을 주장하는 라마르크(Jean Baptiste Lamarck)의 용불용설에 가까운 진화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노래, 광고, 사상, 패션, 건축양식 등 유행을 타는 인간 행위의 전파는 모두 밈에 의한 복제과정을 거치게 된다.
일부 학자들은 밈의 개념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 정의조차 불분명하며, 의미 없는 단순한 은유이거나 공허한 유추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앞으로 휴머노이드 로봇이 널리 대중화하거나 인공생명 등이 실제로 탄생하게 되면, 밈이 진화의 주역이 될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들도 많다. 기계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인데, 화제가 되었던 유명 SF영화들을 보면 이를 시사하는 듯한 구절이 간혹 나온다.
1995년에 나온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SF에니메이션 공각기동대(攻殻機動隊·Ghost in the Shell)는 이후 다른 SF영화들에 큰 영향을 끼치면서 오늘날까지 철학 논문에도 자주 인용될 정도로 중요한 화두를 남겼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형사’라는 정체불명의 존재와 이를 쫓는 사이보그 요원과의 대화에서 유전자와 아울러 밈이 언급된다.
세계 최고의 흥행 감독인 제임스 카메룬이 연출하고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주연을 맡은 터미네이터2(Terminator 2·1991)를 보면, 어린 소년 존 코너를 보호하는 기계 인간 터미네이터가 처음에는 인간이 왜 눈물을 흘리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스스로 용광로에 뛰어들려는 그를 말리며 존 코너가 눈물을 흘리자, “이제야 인간들이 눈물을 흘리는 이유를 알겠다”고 말하는 가슴 뭉클한 장면이 나온다. 사이보그인 터미네이터도 그동안 인간과 함께 생활해 오면서 바로 밈에 의해 가슴 뭉클한 인간성을 체득했다고 이야기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복제인간의 애환을 다룬 리들리 스콧 감독의 SF명작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82)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시한부 인생인 앤드로이드(복제인간)가 자신을 죽이려던 요원과의 격투 끝에 도리어 그를 살려 준다는 대목이 나온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의 구절을 연상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복제인간도 바로 ‘밈’에 의해 인간의 관용을 배웠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에이아이(A.I ; 2001)의 마지막에는, 감정을 가진 최초의 인조인간으로 탄생한 로봇 소년이 먼 훗날 인류가 사라진 지구에서 새로운 존재들과 조우하는 장면이 나온다. 끔찍한 가정일 수도 있겠지만 지구온난화 등 여러 원인으로 인하여 인류가 절멸한 이후에도, 휴머노이드 로봇 등이 밈에 의해 진화를 거듭하면서 인간의 새로운 후손으로서 대를 이어갈 수 있을까?
최성우는 일간신문, 잡지, 온라인 매체 등에 과학칼럼을 연재하고 TV 과학채널 코너에 출연하는 등 과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대 물리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LG전자 연구소 선임연구원, 중소기업 연구소장, 한국사이버대학교 겸임교수 등을 지냈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 과학기술부 정책평가위원, 교육과학기술부 과학기술정책민간협의회 위원 등 과학기술 정책 자문도 맡았다. ‘과학사 X파일’ ‘상상은 미래를 부른다’ ‘대통령을 위한 과학기술, 시대를 통찰하는 안목을 위하여’, ‘진실과 거짓의 과학사’ ‘발명과 발견의 과학사’ ‘과학자, 인간의 과학사’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