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항아리, 허공을 삼키다- 김효선 작가
김효선(Hyosun Kim•55) 작가는 2023년 전시<물질의 서사>에서 흙이라는 질료가 가진 특성을 파격적인 조형 언어로 표현하였다.
“미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대우받는 달 항아리를 그릇(용기·容器)에 대한 전복(顚覆)의미로 정형화하지 않은 생경한 공간에 설치하여 ‘대상을 본다’는 개념에 변화를 주고 싶었다.”(김효선)
영국 선더랜드 대학 앤드류 리빙스턴은 2016년 전시 <달 항아리 그 신선한 관점>에서, “역사적·문화적 고정 관념을 전복시켜 작품 자체에서 우러나는 힘을 지닌 개념적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며 ‘개념 미술(conceptual art)’ 범주에 넣고 있다.
미국 작가 솔 르윗(Sol Le Witt·1928~2007년)은 육면체 모듈을 증식 결정하는 것만으로도 한 예술가의 작품 세계는 정의된다고 했다. 김효선은 도자를 현대 미술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이론을 갖추어야 했다. 영미권 예술 교육의 강점은 ‘비평’이다. 기술과 기능에 있지 않다. 이론은 작업을 수반하며, 작업은 이론화가 따라야 하기에 스스로를 외롭고 두려운 경계 밖으로 추방하였다. 가족이 정착한 영국으로 방향을 잡았다.
김효선의 ‘달 항아리 피우다(Blossom Moon Jar)’ 시리즈는 달 항아리를 번식 가능한 생명체로 본 개념을 설치 방식으로 보여준다.
2003년 영국 카디프 대학 석사 과정 면접에서 교수는 김효선에게 한국에서 키워진 도예가의 정체성을 버릴 수 있는지 물었다.
한국에서는 대학 강의, 영국에서는 네 번의 전시와 공부를 하며 한국-영국을 오가며 2014년 선더랜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효선은 처음부터 달 항아리에 관심 있었던 게 아니다. 박사 지도 교수가 달 항아리를 공부 주제와 작품 세계로 접근하는 수단(tool)으로 제시하였다.
‘blossom moon jar’ 시리즈는, 공중으로 부상한 달 항아리가 마치 반도체의 집적도를 높이기 위해 쌓는 3차원의 건축적인 스택(stack) 방식으로 이어 붙여 확장하며 형태를 만든 구조로도 보인다. 달 항아리가 갖는 내부 공간(solid)과 형태의 경계를 무너뜨리듯 한다.
작가는 흙을 몰드에서 바로 빼어 붙여서 가마에 넣는다. 현실에서 드러나는 낯설고 이질적인 것과의 충돌로 야기되는 기이함 혹은 모순이 없다. 김효선은 달 항아리 개체들 간의 관계에 주목하였다. 어떠한 재료와 형태의 입체 작품도 장소와 상황에 따라 주변과 자연스러운 관계가 되며 어색할 수도 있다.
무언가를 담는 그릇 유형(type)에 속하는 조선 백자인 달 항아리에 미학적 가치를 부여한 미술사가 최순우(1916∼1984)의 묘사는 결국 자신이 살다 가는 시대를 느낀 시선이다.
"아무런 장식도 고운 색깔도 아랑곳 할 것 없이 오로지 흰색으로만 구어 낸 백자 항아리의 흰빛의 변화나 그 어리숭하게만 생긴 둥근 맛을 우리는 어느 나라 항아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대견하다. 이러한 백자 항아리들을 수십 개 늘어놓고 바라보면 마치 어느 시골 장터에 모인 어진 아낙네들의 흰옷 입은 군상들이 생각…"(혜곡 최순우 전집 1권 <白瓷 달항아리>중. 1992 힉고재)
현대의 시골 장터는 쇠락했으며 흰옷 입은 여인들도 없다. 무언가를 담아내는 달 항아리가 갖는 시간을 관통하는 매개성은 허공(장소)을 집어삼키려는 듯한 그 아가리에 있다. ‘담아내는’ 목적의 비존재 유형이 무언가를 삼키는 큰 입 가진 존재 유형으로 바뀐다.
"생명의 본체는 무형(無形), 즉 시공(時空)이 끊긴 자리이다. 생명의 본체는 무형이지만 그 본질인 씨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연을 만나 운행하게 되는 것이 생명이다." <탄허 법문 중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불교학자인 탄허(呑虛·1913∼1983년) 스님의 법명 ‘탄허’는 허공을 삼키다는 뜻이다.
전시장인 반지하와 계단에 놓인 작품들은 시공을 잇고, 지수화풍의 연이 돌도록 했다. 굽이 놓일 자리를 찾지 못한 달 항아리가 허공을 삼키어 상반과 하반이 합쳐진 주름 아래로 내려 보낸다.
도자기는 매병(梅甁)과 주병으로 나뉜다. 주병은 목이 길고 매병은 아가리가 넓다. 달 항아리 또한 매병에 속한다. 왕실 의례에 사용한 백자 항아리는 술을 담기도 하지만 사대부 집안에서는 엽전 같은 재화를 보관하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김효선의 장소 특정적(site- specific) 작품들은 판재와 판재를 용접하여 이어 붙인 금속 조각 작품을 보는 듯도 하다. 경계를 넘나들며 귀환한 김효선에게 달 항아리는 역사와 전통을 재해석하고, 미래를 담아가는 그릇이어야 한다. 정체성과 작업 모티브만을 가져오기로 했다.
“조선시대 미학관으로 보면 관요에서 나온 달 항아리는 실패한 작품이다. 상반과 하반을 합하는 방식은 이 땅의 기법도 아니다.”
작가는 '병렬 하이브리드, juxtaposition hybrid'라는 개념을 통해, 서로 다른 물질이 만나는 순간 발생하는 예측할 수 없는 변화를 작품 속에 담아낸다. 백자 흙과 검은 흙(black clay)을 대비해 보여준다. 대표적인 작품인 '흐르는 달 항아리(Flowing Moon Jar)'는 유리와 흙, 유약의 만남을 통해 물질 간의 관계에서 오는 변화와 리스크를 표현하였다.
백자대호(白磁大壺)가 영문 이름 ‘Moon Jar’를 얻게 된 것은, 2000년 영국 런던의 브리티시 뮤지엄(대영박물관)이 한국과 협업해 한국실을 개관하면서이다.
영국 도예가 버나드 리치(Bernard Howell Leach·1887~1979)는 일제강점기인 1935년 일본 민예가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와 함께 한국을 방문해 조선 백자를 영국으로 가져갔는데, 이 가운데 하나가 런던 영국박물관에 소장되었다. 조선백자 달 항아리가 100여년된 리치의 공방 도자(Studio poterry)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2005년 문화재청은 조선시대의 백자대호를 한꺼번에 신청 받아 심의한 뒤 국가지정문화재로 일괄 지정 받게 했다. 회화, 사진 작가들이 달 항아리를 대상으로 한 작업과 전시는 달 항아리 열풍을 달아오르게 했다.
김효선은 연구자 입장에서 작업한다. 리서치가 중요하며 담론의 중심에서 작업한다. 2021년 영국 남서쪽 콘월(Corwall) 세인트 아이브스(St Ives)의 버나드 리치 공방이 운영하는 레지던시에 초대받았다. 그 전해인 2020년이 공방 설립 100주년이었다. 영국 작가들이 달 항아리를 만들고 있었다.
2023년, 2024년 서울의 같은 전시장에서 연이어 개인전을 가졌다. 2023년 전시는 가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위험 요소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질료의 고유한 특성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2024년 전시는 물질의 자율성 드러내기였다. 물질은 단순한 조형적 요소가 아닌, 자율적으로 발현되는 존재적 주체로 작동하게 하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살부살조(殺佛殺祖)는 중국 당나라 고승 임제 의현(臨濟 義玄)이 남긴 법어(法語)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뜻이다. 자신이 절대적으로 믿는 대상을 극복해야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영국 비평가는 김효선의 ‘달 항아리 죽이기’로 보이는 작품들을 ‘위험 요소의 수용’이라고 완곡하게 표현한다. 한국에서 ‘동양=중국’의 음양(陰陽)사상의 핵심은 달(月)이다. ‘달 항아리’는 조선 주자학 세계관에서 나왔다. 서양 뉴에이지 음악 여왕 엔야(Enya)도 ‘양치기의 달(Shepherd Moons·1991)’에서 달빛이 언덕과 초원 위로 드리우는 고요한 풍경을 노래하였다.
2016년, 2023년, 2024년 전시는, 달 항아리가 회화, 사진 등 다양한 미술 장르로 변주되고 조명되는 광풍 현상이 문화적·역사적·민속적 가치의 본질은 사라지고 비트코인 같은 화폐 자본주의 아이콘이 된 것에 대한 절망, 풍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관람객들은 전시에 등장한 ‘깨지고 찌그러진 달 항아리’ 이미지를 낯설어했다. 실패한 작품이라는 고정 관념 때문이었다. 전시와 작품간 맥락을 이해하지 못했다. 김효선은 달 항아리가 물신 숭배의 대상으로 변하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자동차, 영화, 대량 생산되는 식품 등 대상에 의해 규정된 주체인 인간을 돌아보라는 의미의 팝아트와 같은 메시지로 읽히길 바랐다.
많은 현대 미술 작가들이 “고정된 주체는 없고 주변의 대상과 사물이 우리를 만드는 게 현대적 인간관”이라는 메시지를 내보낸다. 작품의 대상이나 재료는 작가 생각을 잘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김효선 작가는 허상을 배제하며 사유의 시간을 배태한 조각적이며 건축적인 달 항아리의 정체성이 세계적인 미감의 흐름과 나누는 대화의 가능성을 중요하게 본다.
김효선 작가의 개인전 ‘품다: 달과 빛 그리고 색’ 전시는 비트리 갤러리 서울점에선 5월 24일까지, 부산점에선 5월 1일부터 5월 24일까지 개최된다.
심정택은 2009년 상업 갤러리(화랑) 경영을 시작한 뒤 지금까지 국내외 45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했다. 그 이전 13년여간 삼성자동차 등에 근무하였고 9년여간 홍보대행사를 경영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기사, 2019년 4월부터 작가 및 작품론 중심의 미술 칼럼 270여편, 2019년~ 2023년, 건축 칼럼(필명: 효효) 160여편을 기고했다. 뉴스버스에는 2021년 창간부터 주1회 미술작가 평론을 게재해왔다. <이건희전, 2016년> 등 3권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