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자체가 십자가이고, 작은 부활의 연속이다- 한혜선 작가·갤러리스트

2025-04-20     심정택 미술칼럼니스트

2024년 봄 떼아트 갤러리 전시 작가 인터뷰를 갤러리에서 했다. 갤러리스트는 아프다고 했다. 지난 달 초, 전시 관람 후 갤러리 입구 쪽 사무 공간에 진열된 소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갤러리 대표의 작품들이라 했다. 인터뷰 요청했으나 병원치료 중이라는 답만 들었다. 2주가 지나 다시 연락, ‘지난 주가 힘들었고 이번 주 좀 나아졌다’며 3월 26일 약속을 잡았다. 갤러리스트이며 작가인 한혜선(65)은 2023년 12월 건강 검진에서 위암 4기 판정을 받아 지난 해 2월에 수술했다.

한혜선 작가 / 제공= 김상경 작가

한혜선은 한국에서 고교를 마치고 1980년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그랑쇼미에르(Grande Chaumiere)에서 1년 공부 후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ENSBA, 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s)에 합격했고, 1985년 데생(드로잉)과를, 1988년에 회화과를 졸업했다. 6년 과정의 보자르는 더 이상의 학위 과정은 없다. 보자르는 학생들에게 프레스코, 텐페라, 유화, 아크릴 등을 만드는 재료인 분말을 준다. 아교 등과 섞어 자신이 쓸 물감 만드는 법을 익힌다. 

“평면 작품은 염료이건 액체이건 간에 화면 위에 염료를 안착시켜 만들어 진다. 더치(Dutch·네덜란드) 황금기에(1588~1672)에 주로 사용되던 방식은은 아마씨 오일을 딱딱한 반죽 농도로 만들고 강철 롤러 밑에서 강한 마찰로 갈아낸다. 기름과 색료를 섞을 때 끈적거리거나 질지 않은 버터 같은 반죽을 만들어 순수한 테레빈유와 같은 액체 페인팅 매체를 혼합해 흐르는 질감이 필요할 때 사용했다.” <아트 컬렉터의 시대, 고동연 p41, 314~315>   

보자르 교과 과정은 작가 양성에 중점을 둔다. 파리 보자르는 파리만의, 지방 보자르는 그 지방의 특색을 지닌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 스승을 통해 이 땅에 이식된 서양화는 형태를 중시하는 선 중심이다. 근대인상파가 탄생한 프랑스 회화는 색 중심이다.”(한혜선)

프랑스인 스승은 힐책했다. “여기 아이들에게 동양을 알려주고 싶었는데(합격시켰는데) 넌 왜 우리하고 똑같이 그리느냐”고. 작업이 바뀌기 시작했다.

국내 대학 전임 취업을 의식, 현대 미술에 특화된 파리 8대학에서 조형예술학 학사·석사 학위를 새로 이수했다. 1989~1996년에는 파리 낭테르(Nanterre) 파크 국가 아틀리에에 장기 입주해 창작에 전념할 수 있었다. 실험성이 강한 전시로 명성이 높은 살롱 드 몽루즈(Beffroi de Montrouge) 전에 1990년부터 3년 연속 참가하였다. 금년 살롱 드 몽루즈는 68회째를 맞이했다. 1991년 파리 7구 부르고뉴 갤러리 EFTE 개인전을 비롯 수차례 전시회를 가졌다.

“두 사람이 산에서 대화하면서 느껴지는 에너지를 그리는 듯하다.” “프랑스 작가들에게서 나올 수 없는 선이 나온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파리 주류 미술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작업 외 요인들이 변수로 작용한다.

Personne, 천 위에 유화 200×160cm 1991

1996년 귀국하여 국내 첫 전시를 가졌다. 한혜선은 자유구상(Figuration Libre) 경향을 주제로 자신의 일상과 밀접한 이미지를 구현하고 싶었다. 귀국 전후로 원인 모를 병으로 심하게 아팠기에 스스로를 관찰한, 강한 형태와 색채로 표현한 인물화(자화상) 중심으로 국내 첫 전시를 금호미술관에서 열어 각광을 받았다. 회화의 기본은 색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앓던 병이 뇌종양으로 밝혀져 1997년 큰 수술을 받았다. 이후 작가는 죽음이 늘 자신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느낌으로 살며 고비도 여러 차례 넘어섰다.

꿈을 향한 창, 150×150cm 혼합재료 2008

2007년, 2009년 개인전은 새, 나뭇잎, 비행기가 단순하고 절제된 도상으로 나타났다. 국내 생활이 10년이나 지났으나 여전히 이 땅에서도 이방인적(étranger) 삶에 지쳐 여기를 떠나 잠시라도 어디로 날아가 새로운 삶을 경험하거나 지친 심신을 재충전하고 싶었던 게 비행기였다고 말한다. 자신의 가톨릭 세례명 에스텔(Estelle)의 의미는 별이다.

여행, 100×100cm 혼합재료 2008

2009년 전시 후 8년 만인 2017년 개인전 <폭탄 선언> 전은 16년 간의 프랑스 체류 중에 현지인들로부터 끊임없이 “너네 나라는 전쟁중이지?”라는 질문을 들어야 했고, 비평가들도 ‘한국=분단국가’라는 표현을 꼭 집어넣는 걸 보면서 떠올린 전쟁가능성이 모티프가 됐다. 이를 상징적으로 상징적으로 희화화한 게 미사일이다. 사람 손처럼 뻗어 있는 미사일은 샤넬이나 루이비똥의 로고를 본 떠 삐죽삐죽하다.

'폭탄 선언' 전시 광경 2017년

한혜선은 “전시 작품에 반영된 미사일은 미국이 최초로 우리나라에 제공한 두 종류의 미사일(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전적 기념관 전시)을 패러디한 것이다.”고 답했다. 

미국이 한국에 최초로 공여한 미사일은 1960년대 초반에 도입된 나이키(Nike Hercules)미사일과 방공포로 쓰인 호크(HAWK)이다.

한혜선은 2017년까지 대학과 예술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2020년 전북 장수군에서 가진 전시 <말과 편자>는 장수군을 홍보하는 목적이었다. 군 관계자는 사과, 한우, 오미자가 장수군을 상징하는데 모두 빨강색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하며 한혜선 작품의 빨강색에서 에너지가 나온다고 평했다.

1500년 전 장수 가야의 존재는 제철, 고분, 봉화 유적 등으로 확인되었고, 2019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동촌리 고분군에서는 가야문화권 최초로 편자와 말뼈가 출토되었다. 장수군의 새로운 상징이 된 ‘말과 편자’로 옛 것들을 표현하는 작업을 하였다.

기품있는 삶, 130×97cm 혼합재료 2020

2021년 서울 서대문 경희궁자이 아파트단지 작업실로 사용하던 공간을 확장해 ‘떼 아트 갤러리’를 개관하였다. ‘떼 아트’는 우리말 ‘목적이나 행동을 같이하는 무리’라는 뜻의 ‘떼’(TTE)에서 따왔다.

2022년 한혜선은 편저자로 프랑스 고등학교 미술 교과서로 쓰이는 다니엘 라콤므(Daniel Lacomme, 76)가 펴낸 여섯 편의 책(부르다스 출판사 간) 중 ‘색채’ 편과 ‘형상과 추상’편을 추려 <색채& 형상과 추상-활기찬 아틀리에, 떼아트 갤러리 간>을 펴냈다. 원작 ‘색채’ 편과 ‘형상과 추상’편에 각각 한혜선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다니엘 라콤므는 ENSBA 시절의 스승이다.

한혜선의 작품은 액자(프레임)와 그림이 따로 놀지 않는다. 캔버스가 등장하기 이전인 17세기 유럽에서 미루나무나 참나무 패널을 사용하던 두툼하게 느껴지는 매스(mass) 느낌이 있다. 면이 밋밋하고 반듯하다고해서 평면인지를 묻고 있는듯 하다.

한혜선은 알루미늄 주물 프레임에 캔버스 평면을 일체화시켜 페인팅을 한다. 작품이 오랫동안 보존된다. 평탄 작업이 된 대리석에도 그림을 그린다.  

그림 이전의 그림- 나를 찾아서 130×130cm 혼합재료 우드 2023

2023년 전시 <그림 이전의 그림>은 '대상이 없는 상징'과 신비를 드러내며, 의식적으로 그린 그림보다 더 암시적인 이미지로 나타난다는 평가를 받았다.

작품 ‘그림 이전의 그림’은 아크릴과 가루 콘테를 안료와 아교와 혼합하여 원하는 색을 만들어 작업했다. 선이 단순하게 표현되었고 여백도 생겼다.

2024년은 한 걸음 한 걸음을 떼기도 힘들었다. 생과 사를 넘나든 과정에서 다행스럽게도 겨우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힘들었던 한 걸음 한 걸음이 조금씩 가벼워지고 주위를 돌아볼 여력이 생기면서, 햇빛과 자연의 생기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들은 예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감각이 되살아나면서 본 새로운 것을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 1주일 만에 서른 점이 넘는 그림을 쏟아 내었다. 토해 냈다는 게 더 적합한 말이다. 2025년 <나무 그리고 꽃> 전시를 가질 수 있었다.

나무 그리고 꽃 72.7×60.6cm 혼합재료 2025

제 자신이 지고 온, 또 지고 가야 할 십자가를 묵상합니다.
어쩌면 인생 자체가 십자가이고, 또 작은 부활의 연속일지 모릅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위로를 받고 
용기를 내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최영선 알렉산델 수사, 페이스북 글 인용>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는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황지우 시,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1985) 중>

한혜선 작가는 여전히 일반 항암과 표적 항암제 치료를 받고 있다. 부활절날, 카톨릭 신자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위로를 받고 푸르른 4월 하늘을 들이받으면서, ‘기쁘게 떳떳하게’ 생을 즐기기를 기원한다.

심정택은 2009년 상업 갤러리(화랑) 경영을 시작한 뒤 지금까지 국내외 45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했다. 그 이전 13년여간 삼성자동차 등에 근무하였고 9년여간 홍보대행사를 경영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기사, 2019년 4월부터 작가 및 작품론 중심의 미술 칼럼 270여편,  2019년~ 2023년, 건축 칼럼(필명: 효효) 160여편을 기고했다. 뉴스버스에는 2021년 창간부터 주1회 미술작가 평론을 게재해왔다. <이건희전, 2016년> 등 3권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