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에 자리잡고도 갈 수 없었던 '용산 공원'

2021-10-26     황현탁 여행작가

1904년2월23일 외부대신 이지용(李址容)과 일본 공사 하야시(林權助) 사이에 체결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제4조에는 “제3국의 침해나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제국의 황실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대일본제국 정부는 속히 임기응변의 필요한 조치(臨機必要の措置)를 행할 것이며,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할 것. 대일본제국 정부는 전항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검수용(軍略上必要の地点を臨検収用)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용산 미군기지 주변 전경 (사진=황현탁) 

이 조항에 따라 일본은 1904년 4월 한국에 ‘황실안녕과 영토보전을 위한’ 주차군(駐箚軍, 외교사절인 군대) 사령부를 설치하고 8월에 용산일대 300만평을 강제 수용한다. 1906년 수용지 내 가옥, 분묘 등을 철거한 후 공사를 시작하여, 1908년 병영과 병원을 완공하고(118만평으로 최종확정), 사령부를 중구 남산에서 이곳으로 이전하여, 이후 용산이 한 세기 이상 외국군대 주둔지가 되는 운명에 처한다. 용산기지 영내 용산구청 맞은편에는 해발 65.5m의 나지막한 둔지산(屯芝山)이 있는데, 조선시대에 그곳에 군량을 조달하기 위한 둔전(屯田)을 둔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한국전쟁의 와중인 1952년 한국정부가 용산기지를 미군에 양여한 후, 1990년 한미 양국 간에 용산기지를 돌려주기로 하였으며, 2003년 평택으로 이전하기로 합의한다. 2007년에는 <용산공원조성특별법>을 제정하여 본격적인 공원조성사업에 나선다. 물론 법 제정 전에 전쟁기념관은 1994년 6월, 국립중앙박물관은 2005년 10월 개관한다. 공원조성 안 국제공모를 실시하여 당선작을 결정하였는데, 건축가 승효상씨가 이끄는 ‘이로재’(履露齋) 컨소시움의 <HEALING : THE FUTURE PARK>가 1등으로 당선되었다. 

법 제정 후 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이 설치되어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가면서 장기적인 안목에서 공원을 조성해 나가고 있다. 이미 전쟁기념관, 박물관이 들어선 지역을 포함하여 면적이 291만㎡인데(여의도 면적과 비슷), 지금도 국민들의 제안을 받고 있으며, 전시실 의견제안코너에는 어린이 놀이터, 조깅코스나 자전거도로를 만들어 달라는 의견 등을 볼 수 있었다.

지난 10월 20일 다녀 온 ‘용산공원’은 옛날 미 영관급장교 숙소(5단지)로 16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985년 주택공사(LH전신)가 시공하였다. 크기는 45평, 57평형으로 계급이 아닌 가족 수에 따라 숙소가 배정되었다고 한다. 

지난해부터 개방된 그곳에는 일제강점기부터의 기지나 주변사진을 전시하는 야외갤러리, 잔디밭, 카페, 자료실(미공개), 한국근무 미군장교들의 회고담이나 자료, 생활상 등을 전시하는 오픈하우스, 음악회 등 다중참여공간인 파빌리온, 용산공원 전시공간 등이 기존의 숙소나 커뮤니티센터를 활용하여 조성되어 있다.

용산공원 내 야외 바베쿠장 (사진=황현탁)

야외 바비큐장도 두 곳이 있는데, 한 곳은 ‘Black Hawk Picnic Area’로 이름 붙였는데, 70년대에는 그곳이 ‘Blackhawk’라는 헬기 기지로 이용되었다고 하며, 가까운 출입문인 Gate 8에도 ‘Blackhawk Village Gate’란 표시가 남아있다. 오픈 하우스에 전시된 가족들이 모두 그곳 숙소에 살았던 것이 아니며, 전시를 위해 특별히 준비된 것이다. 다양한 가족들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으며, 미8군 사령관을 역임한 Thomas Vandal 장군가족의 사진과 이야기가 관심을 끈다.(세 아들 모두 해군사관학교 출신 장교)

용산기지 외부에도 삼각지 쪽의 캠프킴, 이태원 쪽의 UN사부지(16,000평), 수송부기지(24,000평) 등 군사목적 부지가 있으며, 미군 전용택시였던 ‘아리랑택시’ 부지에는 용산구청이 들어서 있다. 수송부기지는 일제 강점기 일본 공병부대 주둔지였으며, 그 부대가 1928년 6월 중국 만주국 군벌로 청나라와 일본에 위협이 되었던 장작림(張作霖, 장쭤린) 열차 폭사사건에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도 당시 병영건물이 남아있다. 예정된 용산공원 밖의 부지는 처분하여 기지이전비용에 충당한다고 한다. 

용산공원 미군 수송부기지(일본 공병부대 주둔지). (사진=황현탁)

젊은 연인들 방문객이 많았으며, 그들은 주택이나 남산을 배경으로 스마트폰으로 쉴 새 없이 사진을 찍었다. 평일 낮 시간임에도 외국인 노동자도 목격되었는데, 일자리를 잃어 찾은 것은 아닌지 괜히 걱정되었다. 코로나19 때문에 방문객 수를 200명으로 제한하고 있는데, 내방객 수를 파악하기 위함인지 별 필요도 없는 출입증을 나눠주고 있었다. 

전시관 영상 자막에서 볼 수 있듯, 용산기지는 1904년부터 116년간 “우리 곁에 있었지만 가까이 갈 수 없던 땅”이었다. 과거에는 4대문 밖이어서 궁궐로부터는 외곽지대였지만 개발과 도시화로 시가가 확장되면서 그 땅은 서울의 도심이 되어버렸다. 도시 한가운데 외국군이 주둔하고, 이 땅의 주인은 접근할 수 없다는 항변, 또 적이 불장난이라도 벌이면 수많은 무고한 국민이 피해를 입는다는 외침에 마침내 우리 땅으로 돌아왔다. 

남산의 남쪽 자락에 위치한 용산기지는 더 이상 ‘금단의 땅’이 아니라, ‘휴식의 공간, 문화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주변에 전쟁기념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한글박물관이 들어섰고, 또 다른 문화시설이 들어설 수도 있다. 역사의 흔적은 남겨 교훈으로 삼되, 미래와 후손을 위한 공간으로 재탄생되기를 고대한다.   

황현탁은 미국, 일본, 영국, 파키스탄에서 문화홍보담당 외교관으로 15년간 근무했다. 각지에서 체험을 밑천 삼아 이곳 저곳을 누비며 여행작가로 인생2막을 펼쳐가고 있다. 『세상을 걷고 추억을 쓰다』, 『어디로든 가고 싶다』 등 여행 관련 책을 썼다.